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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내 맘대로 감상문

10월 12일. 애도의 시간

 번쩍 눈이 떠졌다. 시계는 새벽 4시를 향하고 있다. 이 시간에 수면 위로 떠오르는 또렷한 의식이 당황스럽다. 왜일까? 한 달 넘게 매일같이 중환자실 주변을 서성이다 어제 처음으로 그 서성거림을 멈췄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상황이 변해서 돌아온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상황을 주의깊게 바라보던 나의 시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미도의 의식은 여전히 이 세상을 응시하지 못하고 있지만, 한 달 넘게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서 그를 응시하던 나의 시선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회수당한 것이다. 그리고 맞이한 첫 새벽 4시, 지금 이 시간에 나의 의식을 깨운 것은 무엇일까? 오랜만에 누워본 나의 침대가 어색해서? 그건 이유가 아니다. 새우잠을 자야 하는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에서도 새벽에 잠을 깨는 일은 없었다. 이유를 찾지 못하는 뒤척거림이 얼마나 되었을까? 창문 사이로 엷은 아침의 빛깔이 베어져 나왔다. 침대를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번쩍 떠진 눈이 다시 감길 것 같진 않았다.

오랜 시간 방치된 화장실은 짧고 긴 머리카락과 누런 물때와 비누 찌꺼기가 어지럽게 널려있었다. 거울 사이로 비친 내 모습이 초라하기 그지없다. 요즘들어 면도를 하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그 줄어든 횟수만큼 꺼칠해진 모습으로 세상과 만나는 시간도 길어졌다. 이제껏 세상에 대응하는 나의 방식은 대부분 깔끔하고 선명했다. 문제에는 언제나 답이 있기 마련이라 믿었고, 그 답은 많은 부분 나의 능력과 의지에 의존해있다고 믿었다. 아내와의 관계가 엉크러졌을 때도, 회사에서 해고통지서를 받을 때도, 내 안의 이유와 답은 분명했고, 그 분명함만큼 삶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죽음 문턱을 오가는 미도를 바라보면서 내 삶은 어쩔줄 몰라하며 한발짝도 나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하나?” 이 질문에 내 자신이 이렇게 무력할 수 있다는 것이 당황스럽다. 미도가 다쳐 중환자실에 의식없이 누워있던 그 날 이후 나의 삶은 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일상적인 삶의 공간, 회사도 가정도 학교도 많은 부분 방치됐고, 불확실한 미래에 어쩔줄 몰라하고 있으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새벽 4시, 방치된 화장실에서 어쩔줄 몰라하며 방치된 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면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만 조금은 어색한, 새벽 4시에 깨어있는 내가 조금은 정리될 것 같았다.

새벽 5시 집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직 거리는 어두웠고, 조용했다. 항상 보고 걷던 그 거리가 생소한 것은 시간의 탓일까 기분의 탓일까? 주차장에는 미도가 아끼던 차가 숨죽여 자고 있다. 사고가 나기 전날 미도는 이 차를 몰고 내 여동생 비와 이제 100일이 겨우 지난 조카 정희를 태우고 일산 유아 박람회에 다녀왔다. 휴가 마지막 날이었다. 미도가 그때 들고간 가방, 그때 들렸던 주유소에서 결재한 영수증과 거기서 받은 여행용 티슈, 그리고 박람회에서 샀던 정희 장난감들이 여전히 차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차안의 수많은 소품들, 가족 사진, 인형, 지도, 잡지, 우산, 라이터 등은 미도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차는 일상적으로 있어야 하는 주차장이 아닌 엉뚱한 주차장에 잠들어 있고, 이 차의 키를 쥔 인간 역시 엉뚱하기 그지없다.

사고가 난 당일, 그는 여느때처럼 자신의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세워진 차를 몰고 CBS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춘채 출근길에 나섰다. 한 시간 남짓 액셀과 브레이크를 쉬없이 번걸아 밟았고, 그렇게 회사에 도착했으며, 사무실 한 켠에 마련된 흡연실에서 담배 한 대를 피면서 이제 막 뒤집기를 시작한 정희 동영상을 동료들에게 자랑하듯 보여줬다. 그리고 출장지인 서초동으로 향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내부순환도로를 오가는 출퇴근길에서 듣던 라디오, 비 몰래 피우던 담배 한가치, 점심을 후딱 헤치우고 당구장으로 향하던 발걸음, 나무이름을 부르며 약을 주고, 주사를 놓던 손길, ‘정희야 아빠해봐 아빠!’하던 목소리, 언젠가는 수목원을 만들겠다는 꿈, 좀 씼으라고 구박하는 비를 덥썩 안고 사랑해라고 장난스레 말하는 목소리는 그 시간 이후 의식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한 달, 의식 있던 미도가 끌고다니던 차는 의식없는 미도가 누워있는 병원을 오가는 차로 바뀌었다.

주차장에 들어선 나는 시동을 켜고 한참동안 출발하지 못했다. 어디로 갈까? 병원으로 가야한다는 마음과 가기 두렵다는 마음이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새벽 4시 내 의식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한 감정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라는 것을 그때서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 새벽 나는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은 미도 차안에서 애써 보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결국은 직면할 것만 같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지난 한 달간 의식 저편으로 사라진 미도는 죽음의 경계 사이를 수십번도 더 오갔다. 그러나 그 경계를 어깨 너머로 바라보면서도 나는 한 번도 죽음이라는 단어를 내 안에서 꺼내 본 적 없다. 꽁꽁 가슴 속에 가둬두었고, 자물쇠로 죽음이라는 소리를 가둬두면 그것이 나의 일상 앞에 펼쳐지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꼭꼭 갇혀있던 죽음이라는 말이 새벽 5시, 평상시에는 무의식의 저편을 헤메고 있을 그 시간에 있어야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하는 미도의 차 속에서 갑작스럽게 떠오른 것이다.

나는 서울을 빠져나와 무작정 동쪽으로 동쪽으로 향했다. 네비게이션도 없고 목적지도 없었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오로지 차만 몰았다. 구리를 지났고, 가평을 지났고, 춘천을 지났다. 처음에는 그 운전이 그렇게까지 멀리 갈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쉽게 핸들을 돌리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간은 9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춘천을 한참 지나 산을 오르내리는 2차선 도로에서 양구 30킬로미터라는 표지판을 본 후였다. 내게 양구는 일상적인 공간과 한참 떨어진 마을이다. 앞 뒤로 높은 산이 첩첩으로 쌓여 있고, 그 주름 사이로 수많은 육군 부대가 자리잡고 있다.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구, 그곳은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가 나지 않는 이상 절대 세상으로부터의 관심을 받지 않는 공간이고, 훈련소에 입소한 애인이나 아들이나 친구가 없다면 굳이 찾아갈 이유가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양구 30킬로미터라는 표지판에서 나는 산과 철조망으로 둘러쌓인,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고립된 공간을 떠올렸고, 그 순간 병원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오늘을 부정하고 싶지만,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핸들을 돌려 서쪽으로 돌아오는 길, 6시간 넘게 차만 운전하다, 처음으로 멈춘 곳은 양평의 용문사였다. 거기에 들려야겠다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뜬금없이 새벽 4시에 눈이 떠진 것처럼, 무작정 차를 끌고 동쪽으로 향했던 것처럼, 용문사도 특별한 이유없이 들어섰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꽤 오랜 시간 그곳에 머물렀다. 대웅전에서 들려오는 스님의 낮고 깊은 경소리를 한참동안 들었다. 내가 그 소리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이해라는 것, 해석이라는 것,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닐 때도 있다. 용문사에서 내게 필요한 것은 요란한 설명 없이 고요한 향기로 전해오는 느낌, 위로, 확실히 그런 것들이었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대웅전 계단을 내려와 주차장으로 향하던 길에서였다.

“오늘을 넘기기 힘들 것 같습니다. 빨리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혹시 영정사진으로 쓸만한 사진 좀 구할 수 있을까요?”
“제가 앨범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용문사 주차장 옆 슈퍼마켓에서 담배와 라이타를 샀다. 한동안 끊었던 담배 한 가치를 꺼내 불을 붙인 후 깊게 빨아들였다. 그렇게 연거푸 세 가치를 폈다. 더 이상 몸이 담배 연기를 버텨낼 수 없을 때까지 빨아들이고 내뱉고를 반복했다. 그리고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오늘 한끼도 안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담배를 피고,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다시 담배를 피고... 나는 용문사 주차장 근처에서 빨리 병원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고도 한 시간 가까이 서성거렸다. 마치 출발을 미룰 이유를 찾고 있는 사람 같았다. 더 이상 그 이유를 찾지 못할때쯤 나는 차로 돌아갔다.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굵은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뚝뚝... 빗소리에 맞추어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3시간 후 미도의 몸에 꽂혀있던 7개의 호스가 모두 제거되었다.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그 날을 생각한다. 새벽 4시에 눈이 떠진 날, 아무 이유없이 동쪽으로 동쪽으로 차를 몰고 갔던 날, 용문사에서 경소리를 한참동안 듣던 날, 미도가 저 세상으로 떠난 날. 그 날 나를 당혹스럽게 만든 감정이 무엇이었을까?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꼭 그런 게 아닐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그날 차마 말하지 못했던 미도의 죽음을 가슴 속에서 꺼내놓았고, 그 단어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나는 마땅히 할 말을 알지 못했다.

2010년 가을은 내게 애도 기간이다. 그가 떠난지 한 달이 지났는데도 나는 여전히 떠난 자를 애도하지 못하고, 그 때 내가 느꼈던 당황스러움, 불안함의 감정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그게... 미안하다. 나의 마음은 여전히 용문사 주변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떠난 그 놈을 제대로 만나지도, 제대로 슬퍼하지도 못하고, 그냥 당황스럽고 회피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은 내 안의 마음에서 삐걱거리고 있는 거다.

“이제 보내세요. 잊는 게 아니라, 회피하는 게 아니라, 잘 보내셔야 돼요.”
지난 주 어느 수업에서 선생님이 나의 글을 읽고 넌지시 보낸 조언이다. 잘 보낸다. 이 말이 꽤 오랜 시간 가슴 속에 남았다. 정.말. 잘 보내는 게 필요한지도 모른다. 도망가고, 부정하고, 회피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것을 넘어...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지난 며칠 “잘 보내는 것”, “또다시 잘 살아가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했다.

누구나 떠난다. 그 떠남은 대부분 기약도 예고도 없다. 그 기약없고 예고없는 이별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수많은 감정의 수위를 넘나든 후, 잘 보내고, 또 다시 잘 살아가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 아닐까? 2010년 지구, 바로 이 시간 속에서..

문뜩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날은 선선해졌다. 옷장 정리를 했다. 지난 여름, 병원을 오가며 입었던 옷들을 장롱 깊은 곳에 넣었고, 장롱 깊은 곳에 놓여있던 가을, 겨울 옷들을 꺼내 다림질을 하고,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시간은 흐르고, 난 그 흐름 속에 다시 변화된 일상 속에 젖여들고 있다. 그렇다고 지난 여름 흘렸던 눈물과 상처와 당황스러움의 감정을 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 보내고,, 다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미도야,
어떠니?

가끔씩 네가 살고 있는 세계가 궁금해. 뭐라고 할까? 그 세계가 이 세계와 그다지 멀리 떨어져있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네 기운이 느껴진다고 할까? ^^ 딱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미도 네가 정희와 비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삶을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아.

미도 네가 이 세상을 떠난 후, 난 한동안....

불쌍해. 불쌍해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았다. 밥을 먹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책을 보다가도, 미도 네가 생각나면 불쌍해서 나도 모르게 울컥울컥했다. 울컥울컥이 아니라, 통곡을 했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 거다.

이제는 그 말 그만 하려구.

이 세계가 전부라면 네가 그렇게 떠나버린 것을 이해하기도 수용하기도 힘들지만... 그래서 넌 내게 언제나 불쌍한 놈이겠지만....

우리의 삶에서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 단순히 믿음 차원을 넘어 어떤 확신으로 다가선다. 그래, 그게 천국이든, 하늘나라이든, 영생이든, 윤회든, 2Q10년이든, 영혼이든,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이 이해불가능한 지구의 2010년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 같아. 그리고 보이진 않지만, 네가 살고 있는 그 세계와 이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져있을 것 같아.

미도야...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 멋지게 꾸려가길 바래. 이 세상에서 느꼈을 아픔과 상처를 발판으로 좀 더 많이 일상에 감사해하고, 좀 더 넉넉한 사랑을 받고 주면서,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가끔씩 이 세계에서 너를 잊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 특히 네가 사랑했던 비와 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정희를 위해 기도하고 응원해주면 좋겠다.

나 역시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너를 위해, 그리고 네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비와 정희의 내일을 위해 기도하고 응원할게.

다음 주가 벌써 너의 49재야.
이 세상의 시간은 또 이렇게 흘러간다.
너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시간보다 너를 잊고 살아가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질거야. 너도 그렇겠지. 이 세상에 대한 기억보다 그 세상에서의 일상이 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겠지. 그래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잊지말자. 우린 서로를 응원하고 있다는 것.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

잘가.
미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