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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내 맘대로 감상문

관계의 위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모네 <런던국회의사당>

 

사회는 내게 완전히 자유를 주는 척하지만 막상 선택권은 제한되어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현실은 이래저래 갈등적이지만 진실은 심플하다. 그래서 노래가사가 모두 진부한 거다. 외로워도 힘내자. 아파도 Keep Going! 그런데 말은 심플해도, 삶은 복잡하다. 그게 늘 문제다.

 

 요즘 공간, 도시에 대해 공부 중인데 독일의 사회학자인 짐멜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인간은 목적성을 가진 동물이다. 사람들은 목표를 정하고 성취하기 위해 도구를 만들어 사용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애초에 수단이었지만, 심리적으로는 목적이 되어버리는 돈에 점점 더 많이 의존하게 된다. 화폐는 목표가 된 수단의 가장 극단적인 일례다. 이제 (도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산다. 그들은 계산적이고 명확하게 사고한다. 그들은 감정으로부터 계산을 끌어낸다. 그들은 사람과 물건, 상황을 확실하고 빠르게 재단하는 정신적 능력을 발전시킨다. 그렇게 화폐는 사람들 사이의 비인간적 관계를 조장한다.”

 

 이런 이야기 끝에는 늘 이런 말이 따른다. 돈보다 중요한 것이 많다. 돈 때문에 관계가 삭막해져서도, 인간이 소외되어서도 안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말이 무색하다. 돈이 인간성의 소외를 초래한다지만 오히려 누군가에게는 인간적인 삶을 가져다 줄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만큼 이 거대한 서울이라는 공간은 상대적 박탈감과 절대적 빈곤과 알 수 없는 허기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게다가 이놈의 삶이란 어찌나 이렇게 불안한지... 게다가 인간의 욕심이란 왜 이리 끝도 없는지...

 

 그래서 새로운 관계, 새로운 배치, 새로운 사유는 우리 사회에서 점점 더 어려워지는지도 모른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다.

“자기 삶에 대한 긍정은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극복이다. 오늘의 나를 죽여야 내일의 나가 태어난다. 그래서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 나는 너희들에게 내 방식의 죽음을 권한다. 내가 원할 때 찾아오는 자유로운 죽음 말이다. ...... 가장 맛이 들었을 때에도 남에게 계속 맛을 보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 오랫동안 사랑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알고 있다.”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니체의 말이 여전히 우리 시대에 먹히는 것은, 인간이란 애시당초 그렇게 생겨먹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니체의 책을 보고 가슴 뛰고, 그래 이래야지 하는 것 아니겠나? 애시당초 어제를 죽인다는 게 말이 되나? 그냥 말장난 아닌가? 수사 아닌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가능한가? 어제의 기억과 관계와 습관이 여전히 오늘 내 앞과 옆과 뒤에 떡하니 놓여있는데... 그러기엔 우리의 기억과 관계와 습관이 너무도 강력한 것 아니겠나? 그래서 사랑도 꿈도 청춘의 산물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배치하는 것은 점점 더 너무도 어려워지고,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을 가능성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꿈꿀 가능성도 줄어든다. 새로운 맛을 선보이기엔, 과거의 신내가 너무 주렁주렁 매달려있기 때문이다.

 

 

바스키아 <무제>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단순하다. 자본주의, 삼성, 민주주의, 통일, 이명박, 미국, 신자유주의 그런 것 아닌 것 같다. 내가 사랑하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관계들, 사람들, 내 안의 무수한 욕망들과 내가 담당해야 하는 윤리, 규범들의 충돌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사건들, 문제를 푸는 기본적 토대가 지갑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수많은 사건들,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의 하소연, 원망, 눈물, 오해, 싸움. 이게 진짜 삶에서 느끼게 되는 고통이다.

 

이 고통을 대화와 소통으로 풀라는 말만큼 공허하고 폭력적인 말은 없는 듯 싶다. 우리는 소통을 최선,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다. 모두가 불통이 문제라 말하고 소통이 잘 되면 만사가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때로는 이 잘난 소통이 폭력에 맞선 대안이 아니라 그 자체가 폭력이 된다는 것을 아는가? 불행의 해결책이 아니라 소통하라는 강요가 오히려 불행의 시작점이 되어버리는 것을 아는가? 사람들은 어떤 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때, 그것이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서, 자주 만나지 않아서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갈등 국면에서 발견하여야 하는 것은 가족끼리든 가족 밖에서든 문제는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것, 우리는 늘 치고 박고 싸우면서 끊임없이 침묵의 감정노동, 인내의 감정노동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 문제를 감내하고 인정하는 감정노동을 감수할 때만이 관계가 유지될 수 있다는 진실이다. 이 노동이 끝나는 순간 꽝~ 모든 것은 끝난다.

 

그래서 관계는 어렵다. 사실 두렵다. 관계는 늘, 자주, 존재가 통제하고, 노력할 수 있는 범위를 훌쩍 넘어서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지금 당신 옆에 있는 누군가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당신이 관계맺는 누군가의 지난 삶과 역사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가? 당신은 당신 스스로의 마음 속에 꼭꼭 숨겨둔 당신의 아픔, 과거로부터 묵혀진 아픔, 상처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가? 그렇게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사람 A와 B가 만나 사랑을 한다. 관계를 맺는다. 우정을 쌓는다. 가족을 이룬다. 이 관계라는 것, 기본적으로 불확실할 수밖에 없다. 세상에 대한 인식, 타인에 대한 윤리, 인간에 대한 태도 등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가치 척도로는 상상할 수 없는 사건들과 가치들의 충돌이 그 관계망 속에 무수히 촉발되기 때문이다. 관계는 늘 불확실성을 내재하고 있고, 답은 없고, 그래서 문제는 복잡해진다. 여기에는 옮고 그름이 없다. 다만 선택에 따른 책임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책임이 내가 버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면? 방법은 훌훌 기존의 관계망 속에서 벗어나거나, 힘들고, 지치고, 미치겠지만, 그 책임을 계속해서 감당하거나...

 

그런데 관계의 문제든, 존재의 문제든 개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개인이 온전히 져야한다는 것은 너무도 잔인하다. 선택이 끔직한 것은 선택의 주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고,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허풍과 선동에 있다. 그런 것 없다. 선택이란 애시당초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태어난 것도 나의 선택이 아니고, 죽는 것도 나의 선택이 아니며, 그 탄생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건들, 관계들 역시 알고 보면 나의 온전한 선택이 아니다.

 

 

Erin Stack, Making a Difference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작든, 크든 선택에 대한 책임, 리스크를 쥐게 되고, 어쩔 수 없이 그 리스크를 감내하게 된다. 우치다 타츠루는 ‘하류지향’에서 리스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리스크를 목적어로 취하는 동사로 자주 쓰는 단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take, 다른 하나는 hedge. 리스크를 테이크한다는 말은 전망이 확정적이지 않은 계획에 뛰어든다는 것이다. .. 한편 리스크를 헤지한다는 말은 자금을 분산하여 손실을 예방한다는 의미이다. 리스크 테이크의 기대가치가 이익의 극대화에 있다면, 리스크 헤지의 요체는 이익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손실을 막는데 있다.”

 

리스크 테이크에 대한 담론은 우리 사회에 많지만 리스크 헤지의 중요성은 누구도 거의 다루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매우 비효율적인 일이다. 최상의 성과가 현상 유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활동을 계산적으로 따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리스크 헤지와 친해질 수 없다. 위험이 크게 따르더라도 그 리스크를 감내하는(take)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선택이 항상 절대적일 수 있을까? 오히려 비자본의 영역, 가령 삶과 관계의 생사가 걸린 문제와 같은 위기 국면의 경우는 리스크 헤지가 필요한 것 아닐까? 위기를 넘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한 것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삶의 시기가 있다는 것이다.

 

리스크 헤지에는 여러 양상이 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을 확실히 하지 않고 결정을 보류하는 방법(계속심의), 복수의 결정을 동시에 내리는 방법(양론병기), 아무도 이익을 가지지 않는 해법(삼방일량손) 등. 이혼을 앞둔 부부가 법정 앞에 설 때, ‘4주 후에 뵙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어찌보면 리스크 헤지의 한 방식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리스크헤지에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이에 대해 우치다 타츠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리스크 헤지는 혼자서는 할 수 없다. A와 B중 선택하시오라고 했을 때 A와 B 둘 다 선택하겠소라고 대답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리스크 헤지를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사람이 필요하다... 리스크 헤지는 집단으로 살아남는다는 목표를 걸고 집단이 합의한 계획에 따라서 행동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은 ‘살아남을 것을 집단의 목표로 내걸고, 상부상조하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뿐이다.”

 

나는 공동체의 구축이라는 리스크 헤지의 전제조건이 리스크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가령 해고가 되더라도, 사업이 망하더라도, 이혼을 하더라도, 보듬아줄 수 있는 관계, 가족, 공동체, 마을이 있다면 그 위기의 국면을 넘어갈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래서 위기의 관계, 위기의 상황에 있어 리스크 국면을 어떻게 해쳐나갈 것인가라는 질문은 결과에 따른 책임을 공유할 수 있는 상부상조의 집단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는 질문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는 관계가 무너질 때, 관계가 나의 삶을 고통스럽게 할 때, 결코 고립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구분해야 하는 것은 고립되어서는 안되지만 의존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상부상조의 집단을 구축한다고, 이 집단에 의존하는 순간, 의존하는 개인도, 개인을 보듬든 집단도 상처받기 마련이다. 의존하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주변 사람들에 의해 상처받으며, 그렇게 관계는 상처받고,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린다. 반면 자립적인 사람은 많은 타인들과 공동체 속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그 네트워크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조형하고 해체하고 재개정해서 격을 높여가는 사람이다. 자립은 자기 평가가 아니라 남이 불러주는 호칭이다. 자립은 집단적인 경험을 통하여 사후에나 획득하는 외부평가로, 위기의 국면에 처한 인간에게 특히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고립과 자립은 일견 비슷해보이지만, 완벽히 다른 개념이며, 고립과 의존 역시 일견 대립된 차원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지만, 알고보면 전혀 관련성이 없는 개념인 것이다.

 

 

Frabz Miklis, Dream Worlds

 

자크라깡은 지성의 움직임을 깜깜한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의 항해사로 비유했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봤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 인간의 지성만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수용할 수 있다. 알 수 없는 정보를 알 수 없는 정보로 유지하고 그 정보를 시간을 두고 이리저리 생각하는 보류 능력이 인간 지성의 두드러진 특징인 것이다. 어찌보면 리스크 헤지란 깜깐한 밤바다를 항해하는 항해사의 마음과 비슷할 것이다. 이 선택의 국면에서는 그 어느때보다 지성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이 지성의 움직임이 자립의 토대가 되고, 독립의 맷집을 키워준다.

단 한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절대 무거워지지 말 것.

“이 사랑스런 인간동물은 잘 생각한다는 것을 기분이 음울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심각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웃음과 즐거움이 있는 곳에서의 사고를 무익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즐거운 지식에 대한 심각한 동물들의 편견이다.” 『니체, 즐거운 지식』

 

그런데 언제까지 선택을 보류할 수는 없다. 위기의 순간,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은 채 즐거운 지식을 무기로 깜깜한 밤바다를 부유할 수는 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다. 어떤 위기의 관계든 마냥 그 상황을 보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언젠가는 결자해지,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그것도 예기치 않게 갑자기. 우리는 이 순간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위기의 국면에서 항해의 운전대를 놓어버린 채, 수많은 타자의 이야기를 듣고, 수많은 책들을 읽고, 수많은 생각을 사유했다. 그 다음 마침내 결정의 순간이 다가왔다. 이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슬프게도, 안타깝게도,

그 선택의 순간, 우리의 몸과 마음은 다시 과거의 기억, 습관, 배치로 돌아갈 가능성이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전환될 가능성보다 훨씬 크다. 인식의 전환만큼 존재의 변환은 쉽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이미 자신의 몸에 오랫동안 축적된 방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어렵고, 어렵다. 무의식이 의식을 지배하는 것처럼, 과거에 축적된 무수한 기억들, 욕망들, 감정들, 상처들의 잔재가 나의 의식적인 공부, 사유, 고민을 압도한다. 그래서 결국 인간은 새로운 내가 아니라, 과거의 나로 살아갈 가능성이 99%다.

 

베르나르는 ‘신’이라는 소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자신들의 개인적인 과거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 과거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그런데 공부에 의해서, 상담에 의해서,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과거를 이해 한다하더라도 여전히 몸과 마음은 과거를 살 가능성이 크다. 왠만한 공부가 두텁게 누적된 과거를 이길 수는 없는 거다.

 

베르나르의 소설에 벼룩의 자기제한이라는 실험이 소개된다. 작은 어항에 가두어진 벼룩들은 유리판을 치워도 마치 어항이 여전히 막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계속 제한된 높이로 튀어 오른다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에 매이면 현재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과거에 받은 심한 충격 때문에 현실에 대한 관점이 왜곡되는 것이다. 벼룩의 자기 제한 실험은 인간의 자신의 습관을 바꾸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시사하고 있다.

 

 

Sandy Skogland, Revenge of the Goldfish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나? 잘 모르겠다. 다만 선택의 순간 어떤 힘과 상상력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오늘의 나를 넉다운시킨 과거와 관계에 대한 이해를 넘어, 다운을 당했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의지, 능력과 앞으로의 삶에 있어 싸우는 방식, 또는 관계맺는 방식을 변환시킬 수 있는 상상력은 필요한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선택의 국면에서 우리가 갈등하고 있는 기억, 상처받은 관계에 대하여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세 가지다. 그것과 함께, 그것과 맞서서, 그것과 무관하게... 그것과 함께하겠다면 상처받은 기억과 상처받은 관계에 대한 치유와 토닥거림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과 맞서겠다면, 그 기억과 그 관계에 맞설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그 이유가 나를 설득하고, 남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한 타당성이 입증된다면, 맞서 이길 수 있도록 강력하게 싸워야 한다. 그것과 무관하게 가겠다면, 어제와 다른 전혀 다른 관계의 장으로 들어서야 하고, 스스로 새로운 관계를 창조해가야 한다.

 

어떤 태도를 선택하든, 이 선택의 국면에서 필요한 것은 지금의 ‘나’에 대한 꼼꼼한 이해, 그리고 이를 넘어서고, 이를 비웃는 ‘나’에 대한 창조적 상상이 아닌가 싶다. 소설가들은 캐릭터를 만들고, 서사를 구축할 때, 작품 속 존재가 충분한 실체를 획득하여 줄거리를 작자 자신이 전혀 생각 못했던 방향으로 끌고 가는 기막힌 순간이 일어나기를 꿈꾼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인물들을 철저하게 묘사해야 한다고 한다. 인물의 특성 하나하나를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광기, 편집증, 슬픔, 기쁨, 고통, 거짓, 직관 등. 그리고 이러한 인물의 역설을 이야기로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상처를 입었기에 약한 사람이 아니라, 그 상처 때문에 내구력이 생겨 더욱 강인한 사람을 창조해야 한다고 한다. 과거의 아픔 때문에 눈물 흘리고, 그것에 짓눌린 사람이 아니라, 과거의 패턴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로 주변을 놀라게 해야 한다고 한다. 왜냐면 사람들이란 원래 그렇게 생겨먹었고, 그렇게 생겨먹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디 소설 캐릭터의 구축만 그런 것이겠나? 우리가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그 일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우리가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일이 어려운 거다. 우리가 어떤 나를 상상하지 않는 것은 그런 내가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그런 나를 상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관계의 위기에 대해 좀 많이 생각하게 된다. 이 위기의 국면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이 글은 이 골치아픈 질문에 대한 내 스스로의 자기 응답이라 보면 될 듯 싶다. 어제의 나를 안다고, 오늘의 내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요즘 나는 내 모습과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보게 된다. 아무리 상담을 받고, 치유 프로그램을 받고, 공부를 해도, 늘 어제의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는 인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이 글을 쓰면서 어제에 대한 이해보다 오늘을 버틸 수 있는 맷집과 새로운 내일을 상상하는 것이 관계의 위기를 넘어서는데 더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제법무아. 모든 존재는 나라고 할만한 자성이 없다는 것.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공하다는 것이다. 이는 존재가 무라는 말이 아니라, 존재는 늘 변화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실체는 없다는 거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은 그래서 새로운 변화, 새로운 상상이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다시 맨 처음 니체의 언어로 돌아간 느낌이다. 제일 첫 페이지에 쓴 니체의 말

 

“자기 삶에 대한 긍정은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극복이다. 오늘의 나를 죽여야 내일의 나가 태어난다. 그래서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나는 너희들에게 내 방식의 죽음을 권한다. 내가 원할 때 찾아오는 자유로운 죽음 말이다.. ” (자유로운 죽음에 대하여)

 

그런데 조금은 다르다. 굳이 표현하자면 죽음이 아니라 상상의 탄생이다.

“자기 삶에 대한 긍정은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기와 관계에 대한 상상이다. 오늘의 나는 죽지 않는다. 그러나 내일의 나는 새롭게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너희들에게 너의 방식대로 상상하는 법을 권한다. 내가 원할 때 변화하는 자유로운 상상 말이다.

 

이게 쉬울까? 이게 가능할까? 적어도 어제를 죽이는 것보다는 쉽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