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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내 맘대로 감상문

코미디언 김미화가 삶을 사는 방식

김미화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폐병으로 고생하는 아버지,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날품팔이를 하는 어머니 밑에서 큰 딸로 태어난 그녀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어머니가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아, 아버지 병 수발은 그녀의 몫이었다. 9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처음 목격한 것은 그녀였다.

“밖에서 놀다 집에 들어와 방문을 여니 공기가 싸늘했어요.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그때의 섬뜩함을 잊지 못해요.”

 

어머니는 보따리 옷 장사, 식당일, 건물 청소원 등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 아버지가 다른 가정을 두었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성을 따라 이름을 바꾼 아픈 가정사도 있었지만 그녀는 명랑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명랑함이다. 그것은 창문 위로 사람들 발이 지나다니는 수유리 천지촌 부근 반지하방에 살고, 아버지 수발을 들어야 했으며, 새벽 시장에 나가 배추 시래기를 모아 엄마가 운영하는 해장국집에 날라주고 등교를 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가난을 버티게 한 힘이었다. 그 명람함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글쎄... 여기서는 그녀의 조상, 그녀의 부모가 그녀에게 선물한 어찌보면 유일한, 그러나 황금같은 보물이라고 볼 수 있다. 명랑함과 우울함을 각인하는 유전자가 따로 있는지는 모르고,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지만, 분명 그 어린 시절 명랑함이 아버지가 없고, 그래서 놀림받고, 가난하고, 그래서 궁핍한 삶을 버틸 수 있는 너무도 큰 재산이었음은 분명하다.

 

시대를 10대 후반으로 돌려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 가보자.

그녀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관광회사 경리사원으로 6개월 정도 일했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 앞에서 이미자 씨 노래 흉내를 내고 1원씩 5원씩 받아 군것질하던 아이는 그 특유의 명랑함으로 코미디언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1983년 KBS 개그콘서트에서 은상을 받으며 코미디언이 된다. 그 과정을 어찌 이 두 문장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러나 김미화라는 한 여인의 삶을 기록하는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바가 너무도 많기 때문에 꿈을 이루기로 결심했고, 그래서 꿈을 이뤘다로 정리하며, 그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막내 시절, 그 당시 방송사 공채 개그맨은 채용 후 6개월 동안 연구생이라는 이름으로 월급이 없었다. 무일푼으로 방송국을 오가던 시절, 그녀는 가난했고, 배고팠다. 그때 그녀의 배고픔을 견디게 한 것은 뻔뻔한 빌붙음이었다. 가난하거나, 부모님이 편찮으시거나, 이런 문제는 그가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상황을 인정하고, 표현하고, 자신보다 부유한 동기, 선배들에게 빌붙을 수밖에 없는 거였다. 그것이 젊기 때문에 가능했던 뻔뻔함이었다고, 그녀는 이야기한다. 임미숙, 이경애 등 동기들이 밥을 먹으러 갈 때, 그는 늘 쫓아갔고, 이들이 보이지 않으면 식당을 뒤져서 이들을 찾아냈다.

 

그런 배고픈 막내 세월을 거쳐 1986년 그는 순악질 여사로 떴다. 일자 눈썹게 “음매 기살어. 음매 기죽어”를 연발하고, “팰 데가 없는 게 아니고 빈틈이 없는 것이제” 호언장담하는 자그마한 체구의 순악질 여사는 당시 시청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그 해 23살의 젊은 나이게 그녀를 결혼했고, 두 딸의 엄마가 되었다.

그녀의 첫 번째 결혼은 불행했다. 결혼 초기부터 상습적인 가정폭력에 시달려왔고, 그 폭력의 정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친정어머니와 여동생까지 남편에게 폭행을 당했고, 새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5개월 간 병원에 입원했을 때, 남편은 무관심했다. 2005년 1월 이혼까지 19년의 결혼 생활은 그에게 큰 상처로 남는다. 어떻게 그 오랜 시간 남편의 폭력을 참아낼 수 있었을까? 아이들 때문에, 언론의 표적이 되고 싶지 않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남자를 사랑해서... 우리는 답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 사랑이 아픈 기억으로 남은 것은 분명한 것 아닐까?

 

결혼 생활은 쉽지 않았지만, 개그맨으로서의 삶은 행복했다. 그녀는 선후배들에게, PD, 작가들에게 인정받는 개그맨이었고, 코미디에 대한 그 스스로의 애정도 상당했다. 그리고 그 애정은 1999년 7월 <개그콘서트>를 탄생시킨다. 개콘은 김미화가 낳았다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저하는 본부장을 설득시키기 위해 기획서를 들고 쫒아다녔다. 당시 <이소라의 프로포즈>가 인기를 얻는 것을 보고 우리도 공개 방송을 통해 연극식으로 관객을 모으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훌쩍 선배 개그맨이 된 그는 후배들과 함께 하는 무대를 만들고 이 후배들을 키우면 전체적으로 코미디가 다양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그것은 선배의 밥그릇 나누기였고, 코미디의 영역을 넓히기 위한 김미화의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개콘의 파장은 김미화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컸다. 그리고 방송은 그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상업적이었다. 개콘이 잘 되니 다른 개그 프로그램이 폐지되었고, 개콘 출연자들에게는 다른 프로그램으로 나가는 것이 봉쇄되었다. 기성 코미디언, 선배들이 설 자리는 없어졌고, 그것은 선배로서 김미화의 영역 역시 좁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렇지만 이미 김미화는 성공한 개그맨이었다. 그리고 스스로가 개그맨으로서 성공했다고 인정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그녀는 오래 전부터 마음에 품어왔던 한 가지를 실천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사회봉사였다. 가난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그녀에게 누군가의 아픔과 가난은 스쳐지나갈 어떤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 번 도와주겠다고 마음 먹은 곳은 끝까지 도와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사회봉사활동은 1999년 참여연대를 만나면서 그 범위가 확장된다. 1999년 우연한 기회와 소개로 참여연대 회원이 된 그는 2000년 2월 총선시민연대 집회에 참석해 ‘정치인이 시민을 무서워하는 세상을 만들자’고 주장했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어 숨진 미선이, 효순이 사건이 일어나자 촛불을 들고 거리고 나섰다. 이른바 김미화의 사회참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가 사회참여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촛불집회에 참여하면서부터다. 현장에 참여해 본 사람들은 안다. 현장의 수많은 아픈 목소리들, 아픈 사람들을 직접적으로 듣게 되고 만나는 순간, 나의 머리와 가슴은 이전의 나의 것이 아니다. 촛불집회를 계기로 돈을 벌면 사회에 뜻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김미화의 오랜 생각은 깊고 넓어진다. 그리고 그가 다녀야 하는 공간도 많아졌다. 2003년 3월 그는 참여연대와 함께 이라크전 파병 동의안 처리를 반대하며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유니세프 특별대표로 아프리카에 자주 간 그녀에게, 전쟁은 반드시 반대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2003년 5월에서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연대’에 참여해 길거리 특강을 통해 호주제 폐지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그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는 그를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로 나아가게 한 중요한 계기였으며, 이명박 정권 출범 후 MBC와 KBS에서 퇴출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2003년 10월 김미화는 MBC 라디오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MC를 맡게 된다. 시사프로그램 진행은 취재 경험이 많은 기자들이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깬 파격적인 MC 선정이었다. 당시 그에게 MC를 제안한 MBC 정찬형 프로듀서는 그녀의 정직하고 서민적인 면모와 사회문제에 대한 높은 관심이 프로그램에 잘 반영된다면 듣기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시사 프로그램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시사 프로그램 진행은 세간의 화제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MBC에게는 좋은 선택이었다.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은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함께 MBC의 간판 프로그램으로 성장해갔다. 그는 ‘아니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대요?라는 질문으로, 자신은 물로 청취자가 이해할 때까지 복잡한 시사문제를 풀어갔고, 이러한 그의 진행방식은 김미화의 편안한 이미지와 맞물리면서 퇴근길 청취자의 마음을 붙잡았다. 실제로 시사 프로그램의 최고 MC인 손석희는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을 가장 부러운 프로그램 중 하나라면서 ‘인터뷰하는 사람들이 우리 프로그램에서 말씀 안 하시던 걸 김미화 씨 프로그램에서 시원하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서 진행하는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개그콘서트’에서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까지 방송에서 승승장구하던 2000년대 초반의 그녀,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고 마냥 행복할 것만 같은 그녀의 삶.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그녀의 결혼은 불행했고, 이 불행의 절정은 바로 이 시기와 맞물린다. 그 당시를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어느 날인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눈을 떴는데 어, 내가 전혀 행복하지 않은데 왜 이러고 있는 거지?라는 깨달음이 퍼뜩 들었어요. 내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한데 여기서 더 잃는다 한들 뭘 잃을까 하는 각성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어요.” 그날로 이혼을 결심한 그는 곧바로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그 소식은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하이에나의 근성을 가진 언론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언론사의 대개의 질문은 이런 거였다.

“18년이나 맞고 살았는데 애는 어떻게 생겼냐?”

“왜 이혼 소장에 성격차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상습 폭행과 배우자 부정이라고 썼느냐?”

“이경실 씨는 야구 방망이로 맞았는데, 김미화 씨는 무엇으로 맞았느냐?”

그래서 공인의 이혼은 개인을 두 번 죽이는 아픈 과정을 감내해야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공인의 이혼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우리 사회와 언론의 폭력적인 시선이 16년을 이혼하지 않고 버텨온 그녀의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개그맨으로서의 인생 종료! 실패자라는 낙인! 수많은 소문과 카더라 통신!

이혼을 기점으로 언론의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기사에 상처를 입은 김미화. 이혼 기사가 사그러질 때쯤 색깔논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동아일보와 독립신문이었다. 동아일보, 독립신문은 김미화를 ‘노빠’, ‘반미주의자’, ‘좌파 방송인’으로 딱지를 붙이고 시사 프로그램 MC로 적격하지 않다는 기사를 쏟아낸다. 이에 대한 그의 대응이라는 것, 힘들고 지치는 소송밖에 없었다. 언론사는 쉽게 내뱉고, 문제가 생기면 언론자유를 외치고, 그로부터 상처입은 개인은 지치고 지리한 소송에 부당함을 호소할 수밖에 없다. 소송이 끝날쯤이면, 하이에나들은 이미 다른 먹잇감을 뜯어 먹고 있거나, 다른 건수로 그 사람을 다시 뜯어 물기 시작한다.

 

한편 이혼 소송으로 힘들고, 색깔 논쟁으로 힘들던 2000년대 중반 그에게 방송 일은 더 들어왔다. KBS <TV 책을 말하다>, MBC <김미화의 U>,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등을 진행하며 진행자로서의 입지를 더욱 굳히게 된다. 여자 연애인이 이혼을 할 경우, 대부분 프로그램으로부터 하차시키는 보통의 경우를 생각해볼 때 이는 매우 이례적인 대우였다. 이는 그의 평상시 품행때문이라고 본다. 10년 넘게 쌓아온 신뢰는 오히려 그녀가 위기 시에 빛을 발했다. KBS, MBC에서 그를 직접적, 간접적으로 경험해 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좋아했다. 그에 대한 제작진의 애정은 대단했고, 믿음은 두터웠다. 오히려 개인적으로 힘든 상황이기 때문에 김미화를 더 밀어주어야 한다는 정서도 있었던 듯 싶다.

 

게다가 첫 번째 결혼 실패 후 제 2의 인생을 함께 설계할 동반자도 만났다. 성균관대 스포츠과학부 윤승호 교수다. 그도 첫 번째 결혼을 실패한 사람으로, 평소 친한 사이였던 홍서범, 조갑경 부부가 오작교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들은 현재 잉꼬부부로 알려졌다.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한 두 사람이 만든 가정은, 그만큼 신중하고, 그만큼 성숙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좀 더 많이 대화하고, 고민하고, 응원하고, 사랑하는 관계는 어찌보면 한 번의 실패를 잘 돌아보고, 잘 숙성시킨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윤승호 교수와 재혼을 한 2007년은 김미화에게 그의 생애에 걸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생은 한 개인을 마냥 행복하게만 놓아두지는 않는 모양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사회적 참여에 적극적인, 그래서 우둔하지 않은, 그래서 민주주의의 성장의 토대가 되는 시민들을 죄다 진보 딱지라 이름 붙이고, 졸렬하고, 치사하고, 쪼잔한 방식으로 숙청에 들어간 이 정권의 칼날은 김미화를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시작은 KBS 블랙리스트 사건이었다. 2010년 4월 전국언론노동조합 KBS 본부(본부노조)는 4월 4일 방송된 <다큐멘터리 3일>에 김미화가 내레이션을 한 것을 두고 다음 날 열린 임원회의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내레이터가 잇달아 출연해 게이트키핑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4월 6일 발표한 성명을 통해 “KBS 임원들이 특정 연예인을 두고 논란을 벌일 만큼 편협한 시각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한심스럽다”며 KBS에 연예인들의 동향이나 성향을 기록해 출연 여부를 가늠하는 블랙리스트라도 존재하느냐“고 물었다. 또 ”지난 2008년 10월 이후 윤도현, 정관용, 유창선 등 정권에 밉도인 인사들이 줄줄이 하찬한 데 이어 지난해엔 김제동 씨만저 잘려 KBS엔 출연자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소문이 횡행하고 있다“며 ”또다시 출연자 숙청을 한다면 더 이상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주장했다.

 

KBS에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소문이 횡행한다는 KBS 노조의 주장이 나온지 3개월 뒤인 2010년 7월 6일 그녀는 자신의 트위터에 글을 남긴다.

“어제 KBS에서 들려온 이야기가 충격적이라 참담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김미화는 KBS 내부에 출연금지 문건이 존재하고 돌고 있기 때문에 출연이 안 된답니다. 제가 많이 실망한 것은 KBS 안에 있는 PD들은 저와 함께 20년 넘게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이고 친구들입니다. 확인되지 않은 편향된 이야기를 듣고 윗사람 한마디에, 제가 보기에는 누군가의 과잉충성이라 생각됩니다면, 저와 20년 넘게 생활을 함께 했던, 저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아는 동료들이 저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KBS에 근무하는 분들이 이 글을 보신다면, 처음 그 말이 언론에 나왔을 때 제가 믿지 않았던, 정말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블랙리스트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지? 밝혀주십시오. 참.. 슬픕니다.”

 

KBS는 이 글에 대해 신속하고 강력하게 대응했다. 그날 오후에 바로 김미화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것이다. 너무도 즉각적이었고 무모할 정도로 강했다. KBS는 그날 오후 김미화의 주장이 사실무근이라는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오후 5시에 영등포 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했다. 그리고 그날 <뉴스9> 24번째 꼭지로 이 소식을 전하고, “목격한 것도 아니고 들었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유포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탄을 금치 않을 수 없다”는 조대현 부사장의 인터뷰까지 보도했다. 이에 대해 민언련은 논평을 통해 “김미화 씨의 주장이 법적 대응할 일인가”라며 정권 눈 밖에 난 인사들이 줄줄이 퇴출되고, 김미화 씨의 경우는 목소리 출연 마저 문제가 됐다면서 KBS가 이런 지경이니 공영방송 내부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말이 떠도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뒤를 이어 다양한 시민단체와 학계의 비판이 이어졌지만, KBS는 소송을 취하하지 않았고, 블랙리스트 파문은 다른 증언자들(진중권, 유창선, 문성근, 정재승)이 KBS 윗선의 지시로 프로그램이 폐지되거나 출연하지 못했다는 증언이 나오면서 일파만파로 커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미화는 경찰에 출두해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2010년 7월 19일 경찰 출두에 앞서 그는 기자회견문을 통해 “KBS 임원 여러분! 저에게 예의를 갖추십시오. 임원 여러분들이 연기자의 밥줄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셔서 연기자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십니까? 만약 제가 그날 트위터에 올렸던 저의 개인적인 푸념이 대한민국에 죄가 된다면 기꺼이 수갑을 차겠습니다. 다만 이번 사건에 있어서 저에 대한 명예훼손 부분, 송사에 소모되는 정신적 금전적 피해와 소모적 논란으로 야기되는 사회적 혼란에 대한 책임은 KBS 임원 여러분께 있다고 봅니다.”고 말했다. 이에 덧붙여 “이번 일이 단순히 제 트위터 글로 우연히 촉발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제가 시사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이후부터 일부 인터넷 신문과 매체는 저를 정치하는 연예인 이른바 폴리테이너라는 멍에를 씌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반문합니다. 제가 정치하는 것 보신 분 있습니까. 코미디언이 좌파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SBS 사장님 확인서를 받고, 인터넷기자협회, 총선시민연대, 녹색연합 여러 곳에 확인서를 받으러 다녀야 했습니다. .. 저를 제발 제발 코미디언으로 살게 해주십시오. 제 꿈은 평생 코미디언으로 사는 것, 그리고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며 사는 것, 이 두 가지입니다. 저는 지금 영등포 경찰서로 갑니다. 고소당하는 것이 처음이라 무척 떨리고 한편으로 서럽습니다.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제 후배 연기자들이 앞으로 이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끝까지 싸우고자 결심했습니다. 기자 여러분. 제 모습을 똑똑히 보시고 전달해주십시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코미디언을 슬프게 하는 사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시 경찰의 조사, KBS의 조서는 조금 꼼꼼히 기록할 필요가 있다. 우선 경찰은 김미화의 통화기록을 조사해 그가 만났다는 KBS 내부자가 누구인지를 밝혀낸다. 이에 김미화는 이 사실을 2010년 10월 26일 경찰서로 출두하기 전 기자회견을 통해 친구인 <연예가중계> 작가한테 들었다는 사실을 먼저 밝혔다. 그는 기자회견문을 통해 “처음 경찰서에 조사 받으러 와, KBS으 소장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소장에는 ‘김미화를 처벌해주고, 김미화에게 처음 발설한 직원을 찾아내 처벌해달라고 되어 있었습니다’라고 말한 뒤 지금 친구 작가는 본인은 ‘그런 말을 안 했다’라고 경찰에서 주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친구를 끝까지 보호해주려 노력했습니다. 이제 KBS는 저와 친구 사이도 갈라놓는 악역을 하고 계십니다. 왜 이러십니까? 고소인 KBS. KBS의 실체는 누구입니까? 암묵적인 KBS 내부 정서와 분위기를 전달했던, 아무런 권한도 없는 해당 작가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해놓고 뒷짐지고 구경만 하시니 편안하십니까”라고 되물었다. 사적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친구들 사이의 이야기를 가지고, 엄중 문책하겠다며 발본색원하겠다는 KBS의 발상은, 박정희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씁쓸하고 쪽팔리다.

 

한편 KBS는 이 사건과 관련해 여러 가지 아픈 이야기들을 반복한다.

“김미화 씨는 남편의 음반 발매 홍보를 위해 KBS 프로그램에 출연 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하자 개인적 울분으로 트우터에 허위 사실을 게재했다.” 친구인 작가가 소속되어 있는 연예가중계에 취재요청을 했으나 거절당하자, 그 복수로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는 이야기인데,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은 건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아울러 KBS는 경영진, 법무팀, 예능국장 등이 여러 경로를 통해 KBS가 고소를 취하하고 사과하면 김미화는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답하라고 강요하면서 16차례나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KBS 홍보주간은 “대승적 차원에서 풀어보기 위해 KBS가 소 취하와 사과를 할 테니 김미화씨도 사과하거나 그게 안 되면 유감이라고 표명해달라고 했을 뿐”이라며 “잘못된 주장을 하면서 왜 자꾸 강공으로 나가려는지 모르겠다.”라고 밝혔다.

 

김미화씨와 KBS의 싸움은 2010년 11월 9일 KBS가 소 취하를 하면서 일단락됐다. 소 취하의 이유에 대해 KBS는 “애초 김미화 씨 개인에 대한 대응 차원이 아니라 블랙리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법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고소를 제기한 것이었으며, 이제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확인된 이상 공영방송으로서 대승적인 차원에서 소를 취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인제대 김창룡 교수는 “KBS 블랙리스트 의혹만 커진 상황에서 갑자기 사회적 공감대 운운하는 것은 적절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며 “법적으로 고소 사안 자체가 되기 어려운 이슈를 형사고발한 것이나 수사 중간에 돌연히 고소를 취하한 것이나 모두 언론기관답지 못하다. 법을 강자의 악세서리로 만든다는 비판은 이런 경우에 해당할 수 있다”고 KBS를 비판했다.

 

KBS 블랙리스트 논란은 KBS의 소 취하로 일단락되었지만, 그것은 엉뚱하게, 아니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MBC가 2011년 4월 바로 그 사건을 비밀로 김미화씨를 퇴출하는 근거가 된다. MBC의 김미화 퇴출은 2009년 초반부터 지속적으로 이야기되었던 바다. 엄기영이 사장으로 있던 2009년 4월 그는 신경민 앵커와 더불어 교체 대상으로 이야기된다. 라디오 PD들의 투쟁과 기자들의 반발로 신경민씨만 교체되고 김미화씨는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2011년 4월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퇴출 기미는 2011년 3월부터 시작되었다. 3월 2일 MBC는 <PD수첩> PD 11명 중 최승호 PD를 비롯해 PD 6명을 타부서로 전출시켰고, 공정방송노조(선임자 노조) 출신인 이용우씨를 라디오 본부장으로 발탁하면서 다시 김미화 퇴출 논의가 쟁점화되었다. 2011년 4월 5일 MBC 김도인 라디오 편성기획부장은 “이번에는 어려울 것 같다”며 김미화씨에게 진행자 교체 입장을 전달했고, 이에 대한 내외부적 논란이 커지자, 그의 교체 사유가 ‘KBS블랙리스트 논란과 관련되어 있다’며 ‘퇴출이 아니라 김미화씨에게 다른 프로로 옮길 생각이 없냐고 의사를 묻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조직에서 편성기획부장은 그 상위 의사 결정 권한자인 라디오 본부장의 의중을 살필 수밖에 없다. 새로운 라디오 본부장이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에서 김미화씨를 빼야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편성기획부장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다지 많지 않다. 아마도 추측이지만, 프로그램 이동 권유는 “퇴출보다는 다른 프로로 옮기게 하는 것이 파장은 적지 않겠느냐”는 실무선에서의 절충안이 아니었을까 싶다.

김미화 교체에 대한 반발은 라디오 PD들은 물론이고 MBC 전체로 퍼져나갔다. 경쟁력, 선호도, 광고 매출액, 기획의 참신성, 이제까지 한 번도 편파성과 불균형으로 사과 정정보도를 한 적이 없고, 대한민국 국회대상까지 받은 과거의 흔적을 돌아보면 이는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MBC 노조는 “PD도 CP도 빼버린, 완벽한 본부장 1인의 마음대로 개편이자 언론독립성과 제작 자율성에 대한 심대한 도전”이라 비판했고, MBC 평PD협희회, 시민단체의 비판이 이어졌다.

 

진행자 교체에 대한 이야기가 본격화되면서 김미화씨의 마음 고생도 심했다. 4월 8일 엘리베이터에서 그는 우연히 김재철 사장을 만난다. 이때 김사장은 김미화씨에게 “라디오가 (김미화 씨 퇴출 문제로) 시끄럽던데 다른 프로로 옮겨보세요”라고 말한다. 라디오가 시끄러우면 본부장을 말려야지 어떻게 김미화씨에게 다른 프로로 가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게 당시 MBC의 수준이었다. 이용우 본부장은 처음 라디오 본부장으로 임명되자 마자 그녀와 악수하면서 ‘본부장은 한 번 하고 가지만 연예인은 영원한 거 아니냐’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했다. 이때의 분위기에 대해 김미화씨는 ‘그의 속마음은 넌 나한테 잘린다. 난 한 번 하고 가지만, 어쨌든 본부장이다.’이런 음흉함이 담겨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MBC 내부의 돌아가는 상황이 답답했고, 자칫 잘못하면 바보처럼 쫓겨날 가능성이 많다고 느꼈다. 2010년 4월 24일 그는 트위터에 “오늘 여러 신문에 제가 진행하고 있는 <세계는> 새 진행자 이름이 거론됐다. 해당 MBC 임원들은 개편이 며칠 안 남았는데도 진행자인 저에게 아무런 설명이 없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답답하다. 최소한 MBC를 위해 8년 동안 진행한 MC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라도 시사프로를 그만두라는 명확한 이유를 알려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글을 남겼다. 그리고 그 다음날 “이젠 제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이라 판단했다. 오늘 부로 MBC 시사진행을 접으려 한다”고 밝혔다. 그가 8년간 지킨 프로그램을 떠날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프로그램 진행자, 제작진에게 자신이 맡은 프로그램은 우주이고 생명이다. 그 생명을 포기한다 했을 때의 심정, 그것도 정치권력에 의해, 나쁜 사람들의 나쁜 욕망에 의해 자신의 공간이 무너진다고 느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이때의 그녀의 심정에 대해, 남편 윤승호씨는 ‘김미화는 지금 울고 있습니다’라는 글로 그녀의 심정을 전했다. 조금 길지만 그 전문을 담아본다.

 

"그 동안 김미화를, 그리고 MBC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을 사랑해 주신 여러분께 처를 대신하여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언론이 정치적 논리에 의해서 휘둘리는 모습을 최근 수년간 봐 오면서 이젠 하루를 더 넘기기 어려운 상황이라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저 보통의 일반 서민 입장에서 뉴스를 진행해 왔던 코미디언, 정치에 뜻이 없음을 누차 밝혀야만 했던 '이상한 처지'의 연기자 김미화. 저희 부부는 작년 'KBS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하여 수사기관, 심지어 변호인단조차도 각각 권력과 금력에 의하여 우리의 상식적, 보편 타당적 가치판단을 져 버리는 상황을 겪었습니다. 또 모든 법적 절차가 종료된 이 시점에서 또 다시 꼬리를 물고 시사진행 자리 '몰아내기'를 감행한 일부 MBC 임원들, 한 일간지에 하차 요구 이유를 밝혔는데. 참 한심한 인간들. 그대들을 그야말로 '명예훼손' 소송할 수 있는 충분한 사유가 있지만 그저 참을 뿐입니다. 시간과 돈이 아까워서죠. 명분 없는 하차요구가 미안하긴 했는지 낮에 음악 틀고 깔깔대는 무슨 쇼를 맡아 달라 요청했고 감사하긴 하지만 정중히 거절했었습니다. 최근의 이 세태는 '정치와 코미디의 함수관계'에 '돌발 변수'까지 등장합니다. 일부 현역 정치인들이 코미디언들의 '밥그릇'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은 최근 여러 차례 확인 된 바 있지만 이젠 일부 방송사 간부들이 그 사이에 끼어 '등신 굿'을 하고 있습니다. 공부하신지 너무 오래 되셨습니다. 언론학 원론 책 1장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고 제 정신을 차리라는 충고로 소송을 대신합니다. 김미화는 울고 있습니다. 웃기는 코미디언을 울게 만드는 권력자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김미화의 눈물은 분하고 슬퍼서 우는 눈물이 아닙니다. 주변의 많은 분들에 대한 깊은 감사의 눈물입니다. MBC PD, 작가 그리고 애청자 여러분들에 대한 사랑의 눈물입니다. 김미화는 이제 양 손의 짐을 내려놓습니다.”

 

김미화가 떠난 <세계는>은 청취율이 큰 폭으로 떨어졌고, 몇 번의 진행자 교체가 있었지만, 청취율은 회복되지 앟고 있다. 그 사이 김미화는 2011년 11월 7일부터 CBS의 <김미화의 여러분>을 맡았고,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꼽사리다>를 진행하고 있다. 김미화는 나중에 자신이 죽으면 묘비에 ‘웃기고 자빠졌네’를 묘비명으로 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코미디언의 묘비명에 딱 맞아떨어지는 이름처럼 그는 코미디언으로 웃기고 있고, 원하지 않게 그를 둘러싼 상황도 우리를 웃기고 있다. 그리고 김미화는 여전히 열심히 웃기고, 말하고, 행동하고, 연대하며 살아간다. 그는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다.

 

그는 여러 측면에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여성, 연예인, 엄마, 이혼경력, 사회참여,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 등 그가 보여주는 스펙트럼은 넓다. 그리고 그 스펙트럼 안에 의도하지 않게 우리 사회의 치부가 여럿 들어있다. 연예인에 대한 언론보도의 문제점, 연예인의 사회 참여에 대한 인식, 이혼 여성으로서 당해야 했던 폭력, 정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공영방송, 새로운 대안 미디어와 민주주의의 작은 실험까지 그 작은 몸으로 이 시대의 많은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김미화란 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씁쓸하면서도 즐거운, 고통스러우면서도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어떤 텍스트가 아닌가 싶다. 개인으로서의 김미화에 사회인으로서의 김미화가 덧씌워지고, 그 위에 우리 사회의 빛과 그림자가 한데 엉키면서, 김미화는 한국 사회와 언론을 전면에 드러낸다.

 

삶은 비극이면서 코미디다. 김미화의 세상에 대한 애정, 웃음에 대한 열망, 그리고 유전자에 각인된 명랑함은 그가 가난해도, 탄압받아도, 꿋꿋이 다시 일어나는 힘이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고통스럽고, 비극이지만, 그 비극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은 꼭 비극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 어찌보면 김미화를 통해 건져내게 되는 하나의 소중한 교훈 아닐까?

 

 

<참고문헌> 최을영 (2012.4) 김미화, 코미디 같은 세상에서 코미디언이 사는 법. 인물과 사상

이글은 최을영씨의 글을 토대로 각색된 글입니다. 씽큐로율 70%. 좋은 글을 읽게 해 주신 최을영씨께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