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20629 슬라보예 지젝
세계적인 석학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를 찾았다
지젝은 분향소 방명록에
“투쟁을 멈추지 마십시오, 당신들이 우리 모두의 ‘희망’입니다”라는문장을 남겼다
배경
옛 유고슬라비아연방에 속했던 슬로베니아 출신. 옛 유고연방은 자본주의 서구와 공산주의 소련 사이의 완충지대. 소련의 완전한 종속국도, 서구에 가까운 나라도 아니었음. 실상은 이 두 지역의 혼합체였다. 티토가 사망하고 소련이 무력화한 뒤 유고연방은 여러 민족단위로 해체됐고, 1990년대에 유고내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을 겪음.
지젝이 철학을 공부한 곳은 슬로베니아 수도의 류블랴나대학. 정치적·지리적 중간지대였던 이곳은 소련의 공식철학보다는 서유럽의 철학에 더 친숙한 곳이었음. 지젝은 이곳에서 독일의 비판철학과 프랑스 현대철학을 연구. 80년대에 지젝은 프랑스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음. 85년 파리8대학에서 그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음. 여기서 익힌 라캉 정신분석학은 이후 그의 이론의 초석 가운데 하나가 됨. 90년 지젝은 독립 슬로베니아의 첫 자유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섬. 네 명의 대통령으로 이루어진 집단지도체제에 자유당 후보로 나갔던 것인데, 5등으로 낙선. 자유당 후보라는 이력은 그의 모순적 삶의 한 측면을 보여줌. 급진좌익에 가까운 인물이 자본주의화를 지지하는 자유당 후보로 나섰던 것임. 지젝은 자신의 이런 선택이 전술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고 말함. 흥미로운 것은 이 전술적 필요에 따른 선택이 그의 저술 작업에서도 그대로 관철된다는 사실. 그의 주장은 때론 모순적으로 보이는 데 그것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또는 주제의 성격에 따라 논리 구성이 바뀌기 때문임.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그의 이론에는 일관성을 부여해주는 이론적 벼리가 있음. 그 벼리가 바로 헤겔과 라캉과 마르크스임. 지젝은 이 세 지적 거인의 주장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 그 묵직한 이론 안에 화장실 낙서 수준의 저급한 농담에서부터 싸구려 탐정소설과 할리우드 상업영화까지 온갖 사례를 끌어들임. 그런 뒤섞기를 통해 매력적이면서 거북살스럽고, 도발적이면서 유희적인 철학적 진술이 흘러나옴.
슬라보예 지젝은 2000년대 이후 한국 학계에서 화려한 광채를 몰고 다니는 스타 지식인. 30여 권에 이르는 그의 저작들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으며, 고급 문학과 대중문화, 철학 담론을 종횡무진 횡단하면서 이를 9·11 테러, 이라크 사태, 세계 금융 위기, 발칸반도의 인종 청소, 미국 대통령 선거 등 긴급한 현실적 사건과 실시간으로 연결시키는 그의 글쓰기는 라캉 해설자로만 규정할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을 발산. 라캉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는 그의 사유를 촉발시키는 매트릭스
몇 가지 개념
주체
지젝은 코기토로 대변되는 자기완결적인 근대의 주체도 아닌, 완전히 해체되어 버려서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체도 아닌 역동적이며 저항적인 주체를 새로 확립하려 하였다. 이 작업에 동원되는 것은 역시 헤겔, 마르크스, 라캉. 지젝은 근대철학이 상정했던 자기완결적이고 충만한 주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 주체란 균열, 틈새, 단절을 내장한, 내적 불화를 겪는 주체일 수 밖에 없음. 그런 주체는 말 그대로 “까다로운 주체”. 하지만 이 주체는 자신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행위를 책임지는 기능을 수행. 이런 입론에 기대어 지젝은 세계 질서에 변화를 가져올 행동의 주체를 불러일으킴.
이안파커의 <지젝>에 나타난 주체의 위치
지젝에게 주체의 근원적 위치는 히스테리적임. 이때의 히스테리는 모든 곳에서 문제를 적발하고 그 문제를 불평하는 사람의 모습임. 지젝 자신이 그런 히스테리적 주체라고 이 책은 말함. 그런 히스테리 주체로서 지젝은 일종의 ‘연기’를 함. 비난하고 거부하는 지젝의 모습은 정작 혁명은 하지 못하고 혁명적 연기만 하는 자의 모습일 뿐이라는 지적임. 그렇게 대신 연기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지젝을 좋아한다”고 이안파커는 덧붙임.
이런 비판에 대해 지젝은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이안 파커의 원고를 읽고서 나는 근저에서의 연대감을 경험했다. 명백한 차이들이 있지만 우리는 동일한 정치적 관심사와 전망을 공유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비판적 언급들은 언제나 적실하다.”
문화연구에 대한 생각
지배적 권력 관계를 폭로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한 권력 관계에 동참하고 있는 자신의 사회적 존재 양태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비판적이고 자기 성찰적인 척하기만 할 뿐임.
경제의 정치화
실로 오늘날 자유 사회의 강령이 된 “관용에 의한” 다문화적 충동은 치명적인 질문을 억압. 그 질문은 “어떻게 우리는 세계화의 현재적 조건에 정치의 순수한 장을 다시 소개할 수 있을까?”임.
정치화는 지젝에게 언제나 “특별한 요구가 불가능한 보편성의 대표자로서 기능하게 시작하는 점임.” 지젝은 계급투쟁을 자본을 통한 사회적인 위치인 국지적이고 객관적인 결정으로 파악하지 않고, 급직전인 주체의 안에 놓인 것으로 파악함. 그래서 프롤레타리아는 “육화된 모순’임. 오직 정치 투쟁에서 개별주의를 통해서만 어떤 보편주의도 등장할 수 있음.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일은 종종 신용을 얻지 못함. 노동자들은 그들의 이익을 바라며 투쟁을 시작하지 전체를 위해 싸우지는 않는다는 말임. 문제는 후기정치학의 시대에 어떻게 정치화된 정치학을 세우느냐임. 지젝은 은유적 응축으로 행동하는 개별적인 요구가 개별적 요구의 초월적인 것과 사회 뼈대의 순수한 재건축을 겨낭할 수 있다고 봄. 지젝은 자크 랑시에르를 따라 사회의 짜여진 구조와 “위치 없는 위치”를 배제한 자리에 진정한 정치적 갈등이 자리한다고 봄. 사회는 쉽게 계급에 의해서 나뉘지 않고 그러므로 계급은 단순한 구조적 특질이 없다는 사실이 투쟁의 신호라는 것임. 반면 계급 대립은 상징화로 완성되고, 더 이상 동시에 불가능하지도 현실화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주장.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해답은 경제의 급속한 재정치화임.
혁명
그는 계급 갈등을 사회의 근본적 적대로 선언하고 전체주의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공산주의의 복권을 공공연하게 주장. 세계 금융 위기라는 자본주의의 트라우마적 상황에서 좌파 해방 정치의 가능성을 열려면 혁명적 테러와 폭력을 무릅써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도 서슴없이 펼침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9·11 테러 이후 세계는 어떻게 달라졌고 마르크스주의는 어떻게 이 세계에 개입할 것인가? 지젝은 테러 이후 달라진 세계를 분석하기 위해 워쇼스키 형제의 히트 영화 <매트릭스>의 대사에서 제목을 따옴. 영화에서 주인공(키아누 리브스)은 컴퓨터가 조정하는 가상의 현실에서 눈을 떠 세계 전쟁 이후 폐허가 된 황량한 세계를 본다. 저항군 지도자 모피어스는 "진짜 현실"에 눈을 뜬 주인공을 위해 아이러니한 인사를 건냄.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에 일어난 사건도 이와 비슷. "뉴욕 시민들은 실재의 사막으로 인도되었다."고 주장.
"9.11테러는 자본주의의 제국 미국이라는 상징적 대타자가 붕괴된 트라우마적 광경이었음. 상상계-상징계-실재계의 세 질서로 구성된 세계에서 실재에서 벌어진 트라우마적 순간, 상징적 동일시가 중단됨. 이는 파국이었음. 이러한 트라우마에 대한 주체의 대응 방식은 두 가지. 하나는 환상의 스크린에서 빠져나와 트라우마를 일으킨 실재 자체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트라우마적 충격에서 벗어하기 위해 편집증적 행동화에 빠지거나 냉소적 관용의 논리를 취하는 것임. 과잉 행동이나 냉소적 관용은 방향은 다르지만 실재를 회피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전유라는 점에서 동일. 미국은 후자를 택함."
정치적 구분선
지젝은 오늘날 정치적 구분선은 더 이상 좌파와 우파 사이가 아니라 온건한 탈정치화와 극우적 재정치화 사이에 그어지게 되었다고 말함. 이른바 민주주의의 역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임. 민주주의는 권력이란 공간을 공백으로 남겨놓는 제도임. 왕이 있던 자리를 비우고 선거를 통해 권력의 대리인으로 그 자리를 채움. 민주주의적 선거는 이른바 법 앞에서의 평등을 통해 모두가 주인이라는 환상을 심어줌. 선거 상황에서는 사회적 위계질서가 일시 중지되고, 사회체는 숫자로 셀 수 있는 순수한 다중들로 환원되며, 사회적 적대 역시 중지됨.
하지만 이는 착각일 뿐임. 그것은 사회의 기본적 적대를 부인하는 물신주의적 착각이다. 지젝에 따르면 민주주의란 민주진창이며, 이 더러운 진창을 메우는 것이 민주주의의 외설적 과잉으로서의 부패임.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는 정치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고 모든 문제를 행정적 절차의 문제로 축소함. 정치란 정확히 이런 축소에 대한 거부이다. 하지만 오늘날 정치적 제스처가 우파 포퓰리즘으로 나타나는 것이 민주주의의 곤경이자 역설임.
지젝에게 이런 곤경의 탈출구로 요청되는 것이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진정으로 급진적인 정치적 행위를 감행하는 것임. 라캉적 의미에서 행위란 주체에게 부여된 상징적 위임을 거부하고 상징적 세계로부터 자신을 철회하는 광기의 행위, 주체 자신의 일시적 사라짐을 포함하는 부정행위임. 이를 통해 주체는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상징 질서가 탄생함. 그것은 혁명이 다른 이름이다. 지젝은 상징 질서로부터 급진적 철회와 분리라는 정신분석적 윤리를 알랭 바디우의 '빼기(subtraction)'의 정치성과 접속시킴. 빼기란 "헤게모니 장으로부터의 빼기일 뿐 아니라 이 장의 진정한 좌표를 드러내면서 그 장 자체에 폭력적으로 영향을 끼지는 빼기임."
<폭력이란 무엇인가>
정의가 실현되는 기적적 행위를 벤야민적 의미의 신적 폭력이라 부르며 그 계보를 작성. 그것은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적 테러에서 1920년대 초반 러시아 적위군의 테러, 십 수 년 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빈민가 군중들의 부유층 슈퍼마켓의 약탈과 방화 사건으로 그리고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월가를 점령하는 시위대들의 몸짓으로 이어짐. .지젝이 이런 신적 폭력의 계보를 쓰는 것은 실정적 법과 불법적 폭력이라는 이분법적 대립에서 벗어나 혁명적 폭력의 정치적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임. 그가 비폭력적 저항이라는 익숙한 도덕적 공리를 비판하며 해방적 폭력의 가능성을 옹호하는 이유.
문제는 신적 폭력이 그야말로 폭력 그 자체로 떨어질 가능성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하는 점임. 지젝은 무기력에서 비롯되는 맹목적 '행위로의 이행(passage to action)'과 혁명적 '행위'(act)를 개념적으로 구분하지만, 현실에서 양자가 그리 선명하게 갈라지는 것은 아닐 것임.
평가
지젝이 '이대로 곤란하다는 절박함'을 넘어 진정 '제대로 생각하는 법'을 안내해주는 지에 대해서는 좀 더 냉정한 평가를 내릴 필요가 있음. 지젝이라는 이 유쾌 발랄한 이론가가 열어주는 사유의 폭발성을 길들이지 않으면서도 그를 거스르는 삐딱함을 유지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뉴욕 월가를 점령하라" 연설문
그들은 우리가 모두 루저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루저들은 저곳 월 스트리트에 있다. 우리가 낸 돈으로 수십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은 것은 그들이 아닌가. 그들은 우리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들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밤낮으로 몇 주 동안 사유재산을 파괴한다 해도, 2008년의 금융 시장 붕괴 당시 파괴된 사유재산의 양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피땀 흘려 이룬 그 사유재산 말이다. 그들은 우리가 꿈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말한다. 정작 백일몽을 꾸는 이들은 지금과 같은 방식이 무한히 계속될 수 있으리라 믿는 그들 자신이다. 우리는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점점 악몽이 되고 있는 꿈에서 깨어나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무 것도 파괴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스템이 그 스스로 파괴되어 가는 것을 지켜 보는 목격자일 뿐이다. 마치 만화에 흔히 나오는 장면과 흡사하다. 고양이가 낭떠러지를 향해 다가간다. 끝을 지나서 디딜 땅이 없어졌는데도, 고양이는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계속 걸음을 걷는다. 아래를 쳐다보며 그런 사실을 깨달았을 때, 고양이는 이미 추락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한 일을 하는 중이다. 우리는 월 스트리트 사람에게 "아래를 쳐다보라구!" 하고 말하는 중이다. 2011년 4월 중순에 중국 정부는 대안 현실이나 시간 여행을 포함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영화, 소설 등을 모두 금지시켰다. 이런 조처는 중국에게는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여전히 대안을 꿈꾸고 있으므로, 이런 꿈꾸기를 금지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곳의 우리에게는 그런 금지 조처가 필요없다. 우리를 지배하는 시스템은 우리가 꿈꿀 여지조차 주지 않고 우리를 옥죄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영화들을 생각해 보라. 세상이 종말로 향하는 스토리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소행성이 지구에 부딪쳐 모든 생물이 멸종하게 된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러나 우리는 자본주의의 종말은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공산주의 시절에 나돌던 구닥다리지만 매력적인 농담이 하나 있다. 한 동독 인민이 시베리아에 파견되어 일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보내는 우편물이 검열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두었다. "암호를 정해 두세나. 만일 내가 파란색 잉크로 편지를 써 보낸다면, 그건 내가 쓴 내용이 사실이라는 뜻일세. 만일 빨간색 잉크로 씌어 있다면, 편지 내용은 거짓일세." 그가 떠난 지 한 달 뒤에, 그의 친구는 시베리아에서 온 첫 편지를 받았다. 파란색으로만 쓰인 편지였다. 편지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굉장하다네. 상점은 질 좋은 음식으로 가득 차 있고, 극장에서는 서방에서 만든 유명한 영화가 상영되지. 아파트는 널찍하고 고급스럽다네. 여기서 구할 수 없는 것이라고는 빨간색 잉크뿐이라네." 바로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자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빨간 잉크가 없다. 우리가 갖지 못한 자유를 드러내 말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갖도록 교육 받는다. 이를테면 테러와의 전쟁에서 강조되는 자유라든가 말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자유의 개념을 왜곡시킨다. 우리에게 필요한 빨간색 잉크를 만들어 내는 것.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은 바로 그것이다. 조심해야 할 점도 있다. 여러분 자신과 사랑에 빠지지 말라. 우리는 여기서 신나는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그러나 축제란 원래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축제가 끝난 다음날이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일상의 삶으로 돌아간 뒤가 문제인 것이다. 그 때 어떤 변화가 생길까? 시간이 지난 뒤 당신은 오늘을 이렇게 기억할지도 모른다. "아, 우리는 젊었었고, 시위는 대단했지." 나는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을 그런 식으로 기억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핵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우리에게 대안을 생각할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닌가. 이런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사는 사회는 여전히 실현 가능한 최선의 사회가 아닌 것이다. 우리 앞에는 긴 여정이 남아 있다. 우리가 맞서야 할 문제들은 진정으로 어려운 것들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회 체계가 자본주의를 대치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따라야 하는가?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다. 문제는 시스템이다. 당신을 부패하게 만드는 것은 시스템이다. 또 적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을 물타기하러 나선 가짜 친구들에 대해서도 주의하라. 이들은 이 시위가 아무런 해가 없는 도덕적 항의에 그치도록 만들기 위해 애쓸 것이다. 마치 카페인 없는 커피, 무알콜 맥주, 무지방 아이스크림처럼. 그들의 노력은 커피에서 카페인을 빼내려는 것이나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모인 이유가 무엇인가. 깡통을 재활용하는 일, 자선 사업에 푼돈을 기부하는 일, 스타벅스에서 카푸치노를 사면서 1%가 제3 세계 기아 아동을 돕는 데 쓰이도록 하는 일 등을 하면서 도덕적 만족감을 느끼기에는 이 세상의 문제가 너무 크다는 점을 인식하기 때문이 아닌가. 일도 아웃소싱되고 포로에 대한 고문도 아웃소싱되는 세상이다. 결혼 알선 업체들은 우리의 사랑마저 아웃소싱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정치 참여 또한 아웃소싱되도록 허용해 왔다. 이제 우리는 이를 되찾고 싶은 것이다. 만일 공산주의란 말이 1990년에 무너진 시스템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당시의 공산주의자들이 오늘날 가장 효율적이고도 무자비한 자본주의자가 되었다는 점을 기억하라. 오늘날 중국의 자본주의는 미국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역동적이지만, 민주주의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당신이 자본주의를 비판할 때, 이를 반민주주의적이라고 매도하는 협박에 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혼은 끝났다. 변화는 실현될 수 있다. 오늘날 실현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 미디어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세상은 기술적인 면과 성적인 면에서 안 되는 일이란 없는 곳이 된 듯하다. 달로 여행할 수 있으며, 유전자 공학 덕분으로 영생에 가깝게 되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동물을 비롯한 그 무엇과도 섹스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나 경제 분야를 보라. 이 분야에서는 거의 모든 일이 불가능한 것처럼 되어 있다. 만일 당신이 부자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약간 올리고 싶다고 해 보자. 그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경쟁력을 잃는다고 주장하면서. 만일 당신이 의료 체제를 갖추기 위해 돈이 좀더 필요하다고 해 보자. 그들은 "전체주의 국가가 되자는 말이냐. 불가능하다"라고 말할 것이다. 곧 영생의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면서도 당장의 의료 혜택을 위해서는 약간의 추가 지출도 허용되지 않는 세상. 이런 세상은 무언가 잘못된 곳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는 '높은 수준'의 생활을 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더 나은' 수준의 생활을 원하는 것이다. 우리를 공산주의자라고 한다면, 그 말이 맞는 단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the commons를 염려한다는 점이다. 자연의 commons, 지적 재산에 의해 사유화된 commons, 유전자 공학의 commons. 우리는 이를 위하여, 그리고 오로지 이것만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 공산주의는 분명히 실패했지만, commons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들은 여기 모인 우리가 미국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들을 진정한 미국인이라고 주장하는 보수 근본주의자들이 깨달아야 할 게 하나 있다. 기독이란 무엇인가? 성령이다. 성령이란 무엇인가? 자유와 책임을 가진 신자들이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연결된 평등한 공동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성령이 임한 곳은 바로 지금 이곳이다. 저 건너편 월 스트리트에는 신성을 모독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이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견인불발의 마음가짐뿐이다. 내가 염려하는 유일한 점은, 우리가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간 뒤, 1년에 한 번씩 만나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그 때 우리 정말 대단했지" 하고 추억에 젖어 회상이나 하는 것이다. 그러지 않겠다고 여러분 자신에게 약속하라.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를 욕망하면서도 실제로 그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욕망하는 것을 실제로 추구하기를 두려워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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