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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내 맘대로 감상문

4월 26일 (월) 나비효과. 사랑이란...

출처 : records.egloos.com/


토요일 밤 10시 30분쯤 회사를 나왔다. 처갓집에 가기로 한 날. 기차를 타기 위해 영등포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는데... 벚꽃 축제때문일까? 버스는 도저히 여의도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겨우 영등포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11시 30분, 기차는 끊기고, 구로로 가는 1호선 지하철만 달랑 남아 있었다. 신도림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사당으로 가서, 거기서 수원행 좌석버스를 타야쥐! 하는 생각에 룰루랄라 구로행 지하철을 탔는데, 신도림에 도착하는 순간 모든 지하철이 끊겼다. 젠장...

여기서부터 신기한 구경, 신도림역을 빠져나가는데, 수백명의 사람들이 신도림역으로 뛰어들어가고,(막차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가진 사람들) 또 수백명의 사람들이 신도림역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역 주변에는 “인천!”, “부평!”을 외치는 택시 아저씨들이 즐비하고... 표정도 제각각 무지 재미있더라.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느낌으로, 잘됐다는 얄미운 표정으로 역을 빠져나가는 연인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된 바에 밤새 놀자며 어디론가 훌쩍 떠나가는 젊은 친구들로부터...

문득 옛 생각이 났다. 한때 나도 신촌에서, 홍대에서, 신도림에서, 사당에서, 막차를 놓치기도 하고, 겨우 타기도 하며, 첫차가 올때까지 방황한 날이, 그냥 적당한 시간에 집에 돌아가는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을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이 한참 전이라는 생각에 아쉽고 쓸쓸한 기분을 느꼈다기보다는, 그 시절을 다시 떠올리고, 그때 그 길바닥에 함께 있었던 친구들을 오랜만에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들뜨고 행복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니 이렇게 단순하게 그 시간의 기분을 정리할 수 없다. 뭔가 웃음이 나면서도 씁쓸하고, 씁쓸하면서도 그립고, 허전하면서도 행복한 기분. 참 묘한 기분이었다. 전체적으로는 기분좋은 묘함...이라고 할까?

그리고 놀랬다. 내 기억의 많은 부분에 대부분 그녀가 있다는 것에... 친구들은 대부분 시간의 흐름 속에 휘리릭 등장했다 사라지는데, 그녀는 끊기지 않고 내 대부분의 공간과 시간 속에 자리잡고 있더라. 참... 생각하면 참 오랜 전이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1996년. 그리고 2010년. 이 기간 속에 얼마나 많은 추억이, 사건이, 아픔이, 기쁨이, 분노가, 아픔이 자리잡고 있겠나... 일상에서는 도저히 생각나지 않던 이런저런 기억들이 낯선 공간 낯선 시간 속에서 불연듯 쏜살같이 떠오르면서 나도 모르게 운명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게 됐다.

출처:parandice.tistory.com/56

그리고 돌아온 집... 그녀는 처갓집에 갔고, 나 홀로 남겨진 새벽... TV를 켜니 막 나비효과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서 태풍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영화는 카오스 이론의 인용으로 시작한다. 문득 어디서부터였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1996년 8월 18일이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날.. 4살때부터 친구인 영상이의 생일이었고, 그놈이 하필 군대에 있었고, 나는 그놈을 면회하러 갔고, 거기서 처음으로 그녀를 만났다. 생각하면 기막히다. 만약 4살 때 우리 엄마, 아빠가 수원 매교동으로 이사를 가지 않았다면, 거기서 영상이란 놈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가 그녀를 만날 일은 없었다. 만약 15살 때 우리 아빠가, 아들만은 전라도에서 키울 수 없다며(전라도에서 태어나서 전라도에서 성장한 아빠가 1970,80년대 당했던 사회적인 차별은 이미 아버지 나이가 되어버린 지금의 내가 생각해도 끔찍한 것이었다.) 광주에서 수원으로 나를 반 강제로 전학시키지 않았다면... 그리고 하필 영상이가 다니는 중학교로 학교 배정을 받지 않았다면... 나는 그놈과 다시 인연을 맺는 일은 없었을 테고, 그렇다면 내가 그녀를 만날 일은 없었다. 만약 1996년 8월 18일, 당시 알바를 하던 기획사(찌라시를 돌리는 일이었다)에서 휴가를 주지 않았다면 내가 그녀를 만날 일 역시 없었다. 이런 식으로 하나 하나 가정을 하다보면, 그녀를 만난 것은 기막힌 인연이고, 게다가 이런저런 이별과 아픔과 상처와 눈물의 시간을 보낸 후, 그녀와 결혼한 것은 도저히 인연, 운명 이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나비효과의 주인공 에반. 과거로 돌아가 기억을 약간 수정할 때마다 그가 되돌아온 현실에서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가 벌어져 있다. 조금씩 과거가 수정될 때마다 각각 다양한 결말로 귀결되는 멀티플 오늘이 생성되는 거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만약”을 생각했다. 만약 시간을 되돌려 내가 영상이를 처음 만난 시절로 돌아간다면, 난 어떻게 할까? 만약 그때 영상이와 친구가 되지 않는다면, 과연 30대의 나는 누구를 사랑하고 있을까? 만약에 그녀가 아닌 또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과 결혼한 후, 지금의 그녀를 만났다면, 난 어떤 선택을 했을까? 과연 결혼한 그녀를 버리고, 지금의 그녀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영화는 주인공 에반의 오늘을 뒤바꿀 여섯개의 가능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과거의 아주 작은 순간만을 수정할 뿐이나, 이 작은 변화가 초래하는 결과는 엄청나다. 마찬가지다. 지금의 세계에서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또다른 어떤 세계에서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너무도 슬픈 일이고 힘든 일이기도 하다.

나비효과라는 영화가 아주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저런 잠재적 현실을 상상하게 해준다. 이게 재미있다. 이 상상은 흥분되면서도 치명적이고, 치명적이면서도 슬프고, 슬프면서도 재미있다. 토요일 저녁, 회사 앞에서 저녁을 먹고 여의도 공원을 꽤 오랜 시간 걸었다. 수많은 연인들을 보면서, 그녀와 막 연애를 시작할 무렵, 여의도 광장에서 함께 자전거를 타고 수다를 떨던 시간이 생각났다. 그땐 여의도 공원이 아니라 광장이었다. 군대 가기 전이니깐 아마도 1997년 정도 되리라... 1997년의 오형일은 알고 있었을까? 2010년의 오형일 옆에 있을 그녀가 1997년 오형일 옆에 있는 그녀라는 것을...

만약 1997년의 내가 그녀를 알지 못하고, 2010년 그녀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면... 그렇다면 삶은, 사랑은 또 어떤 방식으로 흘렀을까? 또다른 가능 세계에서 우리의 깊은 인연을 알지 못한 채, 서로 쭈삣쭈삣하다 운명을 놓쳤을까, 아니면 그 운명을 쥐어잡았을까? 문득 사랑은 그 운명을 쥐어잡느냐 마느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 앞에서 쭈삣쭈삣하지 말자. 지금의 그녀가, 그놈이 바로 내 영원한 운명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