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레온에서 여성영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어제 저녁 괜찮은 영화 한 편을 거기에서 건졌다. 앤젤. 노르웨이의 마그레트 올린 작품이다. 첫 장면은 충격적이다. 허름한 화장실, 피곤에 지친 한 여자의 얼굴이 비친다. 약물 투여의 상처로 부서져버린 그녀의 얼룩진 몸도 보인다. 엉덩이에는 주사바늘이 깊게 꽃혀 있다. 그녀가 마약에 중독되었다는 것, 그녀의 몸과 얼굴이 말해준다.
이 영화는 마약에 중독된 한 여성의 가족과 과거를 조금씩 조금씩 드러낸다. 알콜과 마약과 성매매의 고리에 빠진 여성 레아,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녀의 가족은 어쩌다가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인가? 이 영화는 조금씩 조금씩 시선을 과거로 돌리면서 그 답을 풀어낸다.
레아의 어머니, 레아를 가장 끔찍하고 극단적인 상황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런데 그녀를 탓할 수 없다. 그녀는 평생 자신의 욕망과 사랑에 충실했고, 그것에 책임질줄 아는 여성이었다. 레아의 아버지가 병으로 죽을 때까지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자 레아의 아버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남편이 죽고 그 자리에 들어온 옛 애인이 일상적인 폭력으로 자신의 삶을 파괴해고 자신의 어린 딸을 소외시켜도, 그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폭력 남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아주 쉽게 그렇게 맞으면서도 왜 헤어지지 못하느냐는 목소리를 드러내곤 한다. 난 이 영화를 보면서 매맞는 아내들이 드러내는 “어쩔 수 없어요.”라는 말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됐다. 그놈이 나쁜 남자여도, 폭력 남자여도, 내가 그 남자를 사랑하는데.. 욕망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세상이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폭력적인 과거의 어떤 기억과 아픔과 상처가 고스란히 사랑이라는 이름하에 반복되고, 강화되는 것일뿐이라고, 강조해도... 내가 그렇게 느끼는 이상, 어쩔 수 없는 거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이다. 그리고 그 개별성은... 결코 타인에 의해 이해될 수 없는 어떤 고유값을 지닌다.
레아의 어머니는 사랑을 깊게 욕망하고, 그 욕망에 묵직하게 책임지는 여자다. 그런데... 레아의 관점에서 볼 때 그건 딸인 자신에게 너무도 잔인한 상황이다. 엄마는 레아를 사랑하지만, 그 이상으로 남자를 사랑한다. 레아는 말한다. “나의 어머니는.. 사랑을 돌보고 책임지는 여자이지만, 정작 자신은 돌보지 않는 여자다.” 돌보지 않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돌봄의 부재에 따른 피해는 고스란히 레아에게로 돌아간다. 그녀는 엄마가 양부에게 폭력을 당할 때마다 그것을 바라봐야 했고, 폭력을 주고 받는 엄마와 양부로부터 제대로 된 애정을 받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모성과 사랑은 충돌한다. 자기 파괴적이지만, 사랑에 충실한 엄마와 그것 때문에 제대로 된 모성의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레아의 심리적 충돌... 극단적으로 레아가 엄마로부터의 애정과 관심을 욕망하고, 그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마약 중독의 길에 빠지게 되는 것은 중요한 순간 순간마다 엄마가 자신이 아니라 남자를 택하는 기억이 켜켜이 쌓였기 때문일 게다.
마약 중독에 빠진 레아는 자신의 딸 손야를 입양시킨다. 그것은 자신의 돌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손야가 자신처럼 사랑받지 못하고 돌봄받지 못하게 크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레아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이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매듭지워진다. 손야를 입양시킨 후 레아는 마약중독치료센터에서 마약을 끊게 되고, 조금씩 정상적인 모습으로 회복된다. 그리고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한 계기인 엄마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하게 된다.
사랑하지만... 독립적인...
실질적으로 레아가 과거의 상처, 엄마로부터 받은,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는 거였다. 엄마의 관심과 애정에 대한 집착이 마약에 손을 대게 된 계기였다면, 마약을 끊기 위해서는 엄마로부터 정서적으로 독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다. 영화를 보면서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답답한 기분을 느낀 것은 솔직히 처음인 것 같다. 그만큼 이 영화가 다루는 여성의 사랑, 모성, 가정 폭력, 매춘, 마약의 밀도는 너무도 높았다. 이 영화.. 재미있지도 않고, 스펙타클 하지도 않고, 편집도, 영상도 어설프다. 그러나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여성들이여... 아픈 여성들이여... 그래도 살아가자. 버텨내자. 이겨내자”라는 메시지의 힘이 너무도 강했고, 이 메시지를 끌어내기 위해 끌어낸 여성의 사랑, 모성, 아픔, 폭력, 상처가 너무도 강하게 그려졌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딱 한마디로 이 영화를 정리했다.
“이 영화는 여성의 사랑에 대한 책임감과 모성에 대한 현명함을 그린 영화다.” 어디 여성뿐이겠는가? 사랑하는 자에 대한 책임감과 (그 새끼가 어떤 놈이든...) 자녀에 대한 현명함은 남자, 여자 구분없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 아닐까?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하필 폭력적이고 나쁜 남자라고 한탄하지 마라. 반대로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하필 매춘부에 마약 중독자라고 한탄하지 마라. 배우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놈에게 그녀에게 끌리는 내가 문제다. 문제인줄 알면서도 그 사랑이 어쩔 수 없다면 그 사랑에 제대로 책임지자. 근데 그럴 수 없다면... 그게 두렵다면... 그런 놈에게 그런 녀에게 끌리는 내 삶의 이유, 역사, 상처를 돌아보고, 그것부터 치유하고 인정하고 넘어서자. 세상에 꼭 그런 놈한테, 그런 녀한테만 끌릴 이유는 없는 거니깐..
또 하나 자녀에 대한 현명함이란... 이 영화를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문제많은 아빠라면, 엄마라면... 그 문제가 아이에게 치명적인 거라면... 그 문제를 진지하게 극복하는 솔류선을 모색하거나, 그게 불가능할때는 레아처럼 아이를 포기할 수도, 나보다 괜찮은 사람, 조직, 사회에 양육의 권리를 넘길 수도.. 어쩌면 그게 현명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사회는 불행히도 이런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두루 두루... 사랑을 하고, 아이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남자든, 여자든.. 앤젤... 한번쯤 봐도 괜찮은 영화다. 여성영화제.... 조금은 상투적이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뭔가 새로운 시각으로, 조금은 깊은 느낌으로, 여성의 문제를 건드리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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