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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내 맘대로 감상문

직설법의 한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출처 : sports.khan.co.kr


사극 드라마가 발전한 탓일까... 아니면 내가 이준익이라는 이름에, 원작만화에 기대하는 바가 컸던 탓일까? 한 마디로 지루했다. 사실 어떤 작품을 지루하다고 평하는 것만큼 잔인한 것은 없다. 그만큼 건방진 것도 없다. 지가 만들어봤어? 지가 그만큼 고민해봤어? 그래서 쉽게 지루하다고 평하는 것은 창작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온 후, 내가 느낀 첫 번째 감정이 지루함이었다는 것,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설사 이준익 감독이 아니더라도, 그 이전에 추노와 대조영과 선덕여왕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만화가게에 죽치고 앉아 원작 만화인 <구름을 버서난 달처럼>를 날새며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느낄 감정이었다. 사실 이 감정은 개별적이고 주관적이지만, 어쩌면 가장 개별적인 것이 가장 객관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난 직설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시종일관 직설법으로 관객과 소통한다. 화두는 묵직한데, 그 화두를 풀어내는 방식, 너무 심심하다. 임진왜란을 앞둔 조선 선조 시대. 조정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조직된 대동계를 이끌던 정여립을 역모로 처단한다. 한때 동지였던 이몽학(차승원)과 맹인 검객 황정학(황정민)은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간다. 이몽학은 대동계를 모함한 한신균 일가를 몰살시키면서 반란을 일으키고 맹인 검객 황정학은 “몽학아! 우리가 꾸던 꿈이 이런게 아니었잖아!”라고 울부짖으며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에 맞선다. 이몽학으로부터 아버지를 잃은 한신군의 견자(백성현)는 황정학과 함께 이몽학을 쫓고 이몽학을 사랑하는 기생 백지(한지혜)도 사랑을 버리고 권력을 택한 매정한 정인을 만나려고 이들을 따라 나선다. 이게 영화 <구름을 버서난 달처럼>의 핵심 스토리라인이다. 전쟁의 암운 속에서 빚어지는 권력과 사랑, 서로 다른 꿈의 충돌...

사실 영화든 만화든 소설이든, 이런 앙상하고 추상적인 개념, 그리고 너무도 대중적이고 상투적인, 네이버에서 찾으면 쉽게 나오는 줄거리는 영화의 재미를 가늠하는데 10%의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사실 중요한 것은 상투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감정, 사건, 배경, 갈등 속에 얼마나 묘하게 스며들어가느냐다. 사랑을 사랑이라 이야기하는 순간 사랑이 아닌 거고, 권력에 대한 이야기든, 꿈에 대한 이야기든, 문학이, 영화가 그것을 직설법적으로 들이댈 때, 관객은 헉 하는 거다. 이게 논문이야? 신문 사설이야? 왜 자꾸 강요해?

사실 이준익 감독은 디테일에 강한 감독이다. 황산벌, 라디오스타, 즐거운인생 등등.. 그런데 아마도 뭔가 변신을 꿈꿨고, 그래서 조금은 큰 구조적인 문제, 사회적인 정치적인 담론에 관심을 가진 듯 하며, 그러다보니 그 구조에 쑥 빠져버린 것 같다. 사실 정치, 권력, 지배계급 같은 것은 배경에 남아있고, 그 중앙에 인간이 있어야 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배경이 전면에 서고, 그럼으로써 캐릭터가, 인간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이 영화의 배우들은 불쌍하다. 굳이 순위를 매기자면 가장 불쌍한 배우는 기생 역의 한지혜이고(아무런 역할이 없다), 다음으로 불쌍한 배우들은 이몽학(차승원) 주변에 있는 대동계 조연들이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싸우고, 죽는다. 왜? 왜? 죽는자도 보는자도 모른다.

이 영화의 원작은 양반과 기생 사이에 태어난 견자가 황정학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고 성장하는 성장스토리다. “네 모습은 몇 가지냐? 모두 네 칼로 죽여야 한다.” 구름을 버서난 달은 진정한 자아를 찾게 하는 메타포였다. 그런데 만화를 각색한 이 영화는 자아는 커녕 제대로 캐릭터조차 구축하지 못한다. 또한 지금의 정치판을 은유하는 조정의 모습은 어떤가? 너무도 이분법적이고 너무도 희화적이어서 찔끔한 맛도, 통괘한 맛도 없다.

출처 : cinematicket.co.kr


이준익 감독이 배우를 죽이고, 캐릭터를 거세하고, 삶의 숨결을 거세하면서, 궁극적으로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영화는 직유의 영화입니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았어요. 다만, 그것이 무엇인가는 관객이 캐치하길 바라는 것이지요. 전 지금 우리의 현실을 사극 속에 그대로 그려내고 싶었어요. 사실 5년 전 이 작품을 기획했을 때는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는 존재의 성장통에 초점을 맞췄어요. 그때는 절망적인 시선이 아니었죠. 그런데 감독은 현재성과 호흡하는 존재이기에 지금의 사회상을 녹이게 됐습니다."

“주인공 견자(백성현 분)는 요즘 젊은 세대에 대한 냉혹한 직유입니다. 흔히 '88만원 세대'라고 하는데, 뭔가 다른 말이 없을까 생각하다 '약정세대'라는 말을 생각해봤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휴대폰을 비롯해 뭔가에 약정을 하고 그거대로 끌려가고 있어요. 그러면서 꿈은 없는 세대예요. 꿈을 꾸기가 힘들죠.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표상이 없고, 자본주의의 부상병들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도 교육과 사회에 절망하고 자퇴를 하고 나옵니다. 설사 희망을 품어도 거짓된 희망일 경우가 많아요. 현실은 그렇지 못한데 잘못된 희망을 여기저기서 심어주고 있죠. 그런 상황에서 절망을 직시해야 진정한 희망이 보인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죠. 사회가 그들에게 더이상 허황된 지표를 심어줘서는 안 된다는, 감독으로서의 양심으로 접근했습니다.”

“영화 속에서도, 실제 현실에서도 기존의 가치가 해체됐습니다. 영화에서는 군신간, 사제간, 부자간, 연인간 등 모든 관계가 해체됐는데 그렇게 해체된 자들이 세상의 끝까지 갑니다. 지금 한국사회도 가족관계와 직장에서의 상하관계, 권력집단이 해체돼가고 있는데 해체된 자들이 서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면 엄청난 비극이 온다는 것을 경고하고 싶었어요. 제가 말하는 희망도 기존 가치의 해체 위에 놓여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영화를 보고 '너무 세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싶었고, 그것이 슬플지언정 그 슬픔도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나의 실험이 어떤 반응을 끌어낼지 무척 궁금합니다.”


 

글쎄.. 사유가 거칠면 스토리도 거친 법이다. 나는 감히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나보다 훨씬 치열하며,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감수성을 지닌 1000만 관객의 이준익 감독이 뭔가 이 영화에 대해서만큼은 너무 쉽게 세상을, 젊음을, 사랑을, 희망을 판단했다는 생각이다. 젊은 세대를 직유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 아닐까? 88만원세대도 모잘라 젊은 세대를 약정세대라 표상하는 것. 너무 단순하고 안일하며 폭력적인 것 아닐까? 젊은이들이 품은 희망이 거짓 희망이라고 이야기하는 감독이 주장하는 세상의 희망이란 또 무엇인가? 모든게 이라송하다.

결국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이준익 감독의 다음 영화에 의해 판가름날 것이다. 아마 감독도 알 것이다. 그는 분명 기존에 자신이 만든 영화와 질적으로 다른 이 영화를 통해 본인 스스로는 성장했다 느끼겠지만, 그 성장이 관객에게 전달되는 기회는 요번이 아니라 다음번일 것 같다. 그리고보면 참~~ 변신이라는 것은... 그리고 어떤 콘텐츠를 통해 세상사의 어떤 지점들, 메시지를 담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