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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내 맘대로 감상문

사운드박스와 김예슬! 나를 흥분시킨 두 젊음



오랜만에 나를 흥분시키는 젊은 놈들을 만났다. 사운드박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난 그들에게 매료됐고, 완벽하게 그들의 팬이 되었다. 그들은 길거리 뮤지션이다. 한마디로 유목민이고 무소속주의자들이다. 기획사도 없고, 단지 싸이월드에 카페 하나 달랑 있을 뿐이다. 뮤직뱅크에서 부를 일은 예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것 같지만, 홍대 놀이터에 가면 가끔은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여기까지는 그냥 일반적 소개이고...)

사실... 기타 치고, 베이스 뚱까뚱까 하는 것, 누구나는 아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다. 드럼이야 교회 열심히 다니는 친구들이면 한 번쯤 두들겨본 기억이 있을테고, 노래야 한국인이라면 다 18번 몇 곡씩 있는 법이고, 조금 어려워보이는 게 탭댄스와 비트박스인데, 이것 역시 지들끼리 배틀하는 것 보니깐 딱히 어려운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어디 페인트 가게에서 주운 듯한 박스.. 이거 두들기는 거 못하는 사람 어디있어?

사실 그렇다. 음악이든 뭐든 누구든 할 수 있다. 그냥 할 수 있는게 아니라 누구든 잘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돈이든 시간이든 조금만 투자하면 안될게 뭐있어?  그런데 말이다. 누구나 잘 할 수는 있어도, 아무나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감동을 주는 것은 잘 하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이건 실력의 문제도 돈의 문제도 시간의 문제도 아니라 열정의 문제다. 사운드박스.. 이 젊은 친구 10명은 정.말. 무서우리만치 뜨거운 놈들이다.  사실 오랜만이다. 공연을 보고, 온 몸이 사운드에 감전되어 부들부들 떨리는 이 경험.

사실 모든 것은 조악했고 평범했다. 보컬같이 보이지 않는 보컬 앞에 덩그라니 놓여있는 쓸쓸한 마이크, 그 마이크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아무리 멋진 목소리를 가진 놈이라 하더라도, 고등학교 조회 시간에 들을 수 있는 교장선생님 목소리를 넘어서기 힘든 마이크였다. 이들의 옷차림도.. 참... 음악을 하는 척 하는 놈들이 예술가라고 깝치는 복장이 아니라... 마치 자취생이 잠깐 패밀리마트에 삼각김밥 사러 가는 복장이었다. 그리고 이놈들의 얼굴이란... 무대 뒤에서 조용히 있을 때는 모범생도 이런 모범생이 없다. 도저히 다시 만나도 제대로 기억하기 힘든 평범하고 평범한 얼굴들, 그 자체였던 것이다. 남자고 여자고 예외없다.  

그런데 무대 위에 서는 순간 이들은 사람을 감전시키는 강한 전류를 온 몸에서 뿜어낸다.  정말 그랬다. 이게 길거리 진검승부의 세월이 쌓여 축적된 포스의 힘인지...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미치도록 열정적인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인지... 우정과 팀워크의 힘인지... 알수는없지만 분명한 것은 사운드박스 이 친구들은 관객을 감동시키는 백만볼트 전류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거다. 찌리릭 찍!!!!~  

사운드박스라는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10명의 젊은이들. 이들 한 명 한명의 얼굴은 평범하고 밋밋하다. 근데 이들이 음악에 미쳐 날뛰며 두들기고 춤추고 노래할 때는? 밋밋한 얼굴에 볼륨이 생기고, 근육이 리드미컬하기 생동하기 시작하면서  무서운 예술적 존재들로 변신한다.  내가 하는 일로 돈을 벌겠다, 유명해지겠다 등 세상의 유혹과 무관하게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거리를 떠도는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생동감과 자유로움이 그들의 표정 속에 알알이 박히는 것이다. 무대에서 보여주는 이들의 열정과 자유을 보고, 이 돌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 쉽지 않다.   

사랑하게 되버린 사운드박스.. 이들이 쑥쑥 성장했으면 좋겠다. 나이가 들어도, 우리 사회에 절망할 때도 있겠지만,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을 포기하고 현실 논리를 따라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겠지만, 자신의 해피함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하지 않아도 될 선생같은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럴 수 있을까?  뭐~ 그럴수도 있고 포기할 수도 있을 게다.(사실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큰 법...) 삶의 길목 길목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다만... 현실 논리 때문에, 지겨운 돈의 논리 때문에, 자신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또 하지 않아도 될 교장선생님같은 생각도 잠깐 했다. (하~ 나도 나이가 들긴 들었나보다.) 어쨌든 그래야만 이 세상이 그래도 살만한 것 아니겠나? 

오늘 책을 보다 멋진 말 한마디를 발견했다. 키에르케고르의 문장이다.
"삶은 앞으로 살아야 하지만 뒤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언젠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2010년의 한국을 돌아볼 때, 그래도 살만했던 시간으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미치도록 열정적인 사람들이, 그러니깐 사운드박스같은 놈들이 노골적인 자기 이해와 합리화, 그리고 냉정한 현금 지불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보다 잘 살아야 한다. 사운드박스같은 돌아이들이 속물적이고 나약한 헛똑똑이들에게 KO패 당하는 것은 개인의 불행이자 사회적 불행인 것이다.

조금은 생뚱맞아 보이지만, 사운드박스 공연을 보다 김예슬 선언이 생각났다.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는 당찬 예슬이의 목소리와 내가 좋아하는 것에 미치도록 열정적이게 살아가겠다는 사운드박스의 목소리...뭔가 다른 듯 싶으면서도 비슷하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당차게 이야기하는 목소리, 세상이 뭐라 하든 나는 내 꼴리는대로 살겠다는 열정적인 목소리. 이런 목소리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큰 구멍들을 만드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노골적이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체제 속에 들어가기 위해 아등바등 사는 것보다 아이 씨발 엿같네!라고 외치고 지 느낌대로 살면서... 세상의 슬픈 상식에 큰 구멍 하나씩 펑펑 만들며 사는 인생들이 많아지는 것... 졸라 멋진 일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우연히 이글을 읽는 너도 인생 멋지게 살았으면, 인생 즐겁게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우리가 멋지게, 즐거베 살아야 이 세상도... 쪼금은 멋져지는 게 아니겠나?
 
사운드박스.. 김예슬 .. 그리고 나와 너! 모두 화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