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 스쿨/내 맘대로 감상문

KBS2 <연대기 100인의 전설>의 실패, 그러나...

나는 역사를 좋아한다. 특히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역사다. 최근 융의 자서전을 읽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삶의 궤적을 꿈과 무의식으로 풀어낸다. 기막히게 새롭고 멋지다. 이제껏 나는 이런 역사를 만난 적 없다.

생각해보면 나는 끊임없이 누군가로부터 배우기를 욕망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배우느냐가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배우느냐이다. 배운 내용은 순식간에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지만, 사람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지난 토요일 밤 10시대에 KBS2에서 <연대기 100인의 전설>이라는 파일럿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기획의도는 참 좋았다.


“한 사람 속에는 그를 있게 한 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내가 만난 사람, 혹은 내가 스친 사람들이 모여서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아닐까? 라는 물음으로 이 프로그램을 시작하고자 한다. 오늘의 나를 만든 사람들을 떠올리고, 또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나면서,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는 과정은 곧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본 프로그램은 60분 동안 50-100여명의 지인을 통해 한 사람의 이야기를 완성해 가는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는 스스로 생각지도 못했던 자신의 삶의 궤적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을 위한 공간에 차례차례 나타나는 현상에 놀라움과 기쁨, 감동 그리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시청자 또한 감정선을 따라간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주인공이 만난 사람, 혹은 주인공은 기억하지 못하는 개인사에서 스쳐갔던 사람 100여명을 찾아 주인공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그 만남을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주인공의 삶을 들여 다 볼 수 있는 시간으로 마련한다. 이를 통해 주인공의 몰랐던 역사를 알고, 더불어 시청자들은 자신이 만났던 사람과 살아온 삶을 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한다.”

나는 TV에서건 잡지에서건 누군가의 삶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CBS), 단박인터뷰 (KBS2), 오지혜가 만난 딴따라 (한겨레 21), 김제동의 똑똑똑 (경향신문), 이금희의 파워인터뷰 (KBS2), 황금어장 (MBC) 등 내가 즐겨보던 콘텐츠의 상당부분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에 쏠려있다. 그리고 지금 내 책가방에는 융과 전태일의 자서전이 나란히 담겨있다. 내가 이 프로그램에 기대하는 바가 컸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누군가의 삶을 그 누군가의 오늘을 만들어낸 100명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본다는 것, 각각의 목소리는 개별적이지만, 그 개별적인 것이 모자이크처럼 모여 한 인간의 삶을 설명한다는 발상은 참신하고 자극적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기다리면서 내가 <연대기 100인의 전설>에 기대했던 것은 TV 판 “아임낫데어(토드헤인즈 감독)”였다. <아임 낫 데어>는 전설적 포크락 가수 밥 딜런의 삶과 음악을 일곱명의 캐릭터를 통해 비춰낸다는, 색다른 형식의 전기영화였다. 6명의 배우가 밥 딜런의 7개의 페르소나 -시인, 선지자, 외부인, 가짜, 유명스타, 록커, 회심한 기독인 -를 이야기하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렬한 아이콘의 생동감있는 초상을 완성하고, 그가 살던 시대를 농밀하게 표현한다. 나는 <연대기 100인의 전설>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100명의 목소리가 모여 출연자의 다양한 페르소나가 흘러나오기를 기대했다.

그렇지만 이 프로그램은
기획은 좋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기획의 무게에 눌려, 그리고 첫 초대손님 장혁이라는 스타의 기운에 눌려, 인간에 대해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못했다. ‘100명’이라는 숫자에 너무 집착한 탓일까? 100명이라는 장치가 오히려 스타의 연대기를 깊고 넓게 전달하는데 방해가 된 느낌이다.장혁의 어린시절, 청년시절, 군대시절, 배우시절로 구분하여 각각의 기간에 인연을 맺은 5~6명의 지인들이 소개되었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산만했고, 짧은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해야하다보니, 한 시절, 한 시절이 스케치하는 수준에서 피상적으로 그려질 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경우 야동의 추억, 첫 사랑의 추억이 맛깔스럽지 않게 이야기되고, 배우로서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청년 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가죽잠바, 기계체조 등의 이야기가 밋밋하게 이야기될 뿐이었으며, 군대 시절 동기들과의 만남과 에피소드도 그냥 이야기되고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또한 스케치 수준에서 구성된 연대기 토크는 장혁의 긍정적인 측면만 지나치게 부각되어, 깊이가 부족했고, 이야기를 심도 있게 끌고 갈 현영 등 MC의 역량은 턱도 없이 부족했다.

고생한 연출진의 노력과 상관없이 난 이 프로그램을 끝까지 보는데 애를 먹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의문이 들었다. 왜 TV에서는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야기, 삶이 나오기 힘든 것일까? 생각해보면 TV를 통해 한 인간을 들여다보는 프로그램은 <황금어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실패했다. 그만큼의 이야기를 끄집어낼만한 MC도 부족하고, 그만큼의 이야기를 끄집어낼만한 장치들은 아직 발견되지 못한 상황이다. 또 우리 사회는 아직 자신을 드러내는데 익숙하지 않은 풍토여서, 입에 벤 말을 넘어서는 어떤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대기 100인의 전설>과 같은 한 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콘텐츠가 이런저런 차원에서 많이 실험되고, 많이 제작되는게 필요하다는 판단이다. 나는 결국 내가 만난 누군가로부터 결정된다. 매력적이고 열정적이고 진취적인 사람들, 그냥 묻혀지기에는 너무도 소중한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미디어를 통해 이야기되고, 확장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TV는 심심풀이 오락매체이지만, 동시에 내가 성장하고, 우리 사회가 성장하는 채널이 될 수도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