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수업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 법정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었다. 또 한 명의 어른이 그렇게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이 시대에 내가 어른이라고 감히 부르는 분이 얼마나 남았는지 손꼽아 보게 됐다. 하나, 둘, 셋,,, 채 열 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내가 메마른 건지, 이 시대가 메마른 건지... 딱히 기분 좋은 셈은 아니었다.
출처: 동아일보
그의 한 평생은 일관되게 실존적 자유를 실천하는 삶이었다. 내가 그를 존경하는 것은 그가 무소유를 이야기해서도 아니고, 글을 잘 써서도 아니고, 스님이기 때문도 아니다. 모든 시선으로부터, 모든 권력으로부터,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롭다는 것, 난 그 자유로움이 부러웠고, 일관되게 하루 하루를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 공부하고, 실천하고, 살아가는 그의 삶의 태도는 배워야 할 교본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실존적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론으로 단순한 삶을, 자신의 느낌과 의지에 솔직한 삶을 강조한다. (이거 말처럼 쉽지 않다.) 더 나아가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구속과 생각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일상의 노력을 강조한다.
나는 그의 자유에 대한 치열함이 너무도 부러웠다. 대부분의 범인들은 쉽게 자유를 말하지만, 정말 자유를 꿈꾸고 살아가는 사람들, 모든 시선과 권위로부터 자유로운 ‘강자’로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되나?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오히려 자신의 자유를 누군가에게 전가하면서 티끌만큼의 안도와 안정을 느끼는 사람들, 그게 바로 나고 너고 우리들 대부분이지 않나? 주변에서 자유를 구경하기 힘든 나의 일상 속에서, 아주 가끔씩 저 멀리서 들려오는 그의 자유로운 말과 사유와 행동은 매번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곤 했다.
법정 스님의 입적은 단순히 슬퍼하고 애도할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본다. 그의 육체는 시들었다. 그렇지만 그의 자유로운 영혼, 그리고 자유로운 영혼만이 느낄 수 있고, 표현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문장들, 언어들은, 자유가 권력에, 인간이 권위에 주눅들고 시들시들해지는 요즘 시대에 깊게 기록되고 넓게 퍼져야 하는 유산이라고 본다.
거칠지만 이 블로그에 그의 종족을 조금은 남겨보고자 한다.
출처: 중앙일보
(삶)
▪ 내 소망은 단순하게 사는 일이다. 그리고 평범하게 사는 일이다. 느낌과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살고 싶다.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해서 살아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나 답게 살고 싶다
▪ 삶의 비참함은 죽는다는 사실보다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죽어간다는 사실에 있다. 자신을 삶의 변두리가 아닌 중심에 두면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도 크게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의 지혜와 따뜻한 가슴을 지녀야한다.
▪ 나 자신의 인간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얼마나 높은 사회적 지위나 명예 또는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이다.
▪ 우리는 자신의 꿈과 이상을 저버릴 때 늙는다. 세월은 우리 얼굴에 주름살을 남기지만 우리가 일에 대한 흥미를 잃을 때는 영혼이 주름지게 된다. 그 누구를 물을 것도 없이 탐구하는 노력을 쉬게 되면 인생이 녹슨다
▪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으라. 자신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까지... 묻고 묻고 물어야 한다. 건성으로 묻지 말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귀 속의 귀에 대고 간절하게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다.
▪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다. 홀로 있다는 것은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음을 뜻한다.
▪ 삶은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나를 얽어매고 있는 구속과 생각들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 삶의 예속물이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거듭나 진정한 자유인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 나 자신이 몹시 초라하고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 앞에 섰을 때는 결코 아니다. 나보다 훨씬 적게 가졌어도 그 단순함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 앞에 섰을 때이다. 그때 나 자신이 몹시도 초라하고 가난하게 느껴져 되돌아보게 된다.
(관계)
▪ 남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타인이다.
▪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상상의 날개에 편승한 찬란한 오해다. "나는 당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정체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일 것이다. ...누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된다. 그건 모두가 한 쪽 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에.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실상(實相)은 언외(言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건 흔들리지 않는 법.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기랄, 그건 말짱 오해라니까...
(일상)
▪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전 존재를 기울여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이 다음에는 더욱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다.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시절이 달로 있는 것
▪ 삶은 소유물이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한때일 뿐, 그러나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무소유, 버림, 여백)
▪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버리고 비우지 않고는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공간이나 여백은 그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과 여백이 본질과 실상을 떠받쳐주고 있다.
▪ 가을날 오후 같은 때, 빈 방에 홀로 앉아 새로 바른 창호에 비치는 맑고 포근한 햇살을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아주 넉넉하다. 이런 맑고 투명한 삶의 여백으로 인해 나는 새삼스레 행복해지려고 한다.
▪ 빈마음, 그것을 무심이라고 한다. 빈마음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이다. 무엇인가 채워져 있으면 본 마음이 아니다.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침묵)
▪ 마땅히 입을 벌려 말을 해야 할 경우에도 침묵만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미덕이 아니라 비겁한 회피인 것이다. 그와 같은 침묵은 때로 범죄의 성질을 띈다. 옳고 그름을 가려 보여야 할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침묵은 비겁한 침묵인 것이다. 비겁한 침묵이 우리시대를 얼룩지게 한다. 침묵의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기 위해서이지 비겁한 침묵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어디에도 거리낄 게 없는 사람만이 당당한 말을 할 수 있다. 당당한 말이 흩어진 인간을 결합시키고 밝은 통로를 뚫을 수 있는 것이다. 수도자가 침묵을 익힌 그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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