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디어다]는 저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조언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책을 알릴 필요도 있지만, 그보다 이 못난 책을 여기저기에서 응원해주신 사람들의 이야기를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 제게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첫번째로, 이만교 소설가, 제게는 소설가보다는 선생님이라는 칭호가 더 친숙한 분을 소개해드립니다. 그는 [결혼은 미친짓이다]의 저자입니다. 세상은 그를 그정도로 알고 있지만, 제게 그는 글쓰기의 매력과 삶에 대한 진지함을 가르쳐준 분입니다.
그는 지금 수유너머에서 글쓰기 강좌를 하고 있고, 최근 [글쓰기 공작소]라는 책을 집필했습니다. 책도 추천이고, 강좌는 더 추천입니다. 그와 함께 있으면글을 떠나 삶을 살아가는 어떤 방식들을 고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그가 썼던 글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용산참사에 대한 문장이었습니다. 지금부터는 그의 글입니다.
용산에 대해 제가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된 점은, 도무지 언론에서 보도된 것과는 딴판이라는 점.... 용역과 더불어 경찰과 관공서야말로 가장 불법적이었다는 것, 비인간적인 폭행과 상황이 난무했고, 세입자들이 요구한 보상은, 사실 손해를 감안한 소박한 것이었으며, 그들은 너무나 평범하고 소박하고, 심지어는 시국에 별로 관심조차 없던 시민이었고, 전철연은 보상은커녕 순전히 몸뚱이 하나로 연대하는 힘으로만 유지되는 자생적인 빈민층 조직이라는 점...
사망자들은 대부분 두개골이나 척추가 손상되어 있는 등, 단지 불에 타 죽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맞아서 죽었다는 것 등과 같은 황망한 사실들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황당한 사건들은 7,80년대 철거민 역사에서 보듯, 그리고 대추리 사건에서 보듯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반 시민들에겐 아무 것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알려져도 목전의 생계와 돈에 매여 있으니...
세상은 당분간 변하지 않을 테고, 저들은 더욱 더 변하지 않을 테지요...시민들 역시 언제나 유동적일 테지요... 그런 점에서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나 자신의 문제이고 나 자신의 싸움이겠지요.. 단지 정치적인 변화가 아니라 나의 일상까지 고민하고 변하는.... 그런데 나 자신의 변화, --이것이 정말 만만치 않지요...하지만 우리가 유일하게 꿈꿔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쨌든 우리 모두가 정의를 소리내어 외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까지는 생각지 않습니다..그러나 정의로운 것도 외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면합니다...그러고 보면 우리 가슴 안에서 끓는 분노가, 무기력이, 인간에 대한 애증이, 일 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난 뒤에는, 나의 어떤 꽃으로 피어 있지 않을까요?
이상림 할아버지께
이상림 할아버지.
제 딸아이가
사용하지 않는 여름 난로에 닿아도 놀라던 마음으로,
할아버지가 망루의 시커먼 불길에 속절없이 휩싸였을 순간을 상상해 봅니다.
이상림 할아버지.
제 늙으신 부모님이
걸음이 늦어 사람들에게 핀잔 듣는 것만으로도
꽤나 속상해지던 마음으로,
칠순이 넘은 할아버지가 백주대낮의 길거리에서 젊은 용역의 주먹질에 속수무책으로 얻어맞는 모습을
꼼짝없이 목격하였던, 할아버지의 아드님과 며느리의
참담하고도 분통했을 심정을
상상해 봅니다.
이상림 할아버지.
하다못해
수첩조차 자신이 직접 골라 구입하면
새삼 그 물건에 더 정이 들고 흡족해지던 마음으로,
할아버지께서 막내아들 막내며느리와 함께 타일을 하나하나 바르고,
탁자 테이블 다리의 문양까지 하나하나 새겨 공사를 마친 다음, 레아 호프집을 마침내 개업했을 때,
빚을 내어 개업했음에도 기쁘고 대견하고 자랑스러웠을,
흐뭇했을 그 기분을 상상해 봅니다.
이상림 할아버지.
제가 좋아서
제 스스로 일을 벌이게 되면
누가 깨우지 않아도 아침 일찍 깨어 서두르게 되던 마음으로,
레아 호프집을 개업하고 나서,
언제나 새벽 4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교회에 가서 새벽 기도를 하고, 자전거로 동네 한 바퀴를 돌고, 가게로 나가 청소를 하고, 수산시장 경동시장에 나가 시장을 보시던……
할아버지의 피곤하지만 상쾌했을, 생활 전체에서
자연스럽게 휘파람 소리가 나왔을
즐거움을 떠올려 봅니다.
이상림 할아버지.
우리가
하다못해 남한테 푼돈을 빌렸을 때조차
약속한 날짜에 갚지 못하면 계속 신경이 쓰이는 마음으로,
할아버지께서 큰 빚을 내어 레아 호프집을 운영했을 마음을 상상해 봅니다.
매일 같이 성경책 구절을 베껴 쓰던, 다리가 불편해서 편히 앉아서 써도 좋았을 텐데,
굳이 무릎을 꿇은 단정한 자세로 성경을 빈 노트에
한 구절 한 구절 베껴 써야 마음이 편하던,
할아버지의 간절한 자세를
상상해 봅니다.
이상림 할아버지.
푸른
강물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흘러가는 푸른 강물의 수면 위를 건너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흘러가는 푸른 강물과 흰 구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만 자신이 뒤로 밀려가는 듯하여
깜짝 놀라 깨는 마음으로,
이상림 할아버지.
다만 지하철에서
빈자리를 얌체 같이 차지해도 사람들은
눈을 흘깁니다. 하물며 30년을 장사하며 살아온 용산 땅,
별다른 대안도 대화도 없이,
도리어 때리고 윽박지르고 넘어뜨리고 발길질하고 부수고 추행하면서 나가라니요?
경찰은 그러한 꼴을 열 번 스무 번 지켜보면서도
용역 편만 들다니요?
이상림 할아버지.
이리 저리 빚을 내어
아들과 며느리와 인테리어 공사하던 마음으로,
새벽 4시 30분이면 기상하여 새벽기도를 가던 마음으로,
자전거 타고 동네를 한 바퀴를 돌며 이웃들과 눈인사 나누던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성경책을 베껴 쓰던 마음으로,
다름 아닌 서울의 너무나 선량한 한 시민의 마음으로,
할아버지는 이 세상의 마지막 망루에
올랐지요.
이상림 할아버지.
제 딸아이가
사용하지 않는 여름 난로에만 닿아도 놀라던 마음으로,
할아버지가 망루의 시커먼 불길에 휩싸였을 그 순간을 상상해 봅니다.
경찰이 용역과 함께 불을 지르며 공격해 왔을 때, 기우뚱 기울어지는 망루 안에서
이 세상에 잡을 것이라곤 더는 아무 것도 없어서 허우적거렸을,
너무나 당혹스럽고도 황망했을, 화염 속
마지막 순간을 상상해 봅니다.
이상림 할아버지.
단 10초,
단 3초 동안의 상상조차,
저는 뜨거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보온 그릇에만 닿아도
그만 화들짝 놀라는 것이 사람 피부이고 사람 신경입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가족은 무려 192일째,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의 남편이, 망루의 불길에 휩싸여 죽던 순간에
꼼짝 없이 머물러 있습니다. 시신마저 도둑질 당하고,
손목 잘린 채, 떼쟁이, 폭도, 테러분자로
매도당한 채,
당신은 우리 국민들 가슴 가슴 속을 하염없이 떠돌고,
그리하여 제가 사는 나라는
캄캄한 무덤입니다.
이상림 할아버지.
이 나라가
할아버지의 진실을 감추는 바람에,
저는 그만 제가 사는 이 나라의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위해 안하무인으로 살아온 자가 대통령이 되더니,
평생을 자기 이익만을 위해 안하무인으로 살아가려는,
정치인, 관료, 검찰, 경찰, 조중동 보수언론, 대기업 건설사 등과 같은,
무수한 용역 깡패들을
보았습니다.
이상림 할아버지.
울고,
통곡하고, 호소하고,
기도를 드려도, 이 나라 용역들은 꿈쩍 않습니다.
하다못해 서랍이 안 열려도,
식구 수대로 나서서 직접 서랍을 열어보려 애쓰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192일 동안을 울고, 통곡하고, 호소하고, 흐느끼고,
기도 드려도,
이 나라는 더욱 추악한 행동만
일삼고 있습니다.
이상림 할아버지.
이제 다시
꿈을 꾸는 마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는 마음으로, 먼 길을 떠나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저 자신을 나무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제 스스로 반성해 보는 마음으로, 눈물겨운 마음으로,
가장 멀리까지 걸어가기 위해 부지런히
한 발씩 내딛는 마음으로
이상림 할아버지.
저는
딸아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곧바로 달려가 일으켜야 할지 아니면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줘야 좋을지조차 몰라, 어쩔 줄 모르는, 다소 심약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민감한 마음으로, 할아버지의 고통을
기억하겠습니다.
이상림 할아버지
저는
제가 구입한 물건이,
다른 마트에서 더 높은 가격으로 파는 것을 발견하곤
그만한 차액을 벌었다고 행복해 하는, 작고 소심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음으로, 이 나라 곳곳에서
벌어지는 부당한 일들을
따져보겠습니다.
이상림 할아버지.
저는
시원한 맥주 한 잔과
제 얘기를 재치 있는 농담으로 받아치는 친구들만 있으면,
그것으로 즐겁고 만족하여, 밤새 웃고 떠들며 놀기 좋아하는 가벼운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유쾌한 마음으로, 분노할 줄 알면서도 농담을 잃지 않고
싸우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생활 곳곳에서
쉬지 않고 저항하는 사람들과
만나겠습니다.
이상림 할아버지.
등산을 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아름다운 산등성 풍경에 넋을 놓듯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인상 깊은 아름 슬픈 장면이 두고두고 기억나듯이,
음악을 듣다 보면,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거기에 어울리는 멜로디가 떠올라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더욱 강렬하게 체험되듯이,
나보다 더 열심히 살면서도 나보다 더 욕심이 적은 사람들을 보면
비로소 부끄러워하며 용기를 얻게 되듯이
이상림 할아버지.
제 마음속,
제가 못내 좋아하는,
제가 곧잘 떠올리며 그때마다 용기로 삼는,
보잘 것 없는 저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기운을 회복하게 만들고
옳은 주장을 하게 만드는, 강 물결, 저녁노을, 멜로디, 밑줄 그어둔 문장,
영향 받은 작가나 스승, 외우는 시구나 경전의 구절들을……
속 깊이 되새기는
마음으로
이상림 할아버지.
제가
혹여 어려운 이웃과
부당한 일에 그만 눈을 감을 때,
그것이 자신의 이익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깨어나고 각성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상상하고
마침내 즐거이 살아나고 싶어 하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억압하는, 자신이 자신에게
용역 깡패가 되는 짓이라고
꾸짖어 주세요.
이상림 할아버지.
노래를 끝내는 마음으로,
노래가 끝나고 나서 노래보다 오래 침묵하는 마음으로,
화를 가라앉히되, 할 말은 차분하게 하기 위해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마음으로,
나쁜 사람을 보면 그만큼 더 불쌍해 보이는 마음으로, 한껏 울고 나서
더욱 차분해지는 마음으로, 눈이 마주치면
그냥 웃게 되는
마음으로.
이상림 할아버지 영전 앞에
삼가 저의 눈물을
바칩니다.
2009년 7월 30일
이 만 교 올림
고향 친구 중에 방송국에서 근무하는 삼촌을 둔 친구가 있었다. 처음엔 거짓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친구는 방학 중에 정말로 서울로 올라가 방송국 구경도 하고 연예인도 직접 만나보고 사진과 사인까지 받아서 내려왔다. 어찌나 놀랍고 부럽던지! 『나는 미디어다』를 읽는 내내, 나는 이 책을 읽을 미지의 독자에게 그때 고향 친구에게서 느꼈던 부러움과 질시의 감정을 새삼 느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미디어에서 꿈을 찾는 젊은이들을 위한 안내서다. 마치 시계를 뒤집어 기어와 태엽의 작동 원리까지를 보여주는 시계공처럼, 다변화하는 미디어 제작 과정을 조목조목 짚어낼 뿐 아니라 새로운 변화의 기미까지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다. 자신이 꿈꾸는 분야에서 전문가로 일하면서 그 분야의 매력과 신고(辛苦)를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삼촌이 있다면, 그런 조카보다 든든한 행운아가 어디 있을까. (나는 미디어다 : 이만교 추천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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