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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내 맘대로 감상문

잊고 싶지 않은 [주문을 잊은 음식점]



금년에 방송된 여러 프로그램 중 가장 인상이 남은 프로그램이 뭘까

개인적으로 최고의 프로그램은 [나의 아저씨]였습니다. 언젠가 [나의 아저씨]를 복기할 시간이 있겠지만, 우리 시대의 그늘진 공간의 정서와 이야기를 이토록 따뜻하게 풀어낸 드라마는 앞으로도 당분간 찾아보기 힘들 것 같아요. 픽션 영역에서 최고가 [나의 아저씨]였다면, 논픽션 영역에서 최고의 프로그램은 지난주 종영한 [KBS스페셜 주문을 잊은 음식점 2부작]이었어요. 이 프로그램이 끝날 즈음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거에요


치매에 걸린 어르신들이 영업종료가 된 식당 곳곳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장면에서 정말 예기치 않게 눈물이 흐르더니 도대체 멈추지는 않는 거예요. 언젠가 어떤 독서모임에서 노년에 대한 책을 함께 읽었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마주하게 되는 노년의 삶에 대한 고백을 서로가 하게 되는 거에요. 이 고백에는 쓸쓸함과 두려움,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공존하더라구요. 기억을 잃는 알츠하이머와 움직임을 잃는 파킨슨 등등 주변에서 마주했던 어르신들의 고통을 기억하면서 한숨을 쉬고, 답도 없이 에이 몰라~”하고 헤어졌던 적이 있어요.

 

외면하고 싶지만 미래와 관련해 명백한 팩트 하나, 부모님과 나, 그리고 나의 아내는 언젠가 모두 아프고 죽을 거에요. 그 과정에서 기억을 잃기도 할 것이고, 내 마음대로 내 육체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오기도 할 거에요. 아주 먼 이야기가 아니죠.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다보면 이게 곧 나에게 올 이야기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먼 이야기이든, 가까운 이야기이든, 죽음과 노년은 우리가 응시해야 할 중요한 인생 여정 중 하나라는 거죠.

 

[주문을 잊은 음식점]이 기막히게 멋진 것은 이 화두를 정면으로 유쾌하게 그려낸다는 거예요. 왠지 쓸쓸하고 무력하고 안쓰럽기만 하다고 인식되는 치매라는 인생의 마지막 여정을 그게 뭐 어때서? 우리에겐 함께 그 시간을 동반해줄 공동체가 있고, 함께 웃고 울어줄 친구들이 있어요.”라고 쿨하게, 그런데 따뜻하게 풀어내는 거에요.

 

이 프로그램의 1부 타이틀은 치매는 처음이라", 2부 타이틀은 잘 부탁합니다.”인데요, 어떠세요? 타이틀이 참 따뜻하고 쿨하지 않나요? 어디 제목뿐이겠습니까? 프로그램을 보면 정말 정말 치매”, “노년”, “죽음등 이제껏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화두가 유쾌상쾌하게 그려져요. 많이 웃고, 많이 울고, 많이 느끼게 되는 시간인거죠.

 


안으로 좀 들어가볼까요?

 

프로그램은 주문을 잊은 음식점제안을 받은 송은이씨와 이연복 셰프의 이야기로 시작되요.

치매노인이 주문을 받고, 주문을 잊고, 그래서 손님들이 가끔은 엉뚱한 음식을 받게 되는 그런 음식점을 기획중입니다. 은이씨가 홀 메니저를 맡아주시고, 이셰프님의 주방을 맡아주신다면 이 프로젝트가 힘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너무도 새롭고 의미있는 이야기에 두 사람의 눈빛이 반짝거립니다.

뭔가 욕심이 나고 잘 해보고 싶은데요. ~ 저희가 뭘 준비하면 될까요?”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제작진과 출연자들이 의기투합하여 함께 할 셰프들을 섭외하고 메뉴를 결정하기 시작합니다. 치매 어르신들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의 음식점 규모를 정하고, 장소를 섭외하고, 인테리어 공사에 들어갑니다. 그 사이에 한편에서는 대대적인 알바생 모집이 시작됩니다. 서울시내 치매안심센터를 통해 출연진 지원을 받는 겁니다.


100여명이 지원했고 그 중 5명의 알바생이 정해지는데,

1번타자 최인조 할아버지. 치매 9년차이고 호객왕을 담당하게 됩니다. 왕년에 수학선생이었다네요.

2번타자 이춘봉 할아버지. 치매 7년차이고 알바생 중 맏형입니다. 맏형답게 가장 많은 일을 담당하고 맏형답게 잔소리꾼이기도 하죠.

3번타자 정광호 할머니. 치매 3년차 수줍음을 담당합니다. 서울대 가정학과를 졸업하셨다하는데, 기억은 잃어도 여전히 세심하고 가지런한 가정학도되겠습니다.  

4번타자. 정옥 할머니. 치매 4년차. 손님 응대를 담당합니다. 누구든지 3분이면 친해질 것 같은 옆집 엄마같은 느낌입니다.

5번타자. 김미나 할머니. 치매 5년차. 공식막내이고, 치매와 더불어 가는 삶이 뭔지를 아는 씩씩한 막내되시겠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탁월함은 송은희나 이연복 셰프와 같은 셀럽들이 아니라 이 5명의 치매 어르신들이 프로그램 시작부터 끝까지 주인공이라는 겁니다. 카메라는 바지런하게 음식점 개업을 준비하는 5명 어르신의 집으로, 전단지를 직접 들고 개업 홍보지를 알리는 망원시장으로, 손님과 손님 사이를 바지런히 움직이는 어르신의 미세한 움직임과 이야기를 따라다닙니다. 이 개인적이고 소소한 이야기가 단지 망원동 한 음식점에서 벌어지는 짧은 실험을 넘어 우리 사회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도 있을을 보여주기 위해, 일본, 프랑스를 오가며 너무 과하지 않지만 모두가 한번즈음 곱씹어볼만한 의미론적 토핑도 잊지 않습니다. 이 바지런한 카메라를 따라 100여분을 다니다보면 나도 모르게 치매어르신들과 친해진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치매에 대한 음울하고 씁쓸한 시선을 걷어내게 됩니다. 어디 시청자만 바뀌었을까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어르신들의 삶에도 적지 않은 유쾌한 변화가 시작되고, 송은희씨와 이연복 셰프 역시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됩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1~2부를 보았는데요, 그 중에서도 잊고 싶지 않아서 기록으로 남기는 몇 가진 장면.

 

첫 번째 장면. 홍보지를 돌리는 망원시장에서 만난 한 상인 아주머니와 치매 어르신들과의 대화

저희가 주문을 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뭐 대수에요? 어머님이 얘 이것 먹고 싶다고 해서 가져온 거가 보지. 하하하~”

 

두 번째 장면. 배우 박철민의 눈빛,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님을 생각하며 던진 한마디.

우리 어머니도 이것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세 번째 장면. 첫날 영업을 마친 후 송은이 매니저의 소감

가 너무 오버해서 생각하고 걱정했나 봐요. 삶에서 체득해 오신 것 있잖아요. 그게 자연스럽게 나오더라구요. 여기서 매뉴얼 이야기해드린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어요. 마치 집에서 그냥 요리해왔을 때처럼, 내 가족들을 위해서 했을 때처럼 너무도 모든 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제가 섣불렀구나 그런 생각을 했죠.”

 

넷 번째 장면. 두 번째날 영업에서 할머니와 두 어린 청춘과의 대화.

“[할머니 수줍게] 이 냅킨 제가 수놓은 거에요.”

대박.. 너무 이뻐요. 할머니. 같이 사진 찍어도 돼죠?”

그럼요. 저기 나가면 이연복 쉐프랑 송은이씨랑...”

아니 저분들 말고 할머니랑요?”

나랑? ?”

할머니랑 사진 찍고 싶어요.”

 

다섯 번째 장면. 오랜만에 찾아온 제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

반가운 손님 기억하세요?”

누가 왔었나? 설마 내 제자가 온 건 아니지?”

기억 안나세요?”

00 그놈이 온지 안 온지 잘 모르겠는데, 왔었어?”

네 왔다 갔어요. 굉장히 반가워하셨어요.”

. 그렇구나. 그런데 그걸 또 기억을 못하네.”

기억이 안나서 답답하지 않으세요?”

~ 그런 것 생각하지 않으니깐.”

 

여섯 번째 장면, 후식대신 콩가루를 가져온 정옥의 실수 앞에 전해진 쿠키 속 메시지

죄송합니다. 제가 치매는 처음이라..”

[홀 안에서 웃음소리가 흐르고, 그 홀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한 셰프가 또다른 셰프에게 전하는 목소리]

매일 이런 식당에서 일하면 좋겠다. 안 그러냐?”

끄덕끄덕.”

 

일곱 번째 장면. 영업을 마친 후 어르신과 제작진의 대화

기억하실 수 있겠어요?”

글쎄요. 잊어버릴 거라고 생각 안해요. 잊어버리면 할 수 없지만... 그렇게 하고 살아요.”

길에서 만나면, 저 다시 만나면 알아봐야 해요.”

그래야 하는데 자신을 못하겠네.”

“.... 제가 먼저 인사드릴게요.”

 

어떠세요? 괜히 마음이 따뜻해지고, 부모님도 생각나고, 나이듦, 병듦, 치매가 조금은 가까워지지 않나요? 

무겁고 외면하고 싶은 화두, 그러나 누구든 피하갈 수 없는 이야기를 너무도 유쾌하게 따뜻하게 풀어준 제작진에게 고마운 마음 표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참고로 1TV 목요일~금요일 밤 10시 [KBS 스페셜]을 통해 방송되었는데요. 요즘 스페셜을 보면 정말 다채로운 다큐멘터리들을 보게되는 것 같아요. 예능과 드라마에 밀려 때로는 소리소문 없이 묻히기도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아까운 콘텐츠가 많은 거죠. [주문을 잊은 음식점] 아직 안보신 분들 있으면 강추 강추입니다. 후회하지 않으실거예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이런 시선이, 이런 담론이 우리 공동체에 넓고 깊게 퍼졌으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