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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내 맘대로 감상문

모든게 끝나니깐.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을 봤습니다. 뜨거운 여름날 주말 서울광장에서는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버스는 퍼레이드 때문에 멈추어 섰고, 저는 영화 시간에 맞추기 위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시네큐브로 달려갔습니다. 예술, 일상, 운동. 퀴어문화축제는 이 3개의 원이 만나는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축제라 생각합니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좀 더 일상적이고 좀 더 예술적이며 좀 더 담백한 메시지를 담은 선물같은 다큐멘터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제이알(JR)과 아녜스 바르다입니다. 남성과 여성, 33세와 88, 키고 크고 키가 작고.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트럭을 타고 프랑스 전역을 여행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얼굴과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습니다. 영화는 트럭이 도착한 공장, 농장, 폐허가 된 작은 마을, 항만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사진을 찍고 커다랗게 사진을 출력해 그들의 공간에 붙입니다. 모두 떠나고 텅 빈 주택가에 마지막으로 남은 할머니, 옛 방식으로 염소 농장을 하며 치즈를 생산하는 농부, 외진 마을의 연결고리로 살아온 늙은 집배원, 최소 생계 보장금으로 살지만 인생이라는 광활한 예술 무대를 즐기는 노인, 항만 노동자의 아내들, 이야기는 인과관계가 없지만, 로드무비의 자유로움과 두 예술가의 상상력으로 충만하고 행복하기 그지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길을 떠나고 사진을 찍고 그것을 다큐멘터리로 담는다? 단순히 사진을 찍고 그것을 어딘가에 붙이고 전시하는 행위만 있었다면 이 영화는 딱히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선의 깊이였습니다. 철거를 앞둔 탄광촌에 머물던 할머니에 대한 응원과 격려, 모델이 꿈인 카페 종업원을 꿈의 자리로 초대한 순간, 은퇴를 앞둔 공장 노동자의 불안과 기대를 잡아내던 순간, 최소 생계 보장금으로 살아가는 노인의 주름진 웃음이 화면에 새겨지던 시간, 늙은 집배원을 거대한 주택의 주인공으로 변신시켰던 상상의 공간, 항만 노동자의 아내들을 컨테이너에 새기고 그 심장에 앉게 했던 순간들은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상상할 수 없던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33세와 88. 제이알과 아녜스 바르다의 우정 역시 인상깊은 부분이었습니다. 존경을 요구하지도 않고, 화려한 과거에 찬사를 보내지도 않습니다. 극진히 모시지도 않고, 그걸 바라지도 않습니다. 아이디어는 살아 있고 유머감각은 여전합니다. “안경 좀 벗어꼰대 노릇을 하지도 않고, 그런 말을 했다고 신경쓰지도 않습니다. 이들은 서로의 예술과 상상력을 존중하며 친구처럼 사진을 찍고 전시를 하고 길을 떠나는 겁니다.


이 영화를 보다보면 나이를 든다는 것이, 세대차이라는 게 별게 아니네 그런 생각도 듭니다. 자기만의 세계, 타자에 대한 호기심,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자 하는 열망만 있다면 나이드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만큼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이니깐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루브르 박물관의 작품들 사이에서 휠체어를 탄 바르다를 썬글라스를 낀 JR이 밀어주며 춤추는 장면이었습니다. 루브르, 휠체어, 30대와 80, 춤이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그 자체로 예술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르다가 사람들이 계단에 앉아 알파벳이 적힌 작은 팻말을 들고 있는걸 보는 장면도 떠오릅니다. 그녀의 눈을 통해보는 알파벳들은 초점을 잃은 듯 흐릿하고 둥둥 떠다닙니다. 하지만 그녀는 슬퍼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물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흐릿해도 괜찮다라고 말합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묘지를 찾아갔을 때 JR이 바르다에게 죽음이 무섭지 않냐고 묻던 장면도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바르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두렵지는 않은 것 같아.”

왜요?”

모든 게 끝나니까


마지막 엔딩씬. 둘은 벤치에 앉아 호수를 바라봅니다. 영화는 거기에서 멈춥니다.  바르다는 이 영화 이후에 또 어떤 이야기를 준비할까요? 무엇을 하든 죽음이, 나이듦이 두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호수를 함께 볼 수 있는 친구만 있다면, 함께 길을 떠날 친구만 있다면, 만들어 갈 예술과 세계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겁니다

"결국 모든 게 끝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