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 스쿨/내 맘대로 감상문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의 이야기 <거리의 만찬>


<거리의 만찬>을 봤습니다. 거의 3년 만에 다시 만난 거리의 만찬. 파일럿1회를 보면서 그래 공영방송은 이런 만찬을 준비해야 했던 거야.” 이런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여운이 많이 남았습니다

방송인 박미선, 정의당 이정미 대표, 아산연구소 김지윤 박사. <거리의 만찬>은 여성 3인이 이슈의 현장을 찾아가는 토크쇼입니다. 스튜디오가 아니라 거리로 나가 현장과 사람을 만난다는 게 이 프로그램의 엣지인데, 첫 회로 그들이 찾은 곳은 서울역 KTX 승무원들이 노숙 농성을 하는 파란 천막이었습니다


천막에는 두 명의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날의 노숙 당번들. 13년째 서울역 한귀퉁이 거리에 있는 여승무원들입니다.서울 곳곳을 다니다보면 여기저기에서 이런 천막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이 천막에는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있고, 피켓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한문에서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천막농성을 할 때, 광화문에서 세월호 유가족 분들이 천막 농성을 할 때, 아주 가끔 저는 그곳을 쳐다보고 응원하고 함께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천막은 무심히 스쳐지나가곤 했던 것 같습니다. 서울역을 그렇게 자주 다니면서도 KTX 여승무원의 천막을 보게 된 것은 <거리의 만찬>에서가 거의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 거리의 만찬은 가장 오랜 시간 거리에서 대중들의 무관심 속에 있었던 사람부터 찾아갈 필요가 있는 거였지.” 

첫회로 KTX 여승무원을 잡은 것은 이 프로그램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암시한다는 측면에서 그 포부와 진심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너무도 오랫동안 잊을만 하면 언론에 가끔씩 나왔던 KTX 승무원 이야기. 이것이 비정규직 노동의 문제이면서 여성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양승태 사법부의 사법농단의 문제라는 것을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노동, 여성, 사법농단, 어찌보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세 개의 동심원 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인데 저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무관심했고 특별히 응원했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아직도야?”

KTX 여승무원 하면 누구에게도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마음의 피곤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작은 피곤함 때문에 잘못된 것을 보고만 있던 시간이 <거리의 만찬>을 보는 내내 한없이 미안해졌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강점은 카메라가, 출연진이 3자적 관점, 관찰자 위치에 서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여성 3인의 MC는 여승무원들이 노숙하는 천막에 들어가고, 이들과 함께 웃고 울면서 우리라는 위치에 잠깐이지만 섭니다. 그와 그녀들이 아니라 나와 우리들로 이야기가 풀려가는 순간 KTX의 이야기는 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전도됩니다. 확실히 일인칭은 힘이 강한 겁니다.


그들이 내는 소리를 그들의 인칭으로 이해한다.”


프로그램 중간에 자막으로 스쳐지나가는 문장이었는데, <거리의 만찬>의 강점은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TV가 정치의 문제를, 노동의 문제를, 여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TV가 해결하겠다고 어깨에 힘 잔뜩 주는 순간 바로 거기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다만 TV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고, 공감할 수 있고, 위로할 수 있고, 응원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때에 TV의 장점이 빛을 발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거리의 만찬>은 바로 TV가 어떻게 누군가에게 위로, 격려와 응원을 보낼 수 있는지, 어떻게 빛을 발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프로그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많이 웃고 울었습니다. 삶은 슬픈데 유쾌해. 거리는 유쾌한데 슬퍼

거리의 삶이란 그런 것 아닐까요? 여기에는 피땀눈물이 있고 무엇보다 멋진 우정이 있습니다.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이수명 시인의 문장인데요, 제작진이 이 자막을 쓴 것은 어쩌면 KTX 여승무원을 만나면서 느낀 마음, 시청자들에게 전하고픈 작은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비는 내리는데 우산이 하나입니다. 당신의 왼손을 잡고 걷습니다. 오른쪽 어깨에 비는 내리지 않지만 왼쪽 어깨는 흠뻑 젖었습니다. 이 순간의 감각이 낯설면서도 좋습니다.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노는 것만 같고, 어색해서 육체가 어제의 나를 떠나 나를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손을 잡으면 세상에는 어제와 다른 아름다운 일들이 벌어지는 거죠..

 

<거리의 만찬>이 기대하는 것은 그러니깐 이 척박하고 적막같은 거리에 피어나는 우애의 향연이 아닐까 싶어요.

이번주 금요일 밤 10시 KBS1에서 <거리의 만찬> 2부가 방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