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 부산 경성대학교에서 언론학회 봄철 정기학술대회가 있었는데요, 토론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해운대 바닷바람도 쐴 겸 오랜만에 부산을 갔습니다. 제가 토론을 하게 된 세션의 주제는 <크로스플랫폼 환경에서의 방송콘텐츠 경쟁력 진단과 개선방안>. 듣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죠. 근데 발표는 재미있게 들었어요.
이 날 발표를 들으면서 느낀 점이 좀 있는데, 새로운 것, 있어 보이는 것, 멋져 보이는 것, 트렌드에 경도되는 걸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그날 발표문에 쓴 말을 그대로 옮겨보면,
“크로스플랫폼 환경, 모바일 전략 등을 논할 때 좀 조심해야 하는 게 TV는 올드미디어고 모바일은 뉴미디어다. 올드는 고루하고 뉴는 스마트하다. 그래서 연구도 뉴미디어에서 해야 하고, 콘텐츠도 뉴미디어 중심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요. 전 이 무의식적인 경계짓기가 TV 콘텐츠의 가치 확산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벽이라 생각합니다. 네이버 TV 등에서 짤방으로 소비되는 콘텐츠는 TV에서 소비되는 콘텐츠와 다르다라고 하셨는데 구체적인 프로그램 면면을 보면 90% 이상 다르지 않습니다. TV 플랫폼에서 좋은 콘텐츠면 TV 밖에서도 좋은 겁니다. 같은 맥락에서 콘텐츠가 먼저다, 플랫폼이 먼저다, 이런 논쟁도 여기저기서 자주 보게되는데 이 경계짓기 역시 사실 무의미합니다. 개념적으로 콘텐츠와 플랫폼은 구분되지만, 현실에서는 콘텐츠가 곧 플랫폼입니다. SMR이 플랫폼 내에 동여상 플랫폼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강력한 콘텐츠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콘텐츠가 전부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TV 콘텐츠 가치 확장에 있어 뉴미디어와 올드미디어 구분, TV와 모바일의 구분, 콘텐츠와 플랫폼의 구분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잘못된 콘텐츠 전략을 마련하는 근거가 된다는 겁니다.”
이날 발제문을 보고 놀란 것은 SMR의 재무실적이었는데요, 2014년 6월 설립 이후 불과 2년만에 연 매출 1000억을 달성했더라구요. SMR이 네어버 TV와 같은 인터넷 클립 동영상에 15초 광고를 붙여 15년 300억, 16년 1,000억, 17년 1,000억의 매출을 올린 거에요. 대단하죠? 근데 좀 시야를 넓혀 전체 광고 시장을 보면, 같은 기간 지상파 TV 광고는 5000억 가까이 빠졌습니다. 좀 정확히 말하면 이 5,000억원의 대부분은 MBC와 KBS에서 사라진 거구요, 지상파 광고 시장의 1/4이 사라진 거며, SMR을 통해 벌어들인 광고 수익과 비교할 때 SMR 광고 수익 대비 10배 가까이가 1차 광고 시장에서 사라진거에요.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사실 지상파 광고의 축소, 좀 더 넓게는 TV 광고시장의 축소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죠. 몇 년전 까지만 하더라도 이 감소분을 TV 콘텐츠의 유통망을 시공간적으로 확대하면서 콘텐츠 판매 수익으로 보충할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요, 최근 2년 사이에 급속하게 사라지는 지상파 TV 광고 시장을 바라보다 보면, 아무리 시간과 공간을 확장하더라도 이제는 더 이상 TV 광고 시장의 축소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그런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해요. 우리 공장이 쉽지 않은 상황이란 거죠.
제가 그날 발표했던 내용을 그대로 옮겨보면,
“왜 이렇게 1차 시장이 너무도 가파르게 빠졌을까요? 이건 유료채널의 성장 때문도 아니고, 모바일의 성장 때문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점진적으로 빠지는 거면 환경 변화 탓을 해도 되요. 시장 핑계가 가능한 거죠. 그렇지만 2년 사이에 이렇게 빠진 것은 이건 지상파를 중심으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KBS와 MBC 채널과 프로그램의 문제에요. 콘텐츠 제작과 편성 영역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강력한 신호가 온거죠.”
이 강력한 신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여기서부터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날 발표문에 쓴 말을 그대로 옮겨보면 (좀 깁니다)
“지금은 플랫폼도 좋고, 수익모델 확장도 좋지만, 이에 앞서 TV 콘텐츠의 근력, 1차 시장으로서 TV 채널의 근력을 키워야 한다는 봐요. 저희 KBS가 금년에 실시간과 비실시간, TV와 온라인을 아우르는 새로운 시청지표를 개발했는데요, 이 지수를 통해 보니깐, 콘텐츠의 근력 수준을 판가름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 그러니깐 사람들에게 이야기도 되고, 광고도 팔리고, 디지털 시장에서도 먹힐 수 있는 가이드라인이 본방 2049 시청률 3% 수준. 규모로 하면 65만명 이상의 시청자수 확보더라구요. 3%면 100명 중 3명이 본방을 찾아보는 건데요. 별것 아니네, 이렇게 느낄 수 있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 정도의 성과를 얻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한국 TV 콘텐츠 시장에 많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매주 신규로 나가는 프로그램이 500여개 정도가 되는데요, 이 중에 이 가이드라인을 넘어서는 프로그램은 25개가 안됩니다
(지난주 SBS 9개, JTBC 4개, KBS 5개, MBC 3개 ,TVN 2개).
제가 미디어 영역에서 일하기 시작한지가 한 10년정도 지났는데요. 2000년대 중반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안정적으로 한 채널이 7개 정도의 킬러 콘텐츠만 가지고 있어도 광고 수익에는 문제가 없다는 거였어요. 이 말은 지금이 좀 더 절실한 것 같습니다. 100명 중 3명 정도가 본방을 찾아볼 수 있는 콘텐츠를 매주 7개 이상 방송되게 하라. 실은 이게 가능하면 많은 문제는 풀린다고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7개라는 숫자가 아니라, 지속가능성과 다양성인데요. 적어도 이 채널을 돌리면 볼만한 프로그램 7개 정도는 여러 장르, 소재, 주제, 시간에 걸쳐 있더라, 이게 인식되어야 하는데, 이걸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산술적으로 최소한 30개 정도의 프로젝트가 늘 진행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게 문화콘텐츠의 특징이죠. 성공확률 잘해야 2할 3푼.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죠. 실패도 해야 하고, 훗날의 성공을 위해 간을 봐야 하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어떤 프로젝트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고, 어떤 프로젝트는 새로운 실험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무엇이든 2049시청률 3% 달성을 목표로 한 콘텐츠 단의 프로젝트가 30개 정도 늘 들끓고 있어야 합니다. 본방에서 2049 시청률 3% 이상이면, 그 프로그램은 전체 규모에서 기본적으로 150만명 이상의 시청자를 확보하게 됩니다. 150만명 정도의 규모를 가지게 되는 프로그램이면 이건 재방이든, 유통채널이든, SMR이든 어디서든 먹히게 되어 있습니다.
30개 정도 늘 들끓게 하라. 근데 말이 쉽지 이게 쉽지 않습니다. 당장 제작비 여건도 만만치 않고, 인력도 모자르고 그렇잖아요. 왜 그럴까요? 적어도 지상파 경우에는 콘텐츠단도 그렇고 플랫폼단도 그렇고 관행적으로 진행되는 사업들이 너무 많습니다. 현재 콘텐츠단에서 매주 채널별로 50개~70개 프로그램이 나갑니다. 50~70개의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데, 이중 많은 프로젝트는 관행에 따라 그냥 진행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아침드라마가 지금도 필요할까요? 예를 들어 아침 시간대에 생활정보 ENG물이 여전히 유효하고, 오전시간대 주부 대상의 정보토크쇼가 지금도 필요한 걸까요? 이건 예인데, 과거에도 했기 때문에 지금도 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한 정리가 필요합니다. 과거의 관행에서 벗어나야 거기에 묶인 인력과 돈이 새로운 프로젝트에 집중될 수 있는 거죠.
플랫폼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기술과 시장이 생기면 관행적으로 기존 방송사업자들은 일단 플랫폼을 만듭니다. 마이K다, 눈이다, 푹이다, 티비바다, 너무 많아서 도대체 이 차이가 뭐냐고 하면 이건 스트리밍이구요 이건 OTT구요, 이건 UHD구요, 이건 다채널이구요, 이건 DMB구요, 이건 짤방이구요, 여긴 지상파 채널만 들어 가구요, 이건 KBS만 들어가구요... 냉정하게 이건 TV 콘텐츠 가치 확장이 아니라 가치가 충돌하고, 가치를 축소시키는 나쁜 관행이라 생각합니다.
이 관행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일단 콘텐츠단에서는 이건 모바일용 콘텐츠다, 이건 디지털 콘텐츠다, 이건 TV용 콘텐츠다, 이런 경계를 만드는 게 아니라 10개의 프로젝트 중 9개의 프로젝트는 하나의 목적에 종사해야 한다고 봅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콘텐츠, 이 가이드라인이 제가 볼 때는 2049 시청률 3% 이상입니다. 모든 프로젝트를 이 수치에 목메게 하자는 게 아니라, 내가 제작진이라면, 편성과 마케팅을 담당하고 있다면, 수많은 실패와 도전과 경험을 매개로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목표이자 이상이자 현실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플랫폼에서는 새로운 플랫폼과 서비스를 우후죽순으로 만드는 것보다 TV용 웰메이드 콘텐츠를 묶는 하나의 디지털 플랫폼에 집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전 개인적으로 그 플랫폼이 현재로서는 푹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웰메이드 TV 콘텐츠를 보고 싶으면, 한규 콘텐츠를 보고 싶으면, 유튜브도 아니고, 네이버도 아니고, 푹으로 오세요. 이게 실질적인 플랫폼 전략 아닐까요?“
이게 제 생각인데 우연히라도 이 글을 보는 전문가들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파업이 끝나고 새로 시작하는 국면, 어쩌면 KBS도 MBC도 너무도 중요한 시간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변화를 방해하는 것은 더 이상 정치가 아니라 관행이자 쉽게 변하지 않는 습관입니다. 이 관행과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쩌면 좀 더 공격적인 공동의 목표 의식와 실천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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