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페이스북을 눈팅하다 시트콤 협동조합이라는 흥미로운 공간을 만났습니다. 시트콤을 만드는 창작집단의 느슨한 커뮤니티? 언젠가 한 번 구경해 봐야겠다하고 저장해두었는데 무슨 인연인지 어느 날 대학 동기로부터 간만에 연락이 왔습니다. 영화도 만들고, 시트콤도 만들고, 웹드라마도 만들고, 방송 출연도 하고, 전 방위로 대중문화 장을 넘나드는 놈인데 시트콤 협동조합을 추천하는 겁니다. 고래? 한 번 봐야겠다, 해서 오늘 오전에 그 공간에 넌지시 들어갔는데요
‘본격 노조 말하기 시트콤’이라는 생경한 카피가 걸려 있는 <그 새끼를 죽였어야 하는데>.
아마도 이게 시트콤 협동조합의 첫 번째 프로젝트인 것 같습니다. 굳이 내용에 대해 이야기할 이유는 없겠죠. 페이스북이나 유투브 페이지에 회당 5~7분 가량 5부작으로 게시되어 있으니 이런 저런 일로, 특히 과도한 노동으로 스트레스 받고 계시다면 한 번 보면서 낄낄 거리며 위로를 받아도 될 것 같습니다. 좋아요는 덤으로 누르시면 더 좋구요..
젊은 시절 비정규직으로 일했고, 그것 때문에 해고도 당해봤고, 그리하여 노동조합도 만들어보았던 입장에서 이런 시트콤은 반갑습니다. 병원을 배경으로 한 ‘유니콘의 후예’를 만드는 방송가 사람들, 36시간째 깨어 있는 외주사 계약직 PD, 테이블 앞에 세팅된 박카스와 레드불, 눈뜨고 잠드는 도인의 경지에 이른 보조 작가, 밤새도록 이어지는 회의, 쪽대본을 기다리며 찜질방에서 새우잠을 자는 단역배우들, 촬영하다 병원에 실려 간 감독, 배달되어 들어오는 음식들, 잠 못 이룰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잠 못 드는 사람들이 회의 테이블에 앉아 끊임없이 드라마에 대한 아이디어를 토해 냅니다. 그리고 막내 작가 수지는 기승전 "세상에 필요한건 유니온, 노조!"를 외칩니다.
“그 새끼를 죽였어야 하는데.”
시트콤은 아이디어들이 피곤하게 쏟아지는 공간을 이끌어가는 메인작가의 거침없는 한 마디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참 웃픕니다.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테이블에 앉아있는 그들 자신의 이야기면서 우리 시대의 이야기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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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이 2교대라 연애고 뭐고 할 시간이 없는 거예요. 쉬는 시간은 보장이 안 되고, 워낙 직원이 없으니까…”
“근데 그 병원이 쉬는 날마다 체육대회를 열어서 임원들 앞에서 춤추게 시키고 그런 곳인거야. 짧은 거 억지로 입히고.”
“근데 또 월급은 너무 적네? 야근수당도 안 주고. 일을 해도 해도 돈이 안 모이는거야. 그럼 어떻게 해. 마음의 여유가 없지. 그러니까 연애를 할 수가 없는 거죠.”
“인원보충 안 되는 거 다 위에 사람들 때문인데 오히려 아래 사람들만 죽어라 반목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의 여주인공 서 간호사가 노조를 결성하는 거예요!”
기승전 노조로 끝나는 막내작가 수지의 아이디어에 메인작가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대꾸합니다.
“수지야 내가 평소에도 이야기했지? 원래 드라마가 뭐지? 개인의 결단과 성장을 보여주는 거야. 그런데 어려운 일 생겼다고 (노조로 달려가) 다 같이 손잡고 그래! 그러면 가슴이 뛰겠니? 아니 뭐 돈 없는 사람들 편드는 것 좋지. 레미제라블 이런 것 좋잖아!”
“그래! 노조도 좋아! 써먹자. 어쩌면 노조원 입장에서 (회사 황태자, 오너의 아들과 연애중인) 서 간호사를 질투도 하고 시기도 하고, 뭐 그럴 것 아냐? 군중심리가 다 그런 거니깐. 노조원들이 서간호사 둘러싸고 막 뭐라고 하는 순간에 황태자가 등장하는 거야. 복도를 돌진하면서 비켜요! 내 여자의 상피 세포 하나도 잃을 수 없어! 그 순간에 황태자가 (유니온이 아니라) 유니콘으로 변신.”
이 시트콤이 전하는 메시지는 심플합니다.
“그들이 사는 주옥같은 세상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전설 속 유니콘이 아니라 현실의 유니온. 현실의 노동조합이다.”.
실제로 찾아보니 이 시트콤의 발주처는 민주노총이더라구요. 노조에 대한 우리 사회의 부정적 인식을 시트콤이라는 가벼운 장르로 넘어가보자! 뭐 이런 기획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시트콤은 역설적으로, 아니 솔직하게 이걸 만드는 제작자들조차 실은 노동조합의 서사에 대해 잘 모른다는 커밍아웃으로 마무리됩니다.
김PD: 수지씨 아까 그 전개 좋았어요. 파업하는 것. 스토리 정말 좋았어요
수지작가 : 막상 그 다음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김PD : 그 다음은 적당한 로맨스?
수지작가 : 연애도 해본 사람이 잘 쓰죠..
김PD : 요즘 애인 없으신가보다
수지작가 : 집에도 못 가는데 애인은 무슨요
김PD : 수지씨 우리가 사랑을 하려면요.
수지작가 : 사랑이요?
김PD : 그러니깐 우리도 각자 연애도 하고 살려면 정말 노조가 있어야겠어요.
수지작가 : 그러게요. 유니콘보다 유니온.
김PD : 사랑과 우정의 노동조합.
수지작가 : 오글거리는데 좋다.
전 5회의 이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뭔가 시즌 2를 준비하겠다는 의지로 읽히면서 동시에
“아~ 현실과 한참 떨어져있는 낭만파 노동조합 로맨스의 꿈 속에 있구나.” 그런 아쉬움도 들었습니다.
로맨스와 낭만파 이야기는 스타 작가와 공룡 방송사가 잘 만듭니다.
시트콤 협동조합이 우선 만들어야 하는 것은 노동을 중심으로 한 코뮨,
그 테두리를 근간으로 한 연대(신촌 연대가 아니라),
그 현장에서 마주하게 되는 비장한 척 찌질하고,
정의로운 척 비루하며, 우애로운 척 배신하는 서사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시즌 2 이야기는 저절로 만들어지겠지요.
시즌 2, 기대합니다. 그러기위해선 "일단 노조를 만드는 거에요."
시트콤 협동조합. 물론 만들지 않겠지만...
<사족>
개인적으로 “맞어맞어”하면서 가장 웃프게 본 것은 본편도 본편이지만 번외편 [두근두근 외주용역]
아무래도 전 중년의 아재가 맞나봅니다. 끔. 이게 정말 빵 터지더라구요. 강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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