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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내 맘대로 감상문

공존과 평화의 용기, <KBS스페셜 가야>

 

<KBS 스페셜 가야 2부작>을 봤습니다.

뜬금없이 김훈의 <현의 노래>가 떠올랐습니다. 아주 뜬금없지는 않지요. 이 소설의 배경도 가야니깐요. 악기 하나만을 들고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가로질러 신라에 투항하는 악사, 우륵이 등장하지요여기에서 가야와 신라의 전쟁터는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나라들이 언저리를 마주 댄 강가나 들판에서 쇠에 날을 세운 병장기들이 날마다 부딪쳤다. 말 탄 적을 말 위에서 찌를 때는 창이 나아갔고, 말 탄 적을 말 아래서 끌어내릴 때는 화극(畵戟)이 나아갔다. 창이 들어올 때 방패가 나아갔고 방패 위로 철퇴가 날아들었고 철퇴를 든 자의 뒤통수로 쇠도끼가 덤벼들었고 쇠도끼를 든 자의 등에 화살이 박혔다. 쇳조각으로 엮은 갑옷이 화살을 막았는데, 화살촉은 날마다 단단해졌고 갑옷은 날마다 두꺼워졌다.”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철의 차가운 촉감이 느껴지지 않나요. 그러니깐 가야의 역사에서 철은 시작이자 끝이기도 합니다. <KBS스페셜 가야> 이야기도 그리하여 철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전히 철의 시대다. 고대로부터 철은 권력을 가진 자에게 개척과 정복을 허락했다. 강하지만 유연한 철, 윤택과 파괴를 선물한다.... 한반도에도 이 힘이 있다. 가야.”

 

 프로그램은 그 시대 가장 강력한 테크, 철기 기술을 배경으로 바다를 넘어 더 넓은 세상과 교류하는 가야의 행보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SF 영화의 문법을 차용한 석탈해와 김수로의 대결, 뮤지컬 형식으로 표현 한 아유타국의 허왕후와 김수로의 만남 등이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는데요, 그 중에서도 제게 인상적인 것은 김수로와 신하들의 대화였습니다

 

신하가 묻습니다.

아니 그냥 철은 철일 뿐인데, 왜 그토록 철정(덩이쇠)을 만드는데 엄격하십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차이에 왜 이리 민감하시고, 도대체 무엇을 위한 엄격함입니까?”

그러자 김수로가 답합니다.

이것은 아직 발길이 가있지 않은 곳에 먼저 가있을 것이고 우리가 만나지 못한 사람을 먼저 만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어떻게 만나고 싶은지 그 모든 이야기를 이 철정에 담을 수 있습니다. 가야의 철정에는 가야의 모든 것을 담아야 합니다.”

 

이 철저함 때문일까요철정을 기반으로 주변국에 인정받기 시작하고 그렇게 가야는 교역의 중심이 된다고 합니다. 이런 대화도 있습니다.

 

신하들이 묻습니다.

아니 우리는 가장 강력한 철이 있는데 왜 땅으로 나아가지 않습니까? 왜 정복하지 않는 것입니까? 왜 끄트머리 구석에 머무는 것입니까?”

그러자 김수로가 답합니다.

이곳은 땅의 끝이 아니라 바다가 시작되는 곳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넓혀, 피가 아니라 약속으로 얻어내는 땅, 발이 아니라 꿈을 디디는 땅이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김수로는 평화주의자였던 것이지요(정말?인지는 상상의 영역). 신하들이 이제는 우리가 가진 철을 무기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렇게도 말하네요.

모두 무기가 된다면, 그렇게 땅을 넓힌다면 거기서 무엇을 하며 살게 됩니까? 경계를 지키기 위해 끝없이 피를 흘려야 할 겁니다. 피가 아니라 땀으로 길을 내야 합니다. 땅의 길 하나를 잃었다면 바다의 길 두 개를 내야 합니다.”

 

김수로는 피보다 땀을, 땅보다 바다를 사랑했던 남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그의 신부 역시 바다건너 인도 어디로 알려진 아유타국에서 옵니다. 연상의 여인 허황옥(황금구슬이라는 뜻)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사실 이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 허황옥이 가야로 오는 길을 배경으로 한 뮤지컬에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색감도 음악도 조명도 황금구슬입니다. 한번 보시고 싶은 분은 아래 동영상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뮤지컬을 보고 싶다면... 클릭]

사랑과 꿈이 있는 곳. 하늘이 영원을 준 곳, 하늘의 소리가 들리는 곳. 내 사랑이 있는 그곳을 알고 싶어요. 내 사랑, 나는 사랑을 찾아 떠나요. 가야로 가는 꿈을 꾸어요. 거친 파도를 헤치고, 더 넓은 세상 더 새로운 세상을 위해, 수로왕이 있는 곳을 향해.“

 

허황옥이 바다건너 김해 가야땅에 왔을 때 신하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이때의 궁전 대화를 엿보면 이렇습니다.

 

신하

불가합니다.어디에서 왔는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여인을 왕비로 들일 수 없습니다. 위험합니다. 바다를 닫아야 합니다.”

김수로

그동안 귀한 것들이 저 바다를 통해 이 땅으로 왔습니다. 바다를 건너온 그것들이 이 땅을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도 그러합니다. 저 낯선 여인이 내민 손을 잡을 겁니다.”

신하

두렵지 않으십니까?”

김수로 

 “낯선 것은 언제나 위험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낯선 얼굴로 찾아와 우리의 용기를 시험합니다. 나는 낯선 것을 향해 나아갈 겁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낯설지 않을 때까지.”

 

이런 이야기를 통해 이 프로그램이 말하고 싶은 것은 가야가 전하는, 김수로가 전하는 공존에 대한 용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김수로가 죽음을 앞두었을 때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나는 때때로 불안했고 어리둥절했지만 한 발 앞서 움직였습니다. 저는 곧 죽습니다. 그렇다고 저희가 간 길이 실패한 걸까요? 우리의 꿈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 꿈의 완성은 새로운 시대의 몫이겠죠. 바다는 여전히 저기에 있고 땅은 여전히 유한하며, 어떤 힘은 피를 부르고 어떤 힘은 상생을 이루어내죠. 나도 곧 이 땅 어딘가에 말없이 묻힐 테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함께 꾸는 꿈조차 무덤 속에 묻히지 않을 겁니다. 힘과 평화의 균형을 찾는 사람은 이 땅에 계속 태어날 테니깐요.”

 

고대사로 갈수록 기록이 많이 남지 않아 ,많은 여백은 작가의 상상에 기대게 됩니다. <KBS 스페셜 가야>는 특히 김수로와 신하의 대화에서 조금은 은은하게 조금은 노골적으로 가야를 통해 지금 우리 시대에 전하고픈 메시지를 약간은 오글거릴 정도의 직설법으로 담아내는데요. 그것은 공존, 평화, 도전, 낯선 것에 대한 환대, 진보 이런 것 같습니다. 점점 더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개척할 것보다 지켜야 할 것이, 평화보다 분노가, 환대보다 미움이, 평화보다 적대의 마음이 큰 어떤 공간, 그 공간에 살아가는 누군가에는 새겨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이건  KBS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ㅜ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경계합니다. 헛된 희망은 사양~~ . 가야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KBS 스페셜 가야>를 보고 가야의 마지막을 노래하는 <현의 노래>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어찌 보면 우리 시대 공존의 철학이 넓고 깊게 퍼질 것이라는 기대를 믿지 않기 때문이죠. 아 시니컬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묻는다면 3초의 망설임도 없이 저는 이 프로그램이 말하는 그 방향입니다.

공존, 평화, 환대. 도전. 용기

그래야 좀 더 재미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