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일. 고대영 사장이 해임되기까지 걸린 시간. 작년 9월에 시작한 파업이 해를 넘겨 드디어 오늘 마무리됩니다. 어제 이사회에서 해임안이 결정될 때 뭔가 울컥하더군요. 생각보다 이 시간을 많이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지난 5개월, 많은 시간의 점들이 떠올랐습니다. 한양대 1인 시위 현장에서 느꼈던 뜨거운 여름 햇살, 안산 세월호 분향소에서 얼굴을 들지 못했던 시간, 광화문 필러버스트 공간에서 느꼈던 매서운 칼바람과 누군가의 눈물, 강규형 이사가 해임 되던 날 과천 방통위 앞에서 마주한 추위와 기쁨. 그 사이에 여름이 가을로, 가을이 겨울로 옷을 갈아 입었습니다.
파업 마지막 날인 오늘, 서울 온도는 영하 11도. 미세먼지가 걷히니 추위가 왔습니다. 아니 이것은 정확한 말이 아닙니다. 매서운 바람이 부니 미세먼지가 잠시 걷혔습니다. 이 추위가 끝나면 다시 미세먼지로 뿌연 세상이 올겁니다. 그러니깐 지금 제가 서 있는 여기는 미세먼지와 칼바람 사이를 오갑니다. 이게 단지 비유일까요? 아닙니다. 적어도 제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냉정한 관찰입니다. 섣불리 청명한 봄을 기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 개인 노트북 폴더 중에 하나의 제목은 “밥벌이의 치열함”입니다. 여기에는 제가 밥벌어 먹고 사는 KBS에 대한 애정과 원한과 분노와 기대와 좌절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니깐 그 자체로 생명력 있는 공간인 거죠. 어제 저녁 이 폴더를 단 하나의 파일만 남기고 리셋시켰습니다. 지난 시간의 기대, 실망, 좌절, 분노와 같은 체험을 지워버리겠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모든 것이 세월과 함께 흘러갔고 흘러가고 있으며 이윽고 흘러갈 것이라는 것.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서 나는 지금 이 순간 만족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어떤 감정이든 다 놓아두고 가겠다는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파업이 마무리되는 시점, KBS라는 공간을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길은 한 갈래가 아니라는 생각을 다양한 의견 속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지금도 어느 길이 좋은지에 대해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 나의 설익은 확신과 경험이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공간과 사람에 독이 되는 것은 아닌지 우물거려지기도 합니다.
사실 변화와 개혁을 위해서는 말은 무력합니다. 개혁안이라든지 방향이라든지 이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문제는 오롯이 “나”입니다. 나는 혁명인인가? 나는 변화의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 바로 이 부분에서 파업 기간 집회 현장에서 내 스스로에게, 그리고 동료들에게 전했던 약속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봅니다.
우리 안에 동료의식이라는 게 여전히 있구나, 내 안에, 우리 안에 선한 손짓과 포옹과 목소리가 아직 살아있구나, 파업의 시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제 안에 축적되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싸움은 고대영 퇴진을 넘어 우리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이것 하나는 꼭 잊지 않으려 합니다.
“나는, 당신은, 우리는 쓰레기입니다.” 안산 세월호 분향소를 갔을 때 유가족에게 들었던 이야기죠.
이 파업이 우리만의 승리로 끝난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쓰레기일 겁니다. 이 승리가 새노조를 넘어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에게,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참여할 수 없는 주변 동료들에게, 지금 이 순간에도 거리에서 핍박박고 아파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우리의 승리는 어쩌면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이깁니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때부터 정말 쓰레기가 되지 않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일터로 돌아갔을 때 민주광장을 넘어, 우리 사무실 안에, 우리 채널 속에, 우리 프로그램 속에 낮은 곳을 향한 환대와 연대와 우애의 정신이 넓고 깊게 퍼졌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열심히 공부하고 성찰하고 비판하면서 작은 힘 보태겠습니다.
내가 스스로에게, 동료들에게 했던 말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시작인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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