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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내 맘대로 감상문

거리의 의사, 정혜신

정혜신.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온통 회색빛이다. 엄마에 대한 기억, 아빠에 대한 기억이 회색빛의 근원이다. 첫째로 딸을 낳은 그녀의 엄마는 둘째 아이가 아들이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둘째 아이 역시 딸이었다. 엄마는 그녀를 낳고 시무룩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갖다 버리라고 했다. 그 시대에 태어난 둘째 딸들이 가진 어떤 공통된 서러움이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도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언니에게 엄마는 굉장히 열성적이고 관심도 많았던 극성엄마로 기억되지만, 정혜신에게 그런 기억이 없다. 게다가 엄마는 그녀가 7살 때 암 진단을 받았다. 이후 13살 때 돌아가셨다. 이후 늘 일찍 죽을 공포에 휩싸였다. 다른 친구들이 그렇게 좋아하던 소풍조차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아빠에 대한 기억도 우울의 근원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굉장히 유한 분으로, 신위주가 고향으로 전쟁으로 남쪽으로 내려온 이산가족이다. 그는 그냥 신의주에서 서울로 삶의 터전을 옮긴 사람이 아니라, 처참한 죽음이 일상화된 극단적 상황에서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유하고 섬세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이 이런 극단적 경험을 했을 때, 세상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를 가지게 되고, 그것은 강력한 확신으로 심리 저변에 뿌리내리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중후군’환자였다. 휴일이면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는 아버지. 친구 분들이 단풍구경이라도 가자고 하면 ‘그딴 걸 봐선 뭐 하냐’며 집에만 머물러 계시곤 하던 아버지. 아버지의 이런 증세는 정혜신의 마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연세대 의대에 진학한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또 스스로가 살기 위해 정신과를 택한다. 정신과 레지던트 시절 정혜신은 2년 동안 1주일에 2번씩 정신분석을 받았다. 월급의 절반 이상을 자신의 치료비로 쓴 시절이었다. 그 시절 그녀는 환자로서 정신과 상담을 받으며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생생하게 느낀다. 환자의 감정이 끓어올라 낮에 회진을 돌 때 많이 힘들고, 바닥까지 내려앉는 마음에 고통스러워했지만, 이 ‘바닥까지 환자가 돼본 경험’은 정신과 의사로서 그녀의 삶에 큰 밑천이 된다. 모든 정신적 상처는 치유될 수 있다는 확신도 이 시절 얻은 소중한 자산이다. 이 시절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나의 지나친 경쟁 심리,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의식 저 깊숙한 곳에서 나를 괴롭히던 열등감들이 뿌리째 뽑혀 나와 내 의식에 명료하게 자리를 잡았고, 그에 따라 해결의 실마리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 지금 정신과 의사로서 내게 가장 소중한 자산은 내가 환자가 되어 분석치료를 받던 바로 그 시절의 생생한 경험이다. 의사와 환자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을 느낀 바로 그 경험이 내 의사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모티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정혜신, 의사일기-의사와 환자는 종이 한 장 차이, 한겨레신문 1999년 7월 17일)

 

정신과 전문의로 정혜신이 유명해진 것은 1998년 외환위기 시대, 대규모 구조조정 바람이 불 때였다. 당시 그는 구조조정 후 회사에 살아남은 사람들 상당수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증상이 비슷한 ADD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녀는 이 논문에서, ADD 증후군은 예측 불가능하고 위협적인 외부적 요인 때문에 그 상황을 겪은 사람의 대다수가 걸릴 수밖에 없다면서, 우리 사회는 이 생존자 그룹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잘 적응하고 있다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로 이들 내부에서는 심각한 정신적 황폐화가 진행 중이므로 체계적인 접근을 통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리고 그 시기 구조조정 후 정신과를 찾는 남자들이 많아지면서, 정혜신은 남성 심리 전문가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 시기 그가 줄곧 관심을 둔 개념은 “맨 콤플렉스”였다. 맨 콤플렉스란 ‘남자다움’이라는 견고한 가치체계로 인해서 남자들이 과도한 강박관념으로 시달리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1990년대 한국에서 ‘남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남자들의 스트레스는 거의 강박적 수준으로 이것이 남성들의 삶을 고단하게 하며 결국 생명까지도 단축시키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고 것이 그가 다양한 남성을 만나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정혜신은 남자의 마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을까? 아마도... 아버지 때문이 아니엇을까? 외교관이 꿈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터진 뒤 외교관과 아무 상관도 없는 전공을 택했고, 전쟁 뒤에는 호구지책으로 장사를 해야 했다. 이루지못한 꿈 얘기를 반복하던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아내를 여의고 삼남매를 먹여살려야 하는 가장으로 살았다. 정혜신은 그런 아버지에 대해 “삼남매를 보살피는 것에 인생을 저당 잡혔다”고 말한다.

 

“가장의 책임감 하나로 일터를 지켰던 아버지는 자신이 원치 않는 일을 하면서 희망도 즐거움도 다 접은 잔인한 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마음은 점점 내리막길로 치닫고 있었나 보다. 아버지의 사업이 시대에 뒤처지는 사양 산업이 되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손도 쓰지 않았다. 어느덧 정신과 의사가 되어 아버지를 한 남자로 바라볼 수 있었을 때 아버지는 이미 만성적인 무기력 상태의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 힘들어도 말 한마디 못하신 아버지, 남자의 인생이라는 게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던 아버지, 정신과 의사인 딸에게조차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혼자 견디셨던 아버지, 그 인생이 너무 가슴 아파 나는 아직도 아버지 얘기만 나오면 목이 메인다. 그런데 지금 진료실에서 내 아버지의 삶이 대부분 남자들의 공통적인 삶을 알게 되었다”

 

정혜신은 이런 남성들을 탐구했고, 2001년 유명한 남성들의 심리를 분석한 “남자 대 남자”를 펴냈다. 그리고 한 남자를 만났다. 지금의 남편 이명수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명수 선생님을 좋아한다. 정혜신 선생님을 먼저 알게 되었지만, 그리고 정혜신 선생님의 오랜 팬이었지만, 사실 지금은 이명수 선생님에게 조금 더 끌린다. 같은 남자로서 삶의 궤적에서 약간 더 앞에 있는 선배 같은 거다. 물론 그래서 더 어렵고, 더 어색하다. 편의를 위해 이 글에서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모두 생략~~) 정혜신은 이명수를 “비트겐슈타인 같은 경계선 사고가 유별나고, 저울 같은 균형감각을 갖춘 사람”으로 소개한다. 이명수는 경영학이 적성에 맞지 않아 대학을 자퇴한 후 몇 년 동안 소설, 수필, 르포, 리라이팅 등 다양한 글을 쓰고 공연 연출을 하며 살았다. 대학에 재입학해서 졸업한 다음 대기업 마케팅 팀에 특채되었고, 나중에는 광고회사 기획자로 일했다. 이명수는 스스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새의 눈’(bird’s eye view)이라는 말이 있죠. 제가 남들과 약간 다른 게,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면서도 유체이탈처럼 또다른 제가 늘 위에서 내려다봐요. ‘너무 많이 얘기하는 건 아닌가, 오버가 아닌가’ 위에서 바라보고, 그 위에는 또다른 내가 걔를 바라보고, 심할 땐 7명 정도의 이명수가 줄을 서는 거예요. 심지어 내가 섹스를 하고 있어도 위에서 그걸 내려다보거든요. 아이들과 식사하다가도 ‘밥 굶는 애들이 굉장히 많은데, 왜 내가 이 아이들만 특히 좋은 밥을 사주고 있는 걸까. 참 이상하다. 불편하다’ 하면서 위에서 보고 있어요. 애들에게 그런 얘기를 하면 ‘아빠가 또 시작이구나’ 그러죠.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본다는 거예요. 그래서 몰입이 잘 안돼요.”

 

정혜신이 이명수를 처음 만난 것은 상담실에서다. 광고기획자로 일하던 30대 중반의 이명수는 특유의 예민한 성격으로 자주 신경성 위통과 뻣뻣한 뒷목에 시달렸고, 한번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지 않겠느냐는 회사 사장의 소개로 정혜신을 만났다. 그 처음 만남에 대해 정혜신은 이렇게 회고한다.

 

“직업상 소위 성공한 남자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기회가 많았죠. 그런데 이 사람은 제가 만나본 사람 중 최고로 지적이었어요, 뽕이라고 표현할 만큼, 대화가 너무 즐거웠고, 굉장히 독특했어요. 신경질적이고 날카롭고 예민한데, 제가 접해볼 수 없는 종류의, 남자로도 인간으로도 대단히 섹시했죠. 책임감 많고 원칙적인 사람인데 자유롭고, 새의 눈을 가졌지만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친밀하고, 모순되는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의 합이 이명수라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어요.”

 

30대 중반의 정혜신과 이명수, 서로에게 끌린다. 그런데 걸리는 게 있다. 이미 가정이 있다는 것, 서로의 자녀들이 있다는 것,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주도적 답을 누가 내 놓았는지는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지만, 이 글이 정혜신에 대한 글이니, 정혜신의 관점에서 답을 찾아가보자.

 

녀는 스스로의 무의식에 굉장히 충실하다. 그리고 그 감정에 솔직하다. 그래서 살아오면서 겉으로 보기엔 설명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것 같은 선택을 한 적이 적지 않다. 그 선택에 있어 주변에서 어떤 영향도 받지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그녀는 매우 독립적이다. 그녀는 스스로의 감정, 무의식, 본능, 감각, 그것의 근원적 건강성을 믿고, 그 감각대로 살아간다. 그녀는 자유롭게 살고 싶다가 아니라, 그냥 자유롭게 산다. 원하는 걸 망설이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그녀가 몇 번 만나기도 전에 마음이 확 끌리는 남자, 이명수를 만났다. 그렇다면? 그녀이기에 그 끌리는 감정을 믿고 갈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받게 되는 험한 일들, 상처들은 스스로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고 감당할 자신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엄청난 부담 때문에, 자신의 무의식에 충실하는 것, 감정과 본능에 충실하는 것을 주저한다. 또는 충실하더라도, 그것을 커밍아웃하지 않고, 비밀의 저장고에 넣어둔다. 정혜신과 이명수의 사랑은 그래서 흥미롭고, 놀라운 구석이 없지 않다. 사회적 시선, 윤리로부터 비껴있는 생각과 행동에 대한 커밍아웃은 스스로의 선택에 대해 무한한 자신감이 있지 않은 사람이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신감의 근원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가?

 

정혜신, 그녀는 어릴적 시간을 잿빛이라고 기억하는 사람이다. 경쟁심이 강하고,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크며, 무의식 깊은 곳에 열등감을 키우던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세상의 시선, 세상이 이래야 한다고 설정한 도덕, 윤리에서 비껴난 선택, 자신의 감각, 무의식, 본능에 충실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추측해 보면 두 가지일 것 같다. 첫째, 잿빛이라 기억하는 어린 시절 속에 숨겨진, 그러나 그녀의 삶에 충만히 퍼진 작은 빛줄기 = 아버지로부터 받은 소중한 선물, 그녀의 아버지는 상처받은 영혼이지만, 자식들에게 부드러웠고, 그래서 그녀는 권위라는 것을 실감할 기회가 없었다. 이것은 정혜신의 삶을 세상의 권위, 시선, 권력, 도덕에서 자유롭게 하는 심리적 토대가 된 듯 싶다. 둘째, 잿빛이라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그림자, 그리고 무의식 깊은 곳에 숨겨둔 감정의 쓰레기들에 대한 처절한 치유 경험. 그는 정신상담을 받으며 스스로 치열하게 치유했고, 토닥거렸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스며나오는 감각, 본능의 건강함을 믿게 된다. 이런 기억과 경험은 정혜신으로 하여금 이명수와의 사랑을 밀고 나가게 하는 심리적 힘이었다.

 

정혜신과 이명수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진 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이 많았다고 정혜신은 회고한다. 기독교 집안 출신이라 안수기도를 빙자한 폭력이 있었고, 마귀에 씌었다는 말도 들었다. 이혼 과정이 인터넷에 ‘폭로’되면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도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내가 흥미롭게 본 것은 인터넷 악플에 대한 정혜신의 쿨한 반응이다.

“ 인터넷에 어마어마한 악플들을 밤새 보다가 ‘아, 이 사람들이 지금 내 얘길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얘길 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별로 영향을 안 받았어요.”

인터넷 악플을 보고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 할 수 있을까? 이런 의구심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맞네 맞네’ 끄덕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콤플렉스를 타인에게 투사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이명수와의 사랑을 선택 할 때 유일하게 마음에 걸린 것은 외부의 시선, 비난이 아니라 예전 배우자들이었다. 이 부분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정혜신에게 조심스러운 부분이다. 어쨌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정혜신과 이명수의 사랑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 짓는게 좋겠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들의 러브스토리가 상당히 흥미롭다. 그러나 정혜신을 기록해야 마음 먹은 것은 그의 러브스토리를 넘어선 공적 영역 때문이다. 다만 공적 영역으로 넘어서기 전 사랑에 대한 정혜신의 이야기가 내게 어떠 의미에서 인상깊은지 그 부분만은 설명하고 패스하도록 하자.

 

가끔씩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는 경우가 있다. 20대에 처음 만나 좋아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다, 30대에 결혼해, 20대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절망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있는 그녀보다 더 끌리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까? 사실 이런 질문은 때론 심각하게 던져질 때가 있다. 실제로 수많은 관계 속에서 그런 끌림은 우연치 않게, 예기치 않은 곳에서 나타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알면서도, ‘나도 어쩔 수 없어’라며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예외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내겐 그런 확신은 없다. 다만 지금 나와 내 옆에 있는 그녀는 서로에 대해 확신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관계를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에 확신하는 게 조금 있다. 필이 받으면 밤새 나누게 되는 대화, 언제 어디서든 끊임없이 쏟아지는 이야기, 아이같은 장난, 누나같은 토닥거림, 아빠같은 믿음직함, 엄마같은 포근함, 지난 15년간 무수한 감정과 사건의 롤러코스터를 함께 겪으면서 쌓아온 서로 간의 강한 맞물림이 이 관계의 지속성에 대한 견고한 믿음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들고, 허기가 들 때가 있다. 이런 안정적인 관계가 인간이 지향하는 사랑에 대한 한 가지 색깔이라면, 불안정하고 위험하고 파괴적인 사랑도 인간이 욕망하는 사랑의 한 가지 빛깔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것이 지금의 안정적인 사랑을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어떤 관계의 불확실성.

 

30대 후반에 만나 50대 초반이 된 정혜신, 이명수의 관계는 그런 면에서 지금의 내게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준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하고, 그리고 시간이 흘러, 1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그들의 사랑, 선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먼저 이명수의 이야기다.

“저는 첫 번째 결혼이 전혀 불행하지 않았어요. 좋은 편에 속했죠. 오래 연애한 캠퍼스 커플이었고 10년 정도 살았습니다. 그러다 정혜신, 이 친구를 만나게 된 거구요. 그래서 우리는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자주 물어요, ‘더 강적이 나타나면 또 그럴지도 모르겠네’ 하고.(웃음) 제가 가끔 ‘내가 더 강적을 만나서 잠시 그 여자하고 섹스를 하거나 연애를 하거나 여행을 하거나 공연을 같이 다닐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해요. 하지만 이 친구는 걱정을 안 해요. 내 맘 중심에 자기가 있다는 걸 완전하게 느끼고 있어서죠. 누군가의 말에 의하면 제가 바람 같은 구석이 있지만, 이제는 굉장히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린 바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혜신도 이명수와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저는 명수씨가 바람같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살면서 그랬던 적도 있어요. 그러면 또 제게 얘기하고요. 근데 저는 그게 전혀 문제가 안 돼요. 왜냐면 나랑 이명수라는 한 인간의 내면 세계는 천 개 정도의 조각을 계속 맞추어온 꽉 맞는 관계거든요. 그걸 맞춰가는 과정에서 면과 면 사이의 끊임없는 접촉이 있었고요. 나 아닌 누구와 어떤 접촉을 하더라도 그건 서너 조각 정도의 일부분에 불과한 거죠. 지금까지 우리가 나눴던 관계의 깊이, 양 이런 것들보다 더 할 수 있는 사람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어요.”

 

현실적으로 자신을 대체할 누군가가 존재할 수 없다는 확신, 어쩌면 사랑과 결혼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그리고 상대방에게 약속하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부질없는 다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혼 이후의 관계, 그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접촉의 역사, 천 개 정도의 조각을 계속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하고, 이야기하고, 접촉하는 그 관계의 역사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 두 사람은 이야기해준다. 이 밀도 깊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한, 지금의 사랑이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은 허황된 욕망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살다보면, 남자는 자신이 지금 사랑하는 그녀 말고 또다른 매력적인 여자들을 만나게 된다. 여자 역시 지금 만나는 남자 보다 매력적인 남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럴 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의 여부는, 지금의 관계를 그 누구가 대체할 수 있느냐의 여부, 또는 새로운 사랑이 기존 관계 이상의 잠재성을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 지금의 그 사람과 얼머나 많은 내면의 조각이 맞추어져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을 것이다.

 

 

이제 정혜신의 공적 세계로 이야기를 점프시켜보자. 정혜신은 개인적인 사랑에 있어서도 그렇고,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키는 매력을 발휘한다. 이에 대해 이명수는 정혜신을 ‘당대 최고의 치유자’라고 평가한다. 그녀는 감정노동자, 고문피해자, 해고노동자들을 치유하는 현장에 빠짐없이 있어왔다. 특히 그녀는 공권력이라 불리는 국가 폭력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한겨레, 신동아 등에 실린 그의 칼럼들은 어떤 문제든 공감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국가의 역할에 대해,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자행되는 국가 폭력에 대해 날을 세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 그의 칼럼 하나를 들여다보자.

 

“상대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의사의 정서적 참여없이 예리한 분석만으론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없고, 따라서 치료는 한 걸음도 진행되지 않는다. 인간의 자아는 ‘관찰적 자아’와 ‘참여적 자아’로 나뉘어 있다. 어떤 현상이나 사람을 볼 때 이를 객관적으로 판단, 분석하는 것이 관찰적 자아의 기능이라면, 공감이라는 과정을 통해 대상의 현실이나 삶에 참여하는 것은 참여적 자아의 몫이다. 정신과 수련 과정 중에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은 냉철한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적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을 움직이고 주체적 자아로 거듭나게 하는 핵심이 바로 참여에 있다는 정신과적 교훈이다” (정혜신, 정혜신 마음읽기:참여적 자아, 한겨레, 2003년 2월 17일.)

 

참여적 관찰자.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 자신이 참여하고 관찰하는 영역을 상담실 밖으로 조금씩 넓혀간다. 그러면서 자신의 참여적 자아를 끊임없이 거듭나게 한다.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라고 생각되면, 와락 안았고, 그 행동에는 놀라운 지속성이 있었다. 특히 그는 국가공권력으로부터 씻을수 없는 상처를 입은 개인에 무한한 애정을 보인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진실의 힘과 와락이다. 우선 진실의 힘부터 이야기해보자.

2005년 9월 정혜신은 국가보안법 2차 청문회 자리에 출석해 1981년 ‘진도가족간첩단’ 사건 피해자인 박동운 씨를 상담했다. 그 상담이 중요한 계기였다. 조작 간첩단 사건으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삶과 가족이 풍비박산 난 박동운 씨를 상당함 직후 그는 ‘국가보안법은 우리나라의 공권력을 사이코패스로 만들었다’며 ‘그동안 정신과 의사로 살면서 마음에 고통 있는 사람을 1만명 이상 만나왔지만, 누구도 고문 피해자들처럼 처절하게 살지는 않았다. 이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국가에 분노한다.’고 말한다. 이 일이 있고부터 그는 박동운 씨를 상담치료했고, 이 과정에서 다른 고문피해자들을 찾아내 집단상담하는 일을 시작하게 됐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문피해자들을 찾아내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들을 모으는 것도 힘들었다. 과거의 모진 고문과 억울한 옥살이, 간첩이라는 손가락질과 가족의 붕괴를 겪은 이들은 세상과 만나는 것을 꺼려했다. 상처는 모질고 깊었다. 그래서 고문피해자 치유모임을 결성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온 지 3년이 지난 2008년 5월에야 처음으로 봉은사에서 상담치료가 시작됐다. 정혜신을 비롯한 여러 시민운동 활동가들이 참여했고, 그렇게 고문피해자들은 서서히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해갔다. 그는 고문피해자를 만나면서, 사이코패스의 성격을 보이고 있는 한국의 공권력에 마음 깊이 분노한다.

 

“사이코패스란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할 능력이 없는 것을 말해요. 국가 폭력으로 국민이 마음을 다쳤는데, 그것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는데, 아무도 반성하지 않는 게 말이 되나요. 그런 잔인함에 대한 분노는 정당한 거라 생각해요.”

 

치유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끈질긴 과정을 통해 그들은 서서히 지난 상처를 치유해갔고, 재심에서 무죄 판정을 받은 몇몇 사람이 받은 보상금을 바탕으로 2010년 6월 고문피해자들의 치료와 법률소송을 돕고 고문 방지 활동에 나서는 재단법인 진실의 힘을 출범시켰다.

 

이 진실의 힘은 2011년 10월 30일 경기도 평택, 쌍용차 정리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을 위한 심리치유센터 ‘와락’에 힘을 보탰다. 정혜신을 따라 쌍용차 노조원들의 상담치료장을 찾은 고문피해자들이 자신의 처지와 저들의 처지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내민 것이다. 이 의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분들의 성금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 거예요.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돕는다는 면에서, 국가 폭력 피해자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참담한 삶을 30여년간 살아온 분들이죠. 안기부 남산 지하실에서 두세 달 불법 감금에 밤낮 없는 고문, 그리고 바로 옆방에 가족까지 끌려와 그 고통의 비명을 보고 들어야 했던 상황을 그려보세요. .. 당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도 고통스러웠던 이들이 자신들의 삶을 여러 사람 앞에서 풀어내면서 치유가 시작된 거에요. 이들은 와락 개소식 날 비로소 세상에 공식적으로 나선 거예요. 법정을 제외하고는요. 이건 바로 피해자 콤플렉스를 벗어나 이 사회의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의미하죠.”

 

정혜신이 평택을 찾기 시작한 것은 2011년 3월부터다. 2009년 8월 파업 이후 세상을 떠난 노동자와 가족만 20여명, 해고노동자와 가족의 죽음이 이어지자, 정혜신은 ‘늦게 와서 미안하다’며 2011년 3월부터 상담프로그램을 시작한 거다. 이 상담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이들은, 정혜신의 말을 빌리자면 “심리적인 방사능 피폭 상태가 된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보다 통합적이고 조직적인 치유센터가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그는 심리치유센터를 준비했고, 5개월 만에 와락 문을 열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진실의 힘’에서 지원한 2000만원의 종자돈과 5600여 명의 후원자들이 모아준 2억여 원으로 문을 열게 된 과정,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과정이었고, 그 기적의 중심에 정혜신이 있었다.

 

진실의 힘, 와락 이야기에서 빠질 수 없는 정혜신은 ‘거리의 의사’를 꿈꾼다. 심리적인 고통의 현장에 머물며,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들을 치료하는 거리의 의사 말이다.

“진정한 치유를 위해선 진료실 문을 열고 나와 가정과 직장, 농성장 등 삶의 현장으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어요. 그곳은 또한 내 전공 분야가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 꿈은 거리의 의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긴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할 때...

사실 어릴 적 이야기를 빼고, 실제로 공적인 이야기와 공적인 삶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30대 이후의 정혜신의 삶의 궤적은 이명수의 삶의 궤적과 싱크로율 90% 이상이다. <남자 대 남자>라는 정혜신의 오래전 베스트셀러는 사실상 이명수의 아이디어에서 시작했으며, 정혜신의 그림에세이 역시 두 사람의 공동 작품이며, 정신건강 컨설팅 기업 마인드프리즘 역시 이명수와 정혜신이 함께 만든 기업이며, 이들은 늘상 함께 강정마을에, 쌍차 노동자 집회에 나타나고, 와락의 아이디어 역시 이명수한테서 나왔으며, 최근에는 함께 ‘홀가분’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정혜신의 말을 빌리자면, 이들은 지난 10여년간 24시간 붙어있는 존재였고, 그만큼 많은 것을 공유했다. 어찌보면 지금의 정혜신은 이명수가 함께 했기에 가능한 존재이고, 지금의 이명수 역시 정혜신이 있기에 가능한 존재였다.

내가 정혜신의 이야기를 길게 이야기한 것은, 이 글은 정혜신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이명수의 이야기이며, 이 둘의 삶이 어찌보면 지금의 나와 그녀에게 중요한 삶의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마지막은 정혜신과 이명수가 어느 인터뷰의 엔딩으로 장식한 말로 끝낸다.

 

‘잘 산다’는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명수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도 결국은 잘 살기 위해서잖아요. 나누는 것 외에는 다른 답이 없더라고요. 저는 특히 싫증을 잘 내는 편인데, 함께하고 나누는 건 생명력이 굉장히 길어요. 예를 들면 딸아이가 파리로 공부하러 가기 전에 저희가 1년치 학비를 모아놨어요. 그런데 쌍용차 소식을 접하고 너무 가슴이 아픈데, 관련해서 금전적으로 돕고 싶은 두세 군데의 단체가 있는 거예요. 딸아이도 쌍용 상담 현장에 늘 같이 갔으니까 불러서 물었어요. ‘얘, 아버지가 여기다 네 학비를 내고 싶어, 어떻게 생각하니?’ 딸이 그러더라고요, ‘내! 프랑스는 무료로 갈 방법을 찾아볼게. 안 되면 1년 쉬었다 가지 뭐.’ 그래서 그 돈 다 냈어요. 그 직후에 <홀가분>이 나왔는데 딱 그만큼 인세가 들어왔어요. 그 경험을 하니까, 어 이거 봐라, 되게 재밌네. 그래서 요즘 제가 돈을 무지하게 잘 내거든요.”

 

정혜신

“우리가 살아오고 일한 것에 비해서는 놀랄 만큼 재산이 없어요. 근데도 명수씨는 오래전부터 사적인 영역에서나 공적인 영역에서나 무조건 밥을 사는 사람으로 나름 유명해요. 허세를 부리거나 돈을 개념 없이 쓰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생각이 있거든요, 어른으로서 젊은 사람들의 벽이 돼야 한다는. 한 인간으로서 그런 게 섹시하죠.”

 

이명수

“어제 공중목욕탕에서 욕조에 앉아 있는데, 서너살 먹은 아이가 아빠랑 앉아 있다가 일어나면서 모르는 사람인 저의 무릎을 아무 거리낌 없이 짚고 일어나는 거예요. 저쪽에 다녀오면서 또 한번 그러는데, 그 순간 짜르르 느낌이 왔어요. 아가야, 세상이 너한테 내 무릎 같았으면 좋겠구나, 나는 어른으로서 너에게 그런 벽 같은 존재이면 좋겠고. 그런 마음으로 힘닿는 데까지 젊은 친구들, 마음 아픈 친구들, 소수자에게 무릎이 되고 싶어요.”

 

정혜신

“저는 반대로 새해부터 거리낌 없이 딴 사람의 무릎을 짚고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트위터에도 ‘트친님들 새해 무릎 긴장하세요’라고 썼어요.”

 

 

<참고문헌>

최을영 (2012.03). 정혜신 : 와락 안아주는 거리의 의사. 인물과 사상, 3월호.

김두식 (2012.02.10.) 정혜신ㆍ이명수 부부의 사랑. 한겨레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