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저씨 축구하러 가요."
한참 게임을 하던 성동이가 어느 순간 내 손을 잡는다.
딱지 한 장을 기준이가 뺏어갔다고 울고 있는 민석이를 달래는 중이었다. 기준이와 민석이는 형제다. 너무 닮아 누가 기준이인지 누가 민석이인지 헷갈리는데, 게다가 엄마는 어찌된 게 매번 똑같은 옷을 입힌다.
"성동아 잠깐만... 민석이 딱지를 기준이가 뺐어갔대. 어떻게 할까?"
기준이가 끼어들었다.
"제가 뺏어간게 아니라, 민석이가 저보다 딱지 수가 한 장 많아요. 저희 원래 딱지 수가 똑같아야 하거든요."
나는 왜 딱지수가 똑같아야하는지는 모른다. 다만 똑같아야 한다는데 기준이와 민석이는 모두 동의하는 듯한 얼굴을 보인다. 내가 잽싸게 끼어든다.
"그렇다구 기준아, 네가 민석이 딱지 가져가면 이제는 이제 네 딱지 수가 한 장 더 많아지잖아."
"아니죠. 이제 똑같아진 거죠. 민석이가 한 장 더 많았는데, 그걸 내가 가져갔으니깐... "
귀여운 산수, 깜찍한 세법이다.
"어.. 그런가? 그럼 민석이랑 기준이랑 딱지 전부 바닥에 펼쳐서 세어보자. 누가 더 많은지?"
두 형제는 마루에 자신이 꼭 쥐고 있던 딱지를 한장 두장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둘 딱지를 세기 시작했다. 기준이가 말했다.
"어~ 이상하다. 정말 내가 한 장 더 많네. 어쩌지?"
축구공을 들고 한참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성동이가 끼어들었다.
"그럼 기준아.. 너 딱지 한 장을 나한테 줘. 그러면 너랑 민석이랑 딱지수가 똑같잖아."
나는 성동, 기준, 민석이의 얼굴을 번가라가며 쳐다봤다. 고개를 꺄우뚱하던 기준이가 성동에게 말한다.
"그래! 너 이거 가져."
그 말을 듣자, 민석이는 울음을 그치고, 이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표정을 짓는다.
2.
딱지 한 장을 얻은 성동이는 기분이 좋은 듯, 내 손을 꼭 잡고 평택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이끈다.
"아저씨... 핸드폰 번호 어떻게 되요? 여기 찍어주세요."
내 번호를 누르자 곧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린다.
"아저씨, 제 번호에요. 저장해두세요. 아저씨 핸폰 스마트폰이네. 난 아닌데..."
평택에 내려온지 삼 주째. 드디어 성동이가 마음의 문을 조금 연 것 같았다. 기분 어땠냐구? 좋아 죽을 뻔했다.
제일 처음 만났을 때 게임을 하던 성동이가 내가 했던 말이 뭔지 아나?
"아저씨 자꾸 상관하지 말아요. 귀찮으니깐..."
그게 삼주만에 조금, 그러나 많이 바뀐 거다. 왜 바뀐지는 모르겠다. 그냥 시간이 한톨 한톨 모이면서 이렇게 된 것 같다.
3.
저 멀리서 축구를 하던 윤택이가 손을 흔든다. 윤택이는 평택초등학교 2학년이다. 축구를 하다 시비가 붙으면 4학년한테도 대드는 겁없는 소년, 그러나 동글동글한 얼굴과 밝게 빛나는 눈이 영락없이 어린이일 수밖에 없는 소년.
"오~ 국대(나는 윤택이를 평택 초등학교 축구 국가대표라 부른다) 잘 있었어?"
"예.. 아저씨 오늘은 늦었네요? 한 판 하시죠? 오늘은 두 명뿐이에요? 그럼 2대 2 음료수 내기 어때요?"
윤택이는 음료수 내기를 하면 지든 이기든 내가 사준다는 걸 이미 간파했다. 뒤에 있던 성동이를 봤다.
"성동아 한 판 할까?"
성동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윤택이는 신나 들떠있었고, 성동이는 갑자기 조용했고, 뭔가 기가 죽은 느낌이였다. 조용한 성동이에게 화이팅을 외치게 했다. 기가 죽은 성동이에게 계속해서 공을 패스했다. 윤택이가 공을 몰고 가면, 성동이가 막게 했다. 결과는 3대 2 승. 성동이가 두 골을 넣었고, 내가 한 골을 넣었다. 경기가 끝나자 윤택이가 당연하다는듯이 숨을 헐떡거리며 내게 소리쳤다.
"아저씨는 어른이잖아요. 그러니깐 아저씨네가 유리한 거구, 그러니깐 음료수 사줘요."
4.
성동이, 윤택이와 음료수를 사러 슈퍼마켓에 갔다. 윤택이는 주저없이 파워에이드를 집었고, 성동이는 한참을 망설이다 밀키스를 들었다. 계산대에 서자 주인 아주머니가 물었다.
"포인트카드나 할인카드 있으세요?"
"아뇨. 그냥 계산해주세요."
성동이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 엄마는 포인트카드 있는데 아저씨는 없네요."
그게 왜 웃을 일인지 어른인 나는 알 수 없지만,
나도 모르게 주절주절 내가 포인트카드가 없는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성동이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한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윤택이는 다음주에 또 한 판 붙자는 말을 남기고 떠났고, 나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다는 걸 굳이 설명하면서 성동이와 함께 운동장으로 향했다.
5.
운동장 벤치에 앉아있는데 운동장 흙바닥에서 바람에 굴러다니는 버려진 딱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성동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딱지 앞으로 뛰어갔다.
"아~ 딱지다."
누군가 버린 딱지를 주은 성동이는 모래를 털고 한참을 바라보더니 이 딱지 멋있다며 내게 보여줬다. 돌아보니 운동장에는 그렇게 버려진 딱지가 참 많았다. 성동이는 신이 났는지 버려진 딱지를 줍기 시작했다. 나도 함께 딱지줍기 놀이를 시작했다.
"성동아 이건 멋있는데 너무 젖었다. 말려도 안 될 것 같은데.. 이건 버리자.."
"성동아 이 드래곤이랑 저 드래곤이랑 뭐가 더 멋있냐?"
"성동아 대박 대박.. 이것봐.."
운동장을 뒤져 약 20장의 딱지를 건져낸 성동이와 나는 젖은 딱지는 볕에 말리고, 모래가 잔뜩 묻은 딱지는 모래를 털어내면서, 딱지 재활용 작업에 들어갔다. 누군가 버린 딱지를 정교하게 손질하는 성동이를 보는데 뭔가 찬 바람이 슝 지나갔다. 딱지줍기 놀이와 별개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성동이는 누군가 버린 딱지를 주우면서 좋아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어른의 질문이다. 이 질문은 내가 성동이를 만나는 그 순간에는 쓸데없는 질문이다. 그냥 함께 재미있고, 함께 웃고, 함께 신나면 그것으로 되는 거다. 지금 이 순간에는 말이다.
그러나.. 솔직히 이야기하면..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
윤택이 앞에서 주눅든 모습으로 있던 성동이.
누군가 버린 딱지를 줍던 성동이의 모습은.
그 성동이가 지난 3년간 겪었을 상처와 오버랩되면서...
가슴이 아프다. 많이 많이..
6.
그런데 정.말...
게임은 어렵다.
성동이가 같이 하자면서, 계정도 만들어주고, 게임법도 설명해줬는데..
난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크레이지 아케이드" 정말 크레이지했다.
다음 번에 올 때는 미리 연습 좀 하고 와야겠다.
"아저씨 평상시에 조금 연습하면 금방 좋아질거에요. 제가 아이템이랑 다 획득해놓았으니깐, 어렵지 않을거에요. 하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전화하구요. 다음주에 기대할게요."
"성동아.. 아저씨가 다음주에는 못와."
"왜요?"
"아저씨 다음주에는 회사 가야 하거든.."
"음.. 그럼 그 다음주에는요?"
"당근 오지. 매달 마지막주 토요일만 못오는거야"
"매달 마지막주요?" 성동이가 이해가 안되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음 그러니깐 세 번은 여기 오구, 한 번은 회사 가구, 그런거야."
성동이가 지나가는 말로 한 마디를 던졌다.
"뭐.. 그러니깐 다음다음 토요일은 온다는거죠. 꼭 와요."
7.
"꼭 와요!"
이 말을 듣고 느낀 것..
이제 꼭 갈 수밖에 없는 곳이 생겼다.
이제 꼭 가고 싶은 곳이 생겼다.
매주 토요일 저녁이면 집에 들어오자마자 피곤에 지쳐 푹 쓰러지지만..
행복한 피곤이 무엇인지를 느끼고 있다.
8.
그곳이 어디냐구?
와락이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가족을 위해 만들어진 작은 보금자리.
와락을 드나들게 되면서
2009년 쌍용자동차 사건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2009년 쌍용자동차에서 2500여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그리고 펼쳐진 이야기, 그것은 대상만 다를뿐 <도가니>와 다른 게 없었다.
그 사건 기록 일지에서 우연히 보게 된, 알게 된, 읽게 된 노동자들과 그들의 부인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와락에서 보게 된다.
"이 분이 그 분이셨구나."
"이 아이가 사진에서 본 그 아이구나. 많이 컸네."
그러면서 와락하게 된다. 어떨때는 눈물이 와락, 어떨때는 웃음이 와락..
9.
그 이야기들을 조금씩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왜?"
그냥 내 마음이 그걸 원한다.
...........................
참고로 여기쓰는 아이들 이름은 모두 가짜 이름이다. 오해없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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