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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내 맘대로 감상문

10월 5일 3과 사랑 - Three 관람 평 -



<쓰리>는 새로운 삼각관계를 그린다. 오래된 연인 A와 B가 서로에게 권태를 느낄 즈음 새로운 사람 C가 나타난다. A과 B는 모두 새로운 사람 C와 사랑에 빠지고, 결국 A와 B, B와 C, A와 C는 모두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쓰리는 대략 그런 내용이다.

대략적인 얼개는 그렇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쓰리는 사랑에 대한 많은 질문을 던진다. 사랑은 A와 B 둘만의 상호작용인가? 사랑의 화살표가 1대1로 대응되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만든 감옥 아닌가? 새로운 사랑의 감정이 기존의 사랑을 대체하는가? 아니면 보완하는가?

새로운 남자 아담이 나타나기 전의 한나와 시몬의 관계, 사실 그 사랑 역시 사랑이었다. 지루하거나 평범한 관계도, 서로 지치도록 싸우는 관계도 아니었다. 둘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고, 그만큼 사랑했다. 물론 인정해야 하는 것 한 가지. 사랑의 감정에 일상의 시간이 덧씌워지면서 성적 긴장이 다소 퇴보했으며, 열정보다 습관이 사랑을 지배하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 하지만 내가 봐온 40대 후반의 커플들에 비하면 한나와 시몬의 관계는, 감정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들은 사랑의 감정에 최선을 다하고,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관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랑의 관계에
C가 들어온다. 아주 강력한 사랑 호르몬을 풍기면서...
이 호르몬에 A와 B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 영화의 삼각관계가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오래되고 견고한 사랑의 성을 무너뜨리고 그 관계에 새로운 사랑의 색깔을 덧씌우는 C, 여기서 C의 캐릭터, 아담은 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이다. 어디 하나 얽매인 데가 없다. 줄기세포 전문가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축구, 유도, 합창, 수영 등 온갖 취미 활동을 즐긴다. 텅 빈 집에 덩그러니 놓인 침대에서 그는 남녀 구분 없이 여러 사람들과 섹스를 나눈다. 아담은 자신이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아닌지 고민하지 않는다. 카메라를 통해 비춰지는 그는 모든 것을 즐기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런 남자에게 어떤 사람이 매력을 느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조금이라도 자유를 열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다.

왜?
인간은 관계의 동물이면서, 동시에 그 관계로부터 자유롭고 독립적인, 소위 쿨한 인간에게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매력은 관계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나의 욕망과 그렇지만 관계로부터 사회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나의 현실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자유로운 영혼은 의외로 우리 주변에 적고, 그 희소성은 아담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한나와 시몬의 관계에 등장한 아담은 기존의 사랑, 그 관성과 습관에 “사랑이 무얼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리고 아담의 등장 이전과는 전혀 다른 빛깔의 사랑을 제시한다. 이 변화된 사랑의 빛깔은 참 오묘하다. C의 등장으로 A와 B의 사랑이 소멸되거나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독해지는 거다. 강해지는 거다. 이것은 미니시리즈에서 봐왔던 사랑의 빛깔과,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의 관념과 완벽하게 배치된다.

사랑은 둘이 아니라, 셋이 될 때 좀 더 완성태에 가까워진다는 사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보통 둘씩 짝을 짓지만, 그것이 사랑의 이상적인 모습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새로운 사랑이 과거의 사랑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개인의 삶 속에 사랑을 좀 더 풍요롭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
작가가 쓰리(3)라는 태생적으로 긴장과 불안을 배태하고 있는 숫자를 영화의 제목으로 붙이고 있는 것은 그 긴장과 불안이 사랑의 생명력을 좀 더 강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어서일 게다.

마지막 장면에서 한나, 시몬, 아담은 벌거벗은 채 나란히 누워 서로를 안는다. 카메라가 세 사람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결국 세 사람이 샬레 안에 들어 있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이 세 사람의 사랑은 어떤 이야기로 펼쳐질까? 아침에 눈을 떠서 “이거 뭐야? 우리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라고 말할 수도 있고, 영원히 셋이서 행복하게 살 수도 있으며, 누군가가 떠날 수도 있다.

어떤 스토리든지 상관없다. 다만 감독은 우리가 거룩하게 이야기하는 ‘둘만의 사랑’, ‘영원한 사랑’을 유일한 사랑의 가치로 보는 것에 가볍지만 묵직한 질문을 던질 수 있기를 바라는 것 같다.  
감독의 이야기처럼,
살면서 모든 감정을 한 사람에게 쏟아야 한다는 점은 난센스인지 모른다. 과격하게 말하면 그건 감정적인 파시즘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이 점을 알고 있지만 상대방에게 헌신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또는 이제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 때문에, 또는 또 다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귀찮다는 이유 때문에, 또는 사랑하지는 않지만 이게 편하다는 습관 때문에, 한 사람과의 관계에만 묶여 있다. 그렇게 우리는 무미건조한 물건이 된다.

인간의 감정은 하나의 관계만으로 담아낼 수 없을 만큼 다채롭고, 그 감정의 변화무쌍함을 받아들일 때, 삶도 사랑도 좀 더 정직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녀와 나는 영화를 보고 나온 후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녀가 하는 말..
"근데 형일아.. 나는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너까지 그러면 안돼."

ㅋ..
이게 영화밖 현실 속의 사랑이다.

새로운 사랑의 무수한 감정이 가져올 일상의 해체와 재구성까지 우리는 감내할 수 있을까?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며 평행을 유지하는 두 줄의 전선을 넘어설 때 사랑은 좀 더 행복한 것일까?  오직 한 사람만 넘어선다면 여전히 두 줄의 전선 위를 오가는 또 하나의 사랑은 너무 쓸쓸하지 않을까? 

결국 사랑의 무수한 감정을 대하는 우리의 시선과 실천과 대답은
상황과 조건에 대상에 따라 아마 천만개쯤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이 가을..
그게 두 줄의 전선이든, 세 줄의 전선이든, 한 개 반의 전선이든....
사랑하자. 사랑하자. 사랑하자.
주눅들지 말고, 스스로 경계짓지 말고, 판단하지 말고, 대범하게 긍정의 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