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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내 맘대로 감상문

9월 27일. 비록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지난 주말 그녀와 주명덕 사진전을 다녀왔다. “비록 아무것도 없을 지라도”라는 부제가 붙은 사진전.. 폐허가 된 공간 속에서 바깥으로 툭 불거져나온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을 발견했다. 전시된 사진보다 전시되지 않은 사진들이 좀 더 날것의 느낌으로 마음을 울렸다. 홀트 고아원에서 작가가 캐어낸 어린 눈빛들, 설움과 그리움과 쓸쓸함이 도드라지게 베여있는 한국의 풍경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혼혈이라 불리는 아이들. 그 아이들 표정 밑에 담긴 문장들이었다.
“섞여진 이름들... 나에게 감정이 없노라고 나에게 웃음과 눈물이 없노라고 세상은 단정짓지 마십시오. 벌써 당신네들이 우리를 생각해 주고 나의 감정들을 받아들여주기 훨씬 그 이전에, 나는, 우리들은 웃음과 눈물의 표현을 목으로 넘겨 버렸습니다.”

작가가 사진으로 잡아낸 혼혈아의 표정은 그 자체로 분열된 정체성의 표상이었다. 이방인, 소수자, 주변인에 대한 당신네들의 배타 의식이 초래한 나의 소외, 절망이었다. 사진은 영혼을 잡아내는 순간포착과 날것의 감수성을 포착하는 클로즈업을 통해 이들의 비극적 내면성을 들춰내고 ‘우리들에’ 대한 ‘당신들의’ 시선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

이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내 얼굴과 내 시선을 생각했다. 내 얼굴에 혼혈아의 표정이 베어있지 않다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으며, 내 시선에 '당신들의' 무책임하고 비인간적인 색깔이 묻어있지 않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주명덕 사진전은 "비록 아무것도 없을 지라도" 인간 실존의 비극을 일깨운다. 흐릿한 배경 속에서 가냘픈 소년이 나를 응시한다. 헝클어진 머리, 크게 뜬 눈, 벌어진 입술은 너무나 순박하지만 한없이 공허하고 공허하다. 사진 속에는 사진 밖을 움직이고 흐르고 떠도는 슬픔이 너무 확연하게 포착되어 있다. 텅 빈 눈망울이 간직한 무한한 공허, 저 입속에 담긴 거대한 어둠. 우리 삶의 공허함과 어둠과 슬픔은 도대체 어느 정도 깊이이며 어느 정도 높이이란 말인가?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움은 거기에서 꽃피운다. 현실의 사회적 모순이 개인의 존재론적인 아픔과 결합할 때. 혼혈 소년의 역사적·사회적 비극이 우리 자신의 실존적 고통으로 다가오는 순간에. 주명덕 사진전을 보면서, 무엇이든 과장되게 내세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 그게 가장 멋지다는 그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녀와 함께 이 사진전을 관람한 것은 꽤 의미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인간에 대해, 사회에 대해 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공유, 그 시각이 꽤 인간적이고 따뜻하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이 세상 곳곳에 널려있는 공허한 표정과 우리 스스로의 일상 속에 담겨있는 무미건조한 표정을 아파도 외면하지 말아야겠다는 어떤 인식.
 
사실 사랑은 별게 아닐지도 모른다. 함께 고민하고,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세상과 소통하고, 싸워나가는 동지, 함께 사진전을 가고, 함께 TV를 보고, 함께 산책을 하고, 함께 밥을 먹는 친구. 어쩌면 사랑이란 처음의 애틋함, 설렘, 그리움, 사무치는 감정의 터널을 벗어나면, 그 다음에 남는 고갱이는 이런게 아닌가 싶다. 이 일상적인 것이 공유가 안 된다면, 또는 이 일상적인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사랑은 외로워진다. 공허해진다. 외로워진다. 

떠난 사랑은 그것이 어떤 맥락이든 아프고 그립다. 그래서 아름답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은 그것이 어떤 이유에서든 서럽고 외롭다. 그래서 아름답다 
존재하는 사랑은 그것이 어떤 빛깔이든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서 불안하다.  

비록 아무 것도 아닐지라도 존재하는 사랑은 그래서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니깐. 내세우지 않으니깐. 그대로 삶과 관계를 보여주니깐...

36살의 여름. 다시 사랑이 문제였다.
계절이 바뀌고 지난 여름을 돌아보니, 사랑이 여전히 문제라는 것에 감사하게 된다.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 아무 것도 아닌 사랑 속에서, 일상 속에서 나는, 너는 살아간다.
그리고 그 아무 것도 아닌 것때문에 싸우기도 한다.
그래서 인생은 늘 비루하고 쓸쓸한지도 모르겠다.

아무 것도 아닌 일상이 툭 불거져나와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을 남긴 지난 시간..
내 가슴에, 그리고 네 가슴에 작은 상처와 아픔을 남겼지만...
그래서 아름다웠다고, 기록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