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격암이라는 분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박원순 선생님에 대한 글입니다.
이 글을 읽은 박원순 선생님께서 자기보다 자기를 더 잘 서술했다하여 자신의 블로그에 링크 시켜 놓은 글이기도 합니다. 원순c가 궁금하신분들은 조금 길지만 감상해보세요.
출처 : http://blog.daum.net/irepublic/7888008
희망을 심다는 박원순을 지승호가 인터뷰하면서 박원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박원순이란 누구인지, 무엇이 박원순을 박원순이게 하는지 하는 질문을 가지고 책을 읽었다. 개인으로서의 박원순이 좋고 나쁨을 말하는 수준이전에 박원순이라는 사람이 한국 사회에서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 박원순이 다른 사람과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 보는 것, 박원순의 행동방식이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이 시대의 한국과 우리 각 개인의 현재를 비춰보는 거울이 될수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는 독후감을 쓴다면 분명 바가바드기타의 내용을 가지고 써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힌두교의 경전인 바가바드기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현실에서 전쟁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아르주나에게 비슈뉴신의 화신인 크리슈나는 이렇게 말한다. 평화로운 깨달음에 도달하는 길에는 두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지식 혹은 이론의 길이고 또 하나는 실천의 길이다. 어느 길로 가건 간에 모두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으며 같은 것이지만 크리슈나는 실천의 길을 이론의 길보다 권장한다.
비슷한 이유로 떠오르게 되는 것에는 양명학의 지행일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양명학에서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즉 행하지 않는 것은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난 알지만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착각이다. 사실은 그런 건 모르는 것이다.
이런 종교나 철학적인 이야기로 책 소개를 시작하는 것은 이 책에서 가장 핵심이라고 생각되어지는 부분이 바로 우리는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 혹은 한국사회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박원순은 시민운동가다. 시민운동가는 한국사회를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노력은 당연히 여러가지 시스템을 바꾸는 일과 관련이 있지만 그 원천으로 가면 결국 한국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하고 바꿀수 있는가하는 질문이되고 만다.
예를 들어 박원순은 중고물품을 파는 아름다운 가게도 단순히 중고물품을 거래한다는 차원을 넘어 철학과 문화의 문제라고 말한다. 즉 낡고 오래된 것도 가치가 있다라는 생각을 퍼뜨리는 것이 아름다운 가게를 하는 주요목적이라는 것이다.
나를 바꾸는일 혹은 한국 사람을 바꾸는 일을 어떻게 할까? 박원순은 한국에는 총론은 너무 많은데 각론이 없다고 말한다. 즉 거대담론은 많은데 생활의 작은 사안 하나하나에 직접 부딪혀서 생각하지 않으며 개선책은 전부 현장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에 가면 답은 나온다는 것이다.
반면에 한국사회에서 많은 사람들 특히 진보의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개념적 분석을 하는데 보다 중점을 둔다. 박원순의 시각은 -그리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좌니 우니 하고 구분하는것에 대해 비판한 것처럼- 그런 방식도 필요하겠지만 현장으로 가서 많은 것을 보고 해결책을 고민하는 쪽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더 길게 이야기하기 전에 박원순이 어떤 사람인가를 좀더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를 진전시키는 쪽이 바람직하겠다. 박원순은 누구인가. 박원순은 소위 KS 즉 경기고 서울대를 나온 사람이며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이며 인권변호사를 거치고 참여연대를 만들어서 한국 시민운동의 새장을 연 사람이기도 하다. 그 이후 아름다운 가게, 아름다운 재단, 희망제작소 등 여러가지 단체를 만들었거나 운영하고 있다. 그들이 이룩한 업적은 눈이 부시지만 굳이 그걸 여기서 소개할 필요는 없으리라.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모두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주류사회의 회원이 되면서도 아웃사이더 즉 소수자의 길을 걸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에 가기는 했지만 그는 불과 4개월밖에는 그 좋다는 서울대를 다니지 못한다.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정말 대단한 생각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해야겠다는 이유로 단순 참가했는데 4개월이나 감옥에 구속되었고 그 이후 복학도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그는 학교에 다니지 않으면서 사법고시를 준비해서 결국 사법고시를 통과하고 검사가 된다.
그가 검사가 된 일은 분명 수렁에 빠진 사람이 거기를 기적적으로 탈출해 나온 사건이라고 할 수도 있다. 친구는 학교에 가는데 가난에 찌든 자신은 혼자 공부하는 현실은 객관적으로 어두운 것이다. 사법고시를 통과한 일은 이제 그 엘리트 코스에서 밀려난 사람이 확실히 다시 그 코스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좋다는 검사일도 1년을 겨우 채우고 그만둔다. 조직의 논리에 휘둘리기 싫었기 때문이다. 변호사를 시작했지만 그는 다시 인권변호사라는 돈 안되는 쪽의 일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인권변호사로써 그는 대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린 중요한 시국사건의 변호사 역할을 했기 때문에 1987년의 6월항쟁이 어떤 사회적 변화를 일으킨 '혁명'이었다면 그는 그 혁명의 대주주중의 하나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한자리 차지하는 것이 손쉬웠을 것이다. 모든 정부가 그를 부르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박원순은 다시 잘나가는 길을 버리고 소수자의 길을 간다. 그는 영국이며 미국으로 공부하러 떠나서는 2년 후 돌아와 시민운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머리가 몽땅 빠질만큼 고생했다는 그의 도전은 성공해서 시민연대는 눈부신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그는 다시 거기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계속 다른 단체를 만들고 시도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그의 삶을 보면서 참 존경할 만한 분이다, 나도 이분처럼 살아야 겠다라고 생각하는데서 멈추는 것은 거의 도움이 되질 않는다. 박원순의 어느 부분을 우리는 배우겠다는 것인가. 그것이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예를 들어 우리는 모두 사법고시를 봐서 인권변호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모두가 박원순처럼 그렇게 시험에 달인이 될 수 있는가? 박원순은 감옥에 갔던 경험이 아주 중요했다고 말한다. 좀 더 감옥에 가질 못해서 아쉽다고 까지 말한다. 박원순은 과로사하는 게 꿈이라고 말할 정도의 일중독이고 스스로 가정은 완전히 포기했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 감옥에 가야할까. 모두 가족을 포기해야 할까. 그건 아닐 것이다. 그건 당연히 아니고 우리는 당연히 뭐뭐뭐를 배워야지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 부분에서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각각의 사람들은 당연히 뭐뭐뭐는 그대로 배울 수 없고 뭐뭐뭐를 배워야지 하고 다르게 생각한다. 어느 사람이 옳은가?
박원순에 대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박원순이 고졸이라는 사실이다. 서울대에 들어갔지만 불과 4개월밖에는 다니지 못하고 대학생활이 끝났으니까. 전에도 쓴적이 있는데 내가 존경하는 대통령 김대중과 노무현 모두 고졸이다. 노무현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독학으로 사법고시를 통과했고 김대중은 오랜 감옥생활을 통해 지식을 쌓았다. 박원순은 감옥에 간 경험이 너무 소중했다면서 조금더 오래 감옥에 갔었으면 하고 아쉬워 한다. 감옥에서 시달타를 읽고 도통한 느낌을 가지기도 했다고 말한다. 이 시대에 제대로된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는 혹시 고졸에 꼭 감옥에 다녀온 사람이어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든다.
내 생각에는 이러한 예들은 우리나라라는 환경이 얼마나 진정한 지식인이 되는데 나쁜가를 잘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입산수도하듯이 자신을 완전히 외부와 차단하고 감옥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혼자서 생각하고 고민하고 하는 시절을 보내 자신을 지킬 능력을 키운 사람이 아니면 그 환경에서 들어오는 독을 막아내기 어려운 것이 아닐까.
독립적으로 사고 행동하는 능력을 키운다는 점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금은 사람들이 독립적으로 사고하는가. 혹시 우 몰려다니면서 유행에 따르고 남의 말에 흔들려서 부동산 투기도 그렇게 해서 일어나는거 아닌가.
박원순과 노무현은 무척이나 겹치는 부분이 많다고 나는 느낀다. 둘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끈떨어진 신세가 되었다가 인권변호사가 된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노무현은 정치인의 길을 걸었고 박원순은 시민운동가가 되었다는 점이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어 시스템을 위에서 고치면, 스스로 시스템의 관리자가 되면 세상이 바뀔거라고 생각했지만 임기를 마치고 봉하마을을 가꾸면서는 오히려 박원순의 길을 지지하는 것처럼 바뀐다. 즉 위에서 바꾸려고 해봐야 세상이 잘 안바뀌더라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다는 계몽주의의 실수라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원순이 말하는 것처럼 삶의 현장 하나하나에서 예를 들어 살기좋은 농촌을 구체적으로 하나 만들어 냄으로서 세상은 바뀌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 것같다.
박원순과 노무현은 김대중이 그러했듯이 실용주의자, 진정한 실용주의자다. 즉 가방끈 긴 사람이 그렇게 하듯이 이름이나 개념에 연연하지 않고 개개의 상황에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한다. 지식이나 개념에 휘둘리기 보다는 그것을 도구로써만 활용한다. 그러면서도 그 인생의 괘적이 보여주듯이 그들은 인간을 중히 생각하는 인본주의자로서의 가치를 삶으로 실천한다. 이 부분이 빠지면 이름이나 개념에 연연하지 않는다는게 결국 배금주의가 되고 만다. 그건 실용주의라고 불러줄수 없는 저급한 것이다.
그들의 성공도 그들의 문제도 실은 어느 정도 그 부분에 달려 있다. 우리는 다시 이글의 처음에서 논한 문제로 돌아가야 한다. 박원순이나 노무현이나 김대중은 어떤 식으로건 득도한 사람이라고 치자. 득도라는게 사이비 표현처럼 들린다면 -설마 내가 그들이 무슨 호풍환우하는 도사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분은 없으리라- 나름의 가치관을 정립했다는 표현정도로 순화할 수도 있다.
문제는 한국사회는 다수의 한국시민들이 깨어있게 되고 보다 포용력있는 가치관을 가져야 좋은 사회가 될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꿀수 있는가 우리는 스스로를, 다른 한국 사람들을 어떻게 바꿀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박원순식의 해법은 이렇다. 그냥 죽을만큼 실천하라. 실천하고 실천하고 실천하면서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있는데 그러다보면 철학이 바뀌게 된다. 낡은 물건을 소비하는 것의 철학적 의미를 알고서 그렇게 한다기 보다는 낡은 물건을 쓰다보면 낡은 물건을 소비하는 것의 가치를 몸에 받아들이게 된다. 기부를 좀 하다보면 기부의 철학과 가치를 알게 된다. 지역공동체를 살리는 아이디어를 실천하다보면 지역공동체의 철학을 알게 된다.
박원순이 선사라면 제자를 무지막지하게 굴렸을 것 같다. 돌밭을 끝도 없이 개간하게 하거나 끝없이 청소를 시키거나 하면서 이러다보면 다 깨달아. 깨달음이 오지 않으면 더 굴러. 이랬을 것 같다. 실제로 박원순은 스스로 자신은 시민단체의 간사들을 무척이나 죄여대는 완벽주의자라고 말을 한다. 일을 확실히 배우라고 말한다. 죽을 만큼 집중해서 일하는 자세가 아니면 배우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는 왠만큼 선다고 싶으면 그냥 길바닥에 놔둬버린다. 즉 스스로가 세운 단체와 결별하고 간사들에게 죽던 살던 너희들이 해라고 하는 것이다.
독립적 사고를 하는 인간 혹은 박원순식으로 말해 창의적 인간이 되는 것이 중요하고 그 다음에는 무지막지한 실천으로 깨달음에 접근하는 것이 박원순식이다. 물론 박원순이 자신의 일을 이런 식으로 표현할지 안할지는 모르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렇다. 즉 무지막지하게 벽에 부딪히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 자체는 수단이다. 깨달음에 도달하지 않으면 큰 의미가 없다. 말하자면 가치판단에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박원순을 따라했다가 그 껍데기만 흉내내는데 멈추는 사람들은 그냥 자기 인생 망치는데서 멈췄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충분히 망치질 못했달까. 박원순이 좋은 재능과 넓은 독서와 감옥에도 가고 완전 희망이 없는 곳에서 기어올라오는 절박함을 가지고 부딛혀서 배운 것을 어영부영 흉내내는것은 바보짓이다. 감옥은 안가더라도 한 3년쯤 세계여행을 홀로하는 정도의 고독함은 가져야 할지 모른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용단을 가지고도 운이 있고 재능이 있어야 박원순처럼 될것이다. 사회적 성공을 말하는게 아니다. 박원순의 창의력이나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게 있다고 해도 사회적으로는 성공 못할수도 있다.
이런 박원순을 가르켜 강준만은 박원순 모델은 박원순이 없으면 성공할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강준만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 평가와 더불어 박원순은 개량주의자라던가 재벌과 손을 잡고 어떻게 지역사회를 조직해 낼 수 있겠는가라는 비판을 받는 것 등에는 모두 같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박원순같은 실천가가 아니라 이론가들이다. 부분적으로 그들의 비판은 부당하다. 그들은 그들이 수단으로 써야 마땅한 개념에 휘둘리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한국사회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견제와 싸움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거나 재벌회사와 시민사회라는 이름을 통해 세상을 보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개념에 휘둘린다는 것은 예를 들어 삼성은 재벌회사라는 구분이나 이건희는 재벌회사의 총수라는 구분에만 휘둘리는 것이다. 세상을 이분접적으로 보는 사람들일수록 박원순같은 사람을 강하게 위선자나 배신자로 느낀다.
그러나 삼성도 이건희도 다른 여러 면이 있다. 따라서 사안에 따라서는 다른 접근이 있을수도 있다. 박원순은 바로 그런 접근을 택하는데 실은 이 실용주의적 접근이란게 회색지대를 헤매는 것이다. 세상을 흑백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그길은 위험천만한 길, 배신자의 길처럼 보이게 되며 실제로 자기중심을 유지할 능력이 안되는 사람이 갔다가는 어디로 끌려갈지 모르는 길이 사실이기도 하다. 노무현도 박원순도 다 그런 비판을 받는다.
나는 이론가들이 박원순을 비판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해 물론 박원순은 그 부분은 나를 비판할 것이 아니라 이론가들이 자기역할을 제대로 해야 할일이다라고 답할 것이지만 말이다. 모든 노무현의 지지자가 노무현이 아니듯 박원순과 함께 일하는 사람도 박원순이 아니다. 실용주의는 메뉴얼화 할수 없고 이론화가 되질 않는다.
이 문제는 시민단체나 공동체운동, 생협의 조직과 운영에도 깊은 관련이 있다. 도대체 매 단계 어떻게 행동해야 할것인가? 잘 구분된 이론 혹은 이념에 따라? 아니면 박원순이 없으면 그저 기회주의자의 길이 될것 같은 이론화 안되는 실천의 길을 따라? 아무튼 결과만을 보자면 박원순이 가장 성공한 시민운동가로 평가받는다는 점을 무시할수 없을 것이다.
박원순은 조금씩 젖어 들어가듯 사람이 바뀌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예전처럼 학생 운동하던 사람이 시민 운동쪽으로 오는 일이 끊겼으므로 조금씩 조금씩 참여하게 하는 방식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런 식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람이 진정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절박함과 단호함이 있어야 한다.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삶의 절박성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일이다. 그것은 문학작품일수도 있고 철학책일수도 한사람의 삶 자체일수도 있지만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은 아주 절박한 위험에 빠져있다. 당신은 움직여야만 한다라고 말해주고 그렇게 느끼게 하는 일, 박원순같은 대단한 행동가가 세상에 만들어 내는 무수한 자료를 하나로 꽤뚫어 내는 일. 그런게 필요하다. 그러나 박원순을 보면서 긴장감을 느끼고 절박함을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박원순이 김을 뺀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다. 박원순은 충분히 절박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의 사람 좋은 웃음만을 본다. 그는 근심없이 편안함 사람이라는 식으로 이미지를 가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박원순 혼자서 세상을 구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해야 할 의무도 없다. 역할을 말하자면 삶의 현장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개념놀이만 할뿐 충분히 절박하게 이론을 파고들어 성과를 내지 못한 이론가들이 실은 더 큰 비판을 받아야 할것이다.
무엇이 박원순을 박원순이게 하는가. 무엇이 그에게 열정을 주는가. 박원순 스스로가 나는 실천가라고 말한다. 그는 실천하고 행동함으로서 행복감을 느끼기에 그렇게 사는 사람이다. 이론적 정리에 대한 욕구를 느끼지만 결국 진짜는 실천 속에서 나온다고 느낀다. 결국 어떤 목표를 위해서 실천한다기 보다는 실천자체가 그 목적이 된다. 실천의 결과이상으로 실천의 삶이 주는 내적 충만감이 그를 끝없는 실천으로 내모는 것이 아닐까.
이 글이 박원순을 모독하는 것으로 들릴지, 박원순을 극찬한것으로 들릴지 나는 모른다. 어느 쪽으로 들리건 둘다 내 의도가 아니다. 나는 박원순의 삶이라는 것을 기반으로 개인과 우리사회의 현실을 보는 기회로 삼고 싶었다. 우리가 배워야 한다면 뭘 배워야 하고 무엇이 우리에게 결여되어 있는지를 생각하고 말하는 기회로 삼고 싶었다. 박원순 개인의 성공과 실패는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의 것이건 여전히 각 개인이 직접 판단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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