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 제대로 책을 읽지 못하고 있다. 아주 바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지키기로 했던 약속들이 자꾸 뒤로 미뤄진다.
어제 아침 오랜만에 북한산에 올랐다. 등산이 아니라 운동이었다. 나와 선배는 산을 뛰다시피 올랐고, 그보다 빠른 속도로 내려왔다.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시작하여, 칼바위능선을 지나, 백운대 근처까지 정신없이 올랐고, 완만하지만 긴 진달래 능선을 단거리 선수처럼 뛰어 내려왔다. 중간에 몇 번 바위에 걸터 앉아 쪼잔해 보이는 서울을 내려보며 보온통에 담긴 물을 마시기도 했지만, 이 휴식은 펄떡거리는 심장의 박동을 아주 살짝 움켜지는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산을 꼭 이렇게 힘겹게 오를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이렇게 오르지 않을 이유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의도다. 뭔가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내가 뚱뚱하고 무겁다고 느낄 때, 등산이 아니라 운동으로 산을 오르는 게 제격이다. 발이 휘청거리고, 숨이 콧구멍까지 차 오르며, 땀이 온 몸을 흠뻑 적실 때, 뚱뚱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쑥 빠져나오는 기분이다. 나는 가끔씩 이런 기분을 원하게 되고, 그럴때면 북한산을 오르거나, 한강을 달린다. 어제 등산은 애시당초 그것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앞장선 선배의 발걸음은 빨랐고, 그것을 따라가다 보니 무거운 무언가가 빠져나간 기분이다. 그 기분이 시원하고 상쾌했다. 산을 내려올쯤 가벼워진 몸을 느끼면서,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면 오버일까? 오버지만 정말 그런 느낌이었다.
2.
선배와 헤어져 학교 연구실이 있는 관악산으로 가는 버스, 가방에서 2010 이상문학상 수상집을 발견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박민규 소설가의 글들을 한 자 한 자 읽어갔다. 20대 후반, 나를 열광케 만들었던 그가 벌써 40대의 나이가 되었다는 것에 한 번 놀랐고, 내가 그를 잊고 있던 그 시간에도 그는 인간이기 때문에 골방에 틀어박혀 죽어라 공부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휠체어에 앉아 죽어라 글을 썼다는 이야기에 두 번 놀랐다. 그리고 만난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박민규의 <아침의 문>. 이 단편은 자살에 실패한 나와 원치 않은 아이를 임신한 그녀의 이야기다.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
나는 다시 죽기 위해 목을 메고, 그녀는 옥상에 올라가 아이를 낳는다. 순간 서로를 목격하는 남자와 여자, 남자는 목을 메달고 선 채 아이를 죽이려는 그녀에게 소리 지른다. “야!” 그러자 목을 메달고 선 한 명의 남자에게 그녀는 반문한다. “뭐?”
이 지점에서 난 헉,하며 숨이 막혔다. 그는 단 두 마디로, 그가 살면서 공부하고 고민한 인간과 소통,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에 답한다. 이런 젠장. 졸라 멋지다.
멋진 것 하나 더! 학교에 거의 도착할 무렵 읽은 그의 수상 소감은 내가 본 수상 소감 중 가장 건방지고, 치열하다.
“그저 한 편의 단편을 썼을 뿐이다. 늘 해오던 일이고 늘 해나갈 일이다. 무슨 상관이야? 아무 일도 아니라고 본능은 속삭인다. 어는 누구의 말보다도 나는 스스로의 본능을 믿고 따르는 인간이다. 머릿속에서 빨리 지워버려. 습관을 흩트리지 말라고.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지 말라고... 본능은 늘 나에게 충고한다. 아무 일 없어... 그래서 읽고, 쓸 수 있는 한 토막의 시간을 오늘도 얻는 것이라고 속삭인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수긍한다. 편안해진다. 초유의 폭설이 쏟아지던 밤 통보를 받았다. 어쩔 수 없이 다음 날 아침에도 문을 열고 나서야 했던 당신에게 막막하고 급급한 당신에게 즉 살아있는 답도, 견적도 없이 살아가야만 하는 모두에게 이 영광을 바친다. 살아주셔서 감사하다. 감사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쓰겠다. 할 수 있는 말도 하고 싶은 말도 나로선 그게 전부란 생각이다.” (박민규 수상소감)
뚱뚱한 무언가가 쑥 빠져 나온 이후, 오랜만에 박민규를 만난 것은 인연일까, 우연일까, 운명일까... 반갑다. 박민규! 나도 열심히 공부하마. 나두 인간이거덩.. 북한산을 오르고 박민규를 만난 지난 일요일, 꽤 괜찮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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