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꿈을 꾸다 훌쩍 거리는 경우가 있다. 사랑하는 그녀가 죽거나, 그놈이 죽거나... 영락없이 이런 꿈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울다 잠이 깬다. 그리고 죽음이 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묘한 안도감에 사로잡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이렇게 중얼거린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꿈이었군요.’
그리고 다시 잠이 들고, 다시 죽음을 잊는다.
죽음. 누구나 피해갈 수 없지만, 아무도 인정하기 싫은 것.
결국 모두가 모두를 잃지만 우리는 그 상실을 고려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아내가, 사랑하는 친구가 죽게 된다는 것. 이것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현실을 가정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럼으로서 개인의 역사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후회하거나, 통곡하거나... 그리고 그 후회와 통곡의 저변에는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한 것, 즉 소통의 결여가 깔려있다.
이 책은 유쾌하지만 아프다. 유쾌한 것은 작가가 만들어 낸 오스카라는 아이의 재치 때문이요, 아픈 것은 9·11 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오스카가 이별과 상실의 아픔에서 벗어나고자 아버지의 흔적을 좇는 과정을 그리기 때문이다. 죽은 아버지의 유품에서 찾아낸 수수께끼의 열쇠, 그 열쇠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블랙'이라는 성씨를 가진 이를 찾아 뉴욕 시내를 순례하는 오스카의 여정은 얼핏 무모해 보이지만, 오스카 자신에게는 그 무엇보다 절박한 의미를 지닌다.
"일 년이 지났어도 나는 여전히 무슨 이유에서인지 샤워를 하기가 엄청나게 어려웠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일은 더더욱 그랬다. 현수교, 세균, 비행기, 불꽃놀이, 지하철의 아랍인들(나는 인종주의자가 아닌데도), 레스토랑이나 커피숍 등 공공장소의 아랍인들, 비계, 하수구, 지하철 격자창, 주인 없는 가방, 신발, 콧수염을 기른 사람들, 연기, 매듭, 높은 건물, 터번, 나를 공포에 빠뜨리는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p 59)
그럴 것이다. 9·11 테러의 희생자들, 그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남은 것은 사람과 공간과 시간에 대한 공포다. 공포는 또 다른 공포와 포개지면서 괴물이 된다. 내 안의 괴물이라는 것, 알고보면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9.11 테러의 상처가 돈과 시간으로 복원된다 할지라도, 개인의 상처는 그런 수준으로 회복되는 게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9.11테러를 원망하거나, 사회적 폭력이 잘못되었다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이 주목하는 것은 사회적, 구조적 폭력과 모순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하는 개인의 삶이며, 이 소설이 펼쳐내는 시선은 인간의 나약함에 대한 연민이며, 궁극적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대한 투쟁일 수밖에 없는 인생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다.
오스카는 사건이 있던 날, 전화기에 남겨진 아버지의 네 개의 메시지를 듣는다. 비행기와 충돌한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있던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남긴 마지막 음성이었다. 네 개의 메시지를 다 듣고 난 직후 아버지의 전화가 다시 걸려오는데, 어쩐 일인지 오스카는 전화를 받을 수가 없다. 몸이 얼어붙었다. 1분 27초 동안, 사람들의 비명과 울부짖음, 유리 깨지는 소리를 배경으로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긴박한 목소리가 메아리쳤음에도 오스카는 전화를 받지 못했고, 침대 밑에 숨어있었으며, 결국 건물이 무너지는 순간 전화 역시 끊긴다. 그는 이 사실을 다른 가족, 특히 엄마에게는 비밀로 한다.
“너 거기 있니? 거기 있니? 거기 있어? 너”
오스카는 아버지의 음성에 대답하지 못했고, 이것을 숨겼으며, 그래서 놓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기억을, 미안함을...
이 소설에서 담아내는 삶의 아픔과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은 오스카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오스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이야기에도 뻗쳐 있다. 1963년,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의 아이에게'라는 제목으로 쓰기 시작한 할아버지의 편지는 2차대전 당시 독일 드레스덴에서 겪은 폭격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를 증언한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던 사랑하는 여자를 폭격으로 잃고 미국으로 건너와 그 여자의 동생과 결혼한 할아버지는 결국 아들의 탄생을 지켜보지 못하고 독일로 떠났다가 아들이 죽은 뒤에야 귀환한다. 그는 왜 할머니를 떠나야 했을까?
네 할머니와 나는 과거의 이야기를 일절 입에 올리지 않았단다. 그건 규칙이야. 네 할머니가 욕실을 사용할 때면 난 문 쪽으로 가고 내가 글을 쓸 때는 네 어머니가 절대 어깨너머로 그걸 보지 않는다... 우리는 팔을 활짝 벌리고 제자리를 맴돌았을 뿐, 서로를 향하지는 못했지, 우리의 팔은 멀찍이 떨어져 있었어. 우리 사이에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규칙들밖에는 없었지. 모든 것이 치수였어. 밀리미터의, 규칙들의 결혼. (p154)
사랑이라는 단어의 양쪽 끝을 누르면서 손가락을 멈췄어. 손가락을 멈추고 그 자리에 머물게 했다. 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 무엇을 이해했는지 모르고, 무엇을 이해하지 않으려고 했는지 모른다. 나는 몸을 돌려 그녀를 떠나왔어. 돌아보지 않았다. (p187)
사랑하는 연인이 죽었고, 사랑하는 언니가 죽었다.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연인의 동생과 결혼했고, 동생은 사랑하는 언니의 남자친구와 결혼했다. 그런데? 이 둘의 관계는 삐걱거린다. 왜? 애써 침묵한다고 애써 잊어지는 것이 아닌가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에는 폭격으로 죽은 한 여인이 있었고, 그 여인이 남겨놓은 상처는 애써 나누어지지 않았으며 이는 서로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긴다.
결국 소설의 세 화자, 오스카,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반드시 했어야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그것을 정작 말로 표현하지는 못한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서로에게 정말 해야 할 말은 하기 힘든 법이다. 가까운 사람에게는 언제라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늘 말하기를 미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그 말을 할 틈을 우리에게 주지 않고 파국으로 치닫는다.
할머니는 소설 말미에서 손자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너에게 지금까지 전하려 했던 모든 이야기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란다, 오스카. 그 말은 언제나 해야 해. 사랑한다. 할머니가."(439쪽)
그 말은 언제나 해야 해. 사랑한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수 없게 가까운] 소설에서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어찌보면 허탈할 수도 있지만, 이 허탈한 메시지가 남기는 울림은 적지 않다. 난 얼마나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가? 난 얼마나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못해, 그것을 표현하지 못해, 후회하는 삶, 우리는 그 파국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내일 이야기하지 뭐~ 이 퉁 치는 무심함이 나를, 우리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을 잊지 말자. 사랑은 엄청나게 시끄럽게 소통되고 이야기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관계인지도 모른다.
그녀를 다시 만나야만 했어. 왜 그래야만 하는지 나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었지. 그래서 그 욕망은 아름다운 거야.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잘못이 있을 수는 없는 거란다.(p160)
이 욕망에 충실하자. 과거의 상처 때문에, 규율 때문에, 눈치 때문에, 사랑의 욕망을 가두거나 포기하거나 놓치지 말자. 사랑은 어쨌든 표현돼야 아름다운 거다.
'미디어 스쿨 > 독서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3월21일(일) 뚱뚱함을 벗고 아침을 열다 (박민규 아침의 문) (0) | 2010.03.29 |
---|---|
2월 12일 금요일 두 개의 세계 (2) | 2010.02.12 |
2009년 11월 30일 - 풍경의 아름다움은 슬픔에 있다. (0) | 2009.11.30 |
파블로 네루다와 우편배달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1) | 2009.08.07 |
<데비와 줄리> 도리스 레싱 (0) | 2009.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