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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독서일기

테크노폴리에 길담서원 짓기 - 포스트만 [테크노폴리]



1.
 경복궁 근처에 길담서원이라는 곳이 있다. 테크노폴리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문득 이곳이 떠올랐다. 길담서원이 위치한 동네엔 ‘길’과 ‘담’이 어울어져 있다. ‘길’과 ‘담’은 떠남과 머무름, 열림과 닫힘, 비움과 채움이라는 은유가 담겨 있다. 우리는 길을 떠나야 하지만, 언제까지나 길 위에서만 살 수 없다. 담으로 둘러쳐진 안식의 공간이 배면에 깔릴 때, 그곳이 내 정신이 상승하는 근거지가 될 때, 떠남도 의미가 있는 법이다. 담이 없다면 길은 정처없이 헤메고, 방랑하는 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길담서원은 이름 그 자체에서 드러나듯이 옛 서원의 계승을 표방한다. 서원은 선현을 모시고, 인재를 양성하며, 공론을 형성하는 기능을 수행하면서, 각 지역의 정신적 중춧돌로서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길담서원이 서원의 계승을 표방한 것은, 지금 이 시대에도 정신적, 윤리적 근거지가 필요하다는 창립자의 철학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2.
포스트만이 말하는 테크노폴리란, 길이 담의 통제권을 넘어선 사회를 말하며, 길 위에 넘쳐흐르는 정보에 대한 방어체계로서 담이 무너진 사회를 일컫는 것 같다. 테크노폴리가 펼쳐놓은 길 위에는 수많은 정보가 흐른다. 양이 변하면 질도 변한다. 정보의 양이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자, 그것을 생산하고 확장하는 기술은 스스로 신격화되기 시작했으며, 인간은 자신의 주권을 기술에 넘겨줬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일상을 돌아보면, 디지털 기술, 의학 기술, 과학 기술 등 보이는 기술뿐만 아니라 통계학, 여론조사, 교육과정 등 보이지 않는 기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기술은 딱히 필요하지 않는 정보까지 무수히 쏟아내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들은 이 정보들을 좋든 나쁘든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으며, 심지어 제대로 인식조차 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일상화되면서, 기술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한때는 우리의 목적과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였지만, 이들이 인간의 통제권을 벗어나 자율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고, 그럼으로써 세상은 쓸데없는 정보로 넘쳐나기 시작한 것이다. 포스트만은 이것이 테크노폴리의 모습이고, 테크노폴리에서 정보의 홍수에 빠진 인간을 지켜낼 방어체계는 무너졌으며, 담이 무너지자, 길의 주인이 인간에서 기술로 전도되었다고 주장한다.

3.
그의 주장에 100% 동의할 수는 없다. 테크노폴리에서 기술이 인간의 방어체계를 무너뜨리며, 스스로 신격화되고 있다는 주장은 너무 기술결정론적이며, 인간의 방어체계를 너무 허약하게 본 측면도 없지 않다. 때론 인간은 환경의 변화에 무방비로 노출된 것처럼 보이지만, 때론 그것을 지배하겠다는 욕심에 자충수를 두기도 하지만, 인간의 자율성, 변화 가능성, 교정 가능성은 언제든 무너진 방어체계를 복원하게 만드는 씨앗이 된다. 다만 그의 주장을 기반으로, 테크노폴리에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오늘은 한번쯤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기술과 정보의 홍수 속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 사는 나는 제대로 방어체계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부재하다면 방어체계를 구축하기 위한 방법론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 나는 이곳에 있으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좋든 싫든 수많은 정보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 방어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결국 질문은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표로 회귀한다. 방어체계란 삶을 관통하는 철학과 가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떤 정보를 취할 것인가?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이야기를 상상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개별적이지만, 포스트만은 개별적인 답을 찾아가는 방법으로서, ‘이론’의 구축을 강조한다. 이론은 정보의 중요성을 판단하는 기준에 명확성을 부여하고, 정보를 조직화하고, 저울질하고, 배제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론이란 세상을 이해하는 자신의 관점이자, 세상을 살아가는 자기 이유, 그리고 내일에 대한 주체적 전망의 또 다른 말일 것이다. 이것이 명료할 때 누구와 관계맺고, 어떤 정보를 취사선택하며, 어떤 내일을 상상할지가 분명해진다고, 그는 지적한다.

4.
이론은 개별적이지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바가 있다. 테크노폴리의 주된 논리인 효율성과 실용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포스트만은 효율성을 넘어선 도덕적 실체, 영성, 초월적 서사, 책임감을 강조한다. 이것이 부재하다면, 개인은 테크노폴리의 세 가지 주요 도구 - 효율성이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관료주의, 특화된 영역을 제외한 분야에서는 무지하고, 무관심한 전문기술, 그리고 추상적이고 다면적인 가치를 기술적이고 구체적인 용어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중요한 내용, 가치를 놓치게 하는 기술기구 -에 포획될 수밖에 없다고 그는 지적한다. 도구를 잘 이용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리고 그것이 이론을 캐어나는 효율적 수단인 것 역시 분명하지만, 그 도구에 주인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기 위해서는, 도구적 효율성을 넘어선 초월적 서사, 윤리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론이라는 것이 소위 과학의 소임으로만 여겨졌던 기존의 생각에 질문을 던진다. 테크노폴리 시대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이론은 어쩌면 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들 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5.
포스트먼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금 내가 자리잡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세미나장도 보이지 않은 기술에 불과하다. 이 공간에서 내가 배우게 되는 것은 ‘개인, 조직, 사회적 관계에서 미디어가 개입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다양한 기존 이론들일 것이다. 이미 많은 이론에 능통한 선생님들께서 수많은 아티클 중 괜찮은 읽을거리들을 쏙쏙 추려주시니, 적어도 이 분야에 있어서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사히 헤엄쳐 살아날 제도화된 방어체계가 마련되어 있다고 볼 수는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유념해야 하는 바는 제도화된 방어체계가 곧 나의 방어체계는 아니라는 것이다. 미디어와 인간, 그리고 사회의 관계를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 이론이 구축되지 않는 이상, 또는 나만의 이론(관점)을 만들겠다는 굳은 결심이 없는 이상, 쏙쏙 추려진 정보조차 그냥 마주치고 흘러가는, 그래서 결국 버려지는 정보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정보가 단순히 넘쳐 흐르기만 하면, 그 정보를 생산하는 보이지 않는 기술로서 이 세미나는 내 삶을 지배해버리는 기술로 신격화된다. 고로 세미나장에서든, 어디서든, 수많은 정보의 흐름 속에 우왕좌왕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것에 휘둘리지 않으며, 나의 길을 갈 수 있는 ‘이론가’가 되는 수밖에 없다. 테크노폴리 시대의 주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나만의 담(이론)을 만들고, 그 담(이론)을 수정하고, 부수고, 새로 짓는 과정. 어쩌면 그것이 수많은 읽을거리가 넘쳐나는 이 세미나의 주인이 되고, 그보다 많은 읽을거리들이 넘쳐나는 대학원 과정을 즐겁게 살아내며, 더 나아가서는 너무도 많은 정보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이 시대의 주인이 되는 유일한 방법론인 듯싶다.

6.
문제는 결국 기술과 정보가 범람하고, 효율성과 실용성이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길 위에 어떻게 담(이론)을 쌓을 수 있느냐다. 포스트만은 ‘사랑으로 무장한 저항 투사’가 되야 한다는 모호하지만 멋진 언어로 어떻게에 답한다. 여기서 ‘사랑으로 무장’하라는 것은 긍정과 희망의 서사와 상징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는 것을, 그리고 ‘저항투사’는 어떤 질문이 어떤 이유로 제기되었는지 알기 전에 여론조사를 믿지 않는 사람, 숫자의 마력을 맹신하지 않는 사람, 사회과학이 상식적 언어와 사상을 유린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사람, 효율성을 최고 가치로 두지 않는 사람, 종교적 서사와 전통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 기술적 창의력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모호하지만 ‘사랑으로 무장한 저항 투사’를 통해 그가 제시하는 답은 기술과 효율에 압도되지 않은 철학과 인문학의 복원인 듯 싶다. 그런 맥락에서 “테크노폴리 시대, 인간과 기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고민하는 커뮤니케이션학은 사회과학의 영역을 넘어설 때, 미래적 전망을 찾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기술과 정보, 효율와 실용이 난무하는 시대에,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고, 그것에 숨겨진 다양한 서사를 이해하지 못한채 자신만의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만든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7.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어쩌면 내가 테크노폴리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길담서원을 떠올린 것은 그것이 ‘사랑으로 무장한 저항 투사’를 길러내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넘나드는 미래적 전망을 암시하는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늘 접속되어 있고, 늘 흐르는 길 위에서 인간의 방어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담’이 필요하다. 그 담은 효율과 과학의 틀을 넘어선 이론을 통해 구축되고, 이 담이 제대로 쌓이기 위해서는 어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오늘의 수많은 서사를 풍부하게 이해하며, 효율성을 넘어선 내일의 가치, 내일의 서사를 상상하는 서원의 복원이 필요하다. 포스트만이 ‘사랑으로 무장한 저항 투사’를 길러낼 교육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원을 어떻게 꾸밀 것인가? 그 서원의 모습은 개별적이고, 내가 설계하고자 하는 길담서원은 여전히 하얀 백지이지만, 적어도 대학원 시절에 이 서원의 구체적 비전, 이론, 방법론을 그려낸다면 그것으로 이 공간은 꽤 가치 있는 길담서원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