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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독서일기

박완서


# 일대기
나는 황해북도 개풍군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서울로 이주했다. 1950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그 해 여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숙부와 오빠를 잃는 등 집안에 비극적인 사건들이 겹치면서 생활고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1953년 직장에서 만난 호영진과 결혼하여 1남 4녀를 두었다. 40대에 접어든 1970년에 《여성동아》 장편 소설 공모전에 〈나목〉(裸木)으로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공모전에 당선될 때 나는 다섯 아이를 둔 40세의 전업주부였다. 이 소설은 전쟁 중 노모와 어린 조카들의 생계를 위해 미군부대 초상화부에서 근무할 때 만난 화가 박수근에 대한 내용이다. <나목>을 비롯해 내 작품들은 전쟁 체험을 바탕으로 분단의 비극을 집요하게 파헤치거나 소시민적 삶과 물질중심주의와 여성억압문제를 그린 내용이 많다. 후기 작품 역시 1988년 병사한 남편을 간호하며 쓴 간병기 형식의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1991)을 비롯해 어린 시절과 전쟁 중 경험을 서술한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2) 등 내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내가 글을 쓴 이유는 아픔을 토해내기 위해서였다. 오빠와 남편과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겪은 개인적인 아픔. 오빠는 6.25 전쟁 때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부상을 입고 돌아와 죽었으며, 이것은 내게 전쟁의 상처이자 문학을 시작한 이유가 되었다. 6.25가 없었으면 나는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힘든 시기를 겪고 남다른 경험을 하면서 이걸 잊지 말고 기억해야겠다, 언젠가는 이걸 쓰리라는 생각을 했다. 1980년대 후반 남편과 아들이 죽은 후에는 천주교를 믿고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1994),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 같은 자전적 소설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1931년 10월 20일 ~ 2011년 1월 22일)


# 이야기
박완서 선생님의 작품엔 바로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 우리 이웃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래서 선생님의 작품은 픽션이면서 논픽션이고, 드라마이면서 다큐멘터리이다. 그는 먼저 비판하지 않는다. 미워하지도 않는다. 그냥 따스한 마음으로 질팍한 오늘을 생생한 비유로 조근조근 그려낼 뿐이다.
난 선생님의 글보다, 세월의 아픔을 따뜻한 웃음으로 견뎌내야만 나올 수 있는 그 분의 인상을 좋아했다. 화려하지 않은 질박함과 소박함, 그녀의 얼굴은 그녀의 삶을 대변했고, 난 그 얼굴을 사랑했다. 세상의 아픔을 대하는 방식에 따라 누군가는 냉소를, 누군가는 웃음을 얻는다. 이렇게 나이 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픔과 상처가 켜켜히 쌓여있는 인생의 끝자락에 내게 남는 것이 이런 웃음이라면, 됐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 좋아하는 문장
“처음엔 나는 왜 내가 그 말 뜻을 알아들었을까 하고 무척 무안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차츰 몸이 더워 오면서 어떤 느낌이 왔다. 아아,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게 왔다. 전신이 마비됐던 환자가 어떤 신비한 자극에 의해 감각이 되돌아오는 일이 있다면, 필시 이렇게 고통스럽게 돌아오리라. 그리고 이렇게 환희롭게. 나는 내 부끄러움의 통증을 감수했고, 자랑을 느꼈다. 나는 마치 내 내부에 불이 켜진 듯이 온몸이 붉게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주위에는 많은 학생들이 출렁이고 그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론 모자라 이런저런 학원 등에서 별의별 지식을 다 배웟을 거다. 그러나 아무도 부끄러움은 안 가르쳤을 거다. 나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펄러덩펄러덩 훨훨 휘날리고 싶다. 아니, 굳이 깃발이 아니라도 좋다. 조그만 손수건이라도 팔랑팔랑 날려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고. 아아,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모처럼 돌아온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삼시 밥 외의 군것질거리와 소일거리를 스스로 산과 들에서 구했다. 삘기,찔레순, 산딸기, 칡뿌리, 메뿌리, 싱아, 밤, 도토리가 지천이었고, 궁금한 입맛뿐 아니라 어른을 기쁘게 하는 일거리도 많았다. 산나물이나 버섯이 그러했다. 특히 항아리 버섯이나 싸리버섯은 어찌나 빨리 돋아나는지 우리가 돌아서면 땅 밑에서 누가 손가락으로 쏘옥 밀어올리는 것 같았다.
시골 애들은 심심해서 어떻게 살까 불쌍하게 여기는건 서울 내기들의 자유지만 내가 심심하다는 의식이 싹트고 거의 짓눌리다시피 한것은 서울로 오고 나서였다. 서울 아이들의 장난감보다 자연의 경이가 훨씬 더 유익한 노리갯감이었다고 말하는 것도 일종의 호들갑일뿐, 그 또한 정말은 아니다. 우리는 그냥 자연의 일부였다.
동그란 유리를 통과한 햇빛이 점점 도타워지고 오므라들면서 꼭 칠흑속에 숨은 고양이 눈깔처럼 요괴롭게 빛나다가 마침내 종이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뿜어올려 구멍을 내고 구멍이 실고추처럼 가늘고 새빨갛게 종이를 먹어들어가는것을 지켜보는 동안 나는 숨이 막히고 배창자가 쪼글쪼글 오그라들면서 오줌이 마려웠다.
개성으로 수학여행 떠나는 날 엄마는 경성역까지 배웅을 나와서 혹시 개성역에 누가 마중을 안 나오더라도 너무 섭섭해하지 말고 잘 놀다 오라고 타이르고 들어갔다. 제발 아무도 안 나왔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꼭 나올것 같아 마음이 영 개운치 않은 채 기차가 개성역을 도착했다. 육학년은 총 다섯반이었다. 개성역 앞 광장에 반끼리 줄을 서서 인원 점검을 할 때였다. '완서야, 완서야.' 하고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소리가 났다. 저만치서 할머니가 무법자처럼 아이들 사이를 마구 헤집고 다니면서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숙모도 아니고 할머니였다. 어찌나 창피한지 잠시 꺼질 수 있는 거라면 꺼지고 싶었다.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그들이 내 눈에 어린에 처럼 자유롭고 귀여워 보였기 때문이다. 나이 든 사람이 티 없는 귀여움으로 인상에 남기는 쉽지 않다. 고서도 남아 있지 않지만 그릇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엄마와 숙모들의 요새말로 스트레스를 풀고 나서 맛본 건강한 즐거움은 죽는 날까지 그분들의 마음 속 어딘가에 남아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많던 상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