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스 레싱이라는 이란 출신의 할머니 작가.
깜짝놀랐다. 어제 우연히 인터넷을 떠돌다 <데비와 줄리>라는 단편소설을 읽게 되었는데, '이거 쓴 사람 누구야?'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녀의 묘사 실력, 소위 스케치 실력은 일품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그 속의 어두운 측면을 직시하는 깊이 역시 대단하다.
1. 가장 앞권이었던 장면 : 줄리라는 소녀가 홀로 창고에서 아이를 낳는 장면
"한 가출 소녀가 홀로 허름한 창고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이 한 문장을 그녀가 끌고가는 솜씨를 감상해 보시길...
줄리는 담요 위에 엎드려 있었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주먹을 움켜쥔 채 울고 있었다. 고통은 끔찍했으나 견딜 만했다. 그녀는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을, 너무도 큰 외로움을 느꼈다. 엉덩이를 공중으로 쳐들고 있는 것은 잘못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벽돌로 된 차가운 벽에 기대어 웅크리고 앉아 계속 땀을 흘리며 신음했다. 그녀는 개가 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물이―아니면 피인가?― 쏟아져 나왔다. 손전등을 켜기가 두려웠다. 개가 자기의 얼굴과 목 냄새를 맡는 것이 느껴졌지만 다시 가버렸다.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너무 캄캄했다. 그러다가 마치 내장이 쏟아져 나오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생각했다. 왜 책에는 물이 이렇게 쏟아진다고는 쓰여 있지 않았나? 그러다가 깨달았다. 아니, 이건 아니구가. 그녀는 손을 밑으로 가져갔다. 그녀가 깔고 있는 담요 위에 젖어서 미끈거리는 덩어리가 있었다. 그녀는 손전등을 더듬어 켰다. 회색빛이 돌고 피투성이인 아기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이제 그녀는 공포에 질렸다. 일이 닥치기 전에는 탯줄을 자르기 전에 기다리기로 작정했었다. 책에 서두를 필요는 없다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기가 죽게 될 경우를 대비해서 빨리 탯줄을 끊어야 했다. 그녀는 아기 몸에서 탯줄이 나오는 곳을 찾았다. 꼬인 밧줄 같은 두꺼운 살이 손 안에서 생명에 차 뜨겁게 맥박치고 있었다. 그녀는 가위를 찾았다. 끈을 찾았다. 생명의 탯줄을 가위로 자르고 두려움에 떨었다. 사방이 피투성이였다. 개가 너무 가까이 와 앉아 잇어서 그녀는 개를 만질 수 있었다. 개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개는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피 때문에 침을 삼키며 입술을 핥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그녀는 불쌍한 개에게 말했다. 이제 그녀는 냄비에 넣고 오래 끓였던 끈으로 태를 잡아땠다. 자신이 뭔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할 수 없어 걱정이 되었다. 끈을 끓인 것도 그랬다. 이 더러운 창고에서 그게 무슨 소용인가. 거지들이 그 장소를 이용했을 테고 저 개가…… 다른 개들도 아마……. 그녀는 다른 여자들도 그 안에서 아기를 낳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부분의 창고는 정원에 붙어 잇고 화초를 심은 화분으로 가득 찬 데다 잠겨 있었다. 너무나 많은 곳을 찾아보았기 때문에 알게 된 것이었다. 어린 여자애들이 평화롭고 조용하게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또는 길 잃은 개가 빗속에서 마른 장소를 찾는다는 것도……. 그녀는 낄낄거리며 우스꽝스러워지고 있었다. 자신이 자제력을 잃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아기는 피 웅덩이 속에 누워 입을 오물거리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무슨 조치든 취해야 했다. 아기는 울어야만 하지 않는가? 아기는 매우 미끈거렸다. 아기가 미끈거리고 젖어 있으며 기름투성이라는 사실은 책에는 전혀 나와 있지 않았었다. 아기를 들어 안기가 무서웠다. 그녀는 쇼핑백에서 수건 뭉치를 끄집어내 편편하게 펴고 그 위에 데비의 부드러운 핑크색 새틴 블라우스를 잘 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아기의 허리를 들어올렸다. 아기의 움찔거림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녀의 손이 너무 차서 그랬을 것이다. 아기의 움찔거리는 힘, 따뜻함, 팔딱이는 생명력에 그녀는 놀라우면서도 기뻤다. 뜻밖에 그녀는 기쁨과 자부심으로 가득 찼다. 아기는 완벽하게 온전하다고 그녀는 손전등으로 아기의 손과 발을 비춰 보며 생각했다. 또 무엇을 찾아 봐야 하는가? 아, 그래, 아기는 여자 아이였다. 아기는 비정상인가? 아기는 주름지로 갈라진 매우 크고 긴 성기를 가지고 있었다. 저런 것이 정상인가? 왜 책에는 그런 말이 없었는가?
그녀는 아기를 수건으로 단단하게 감쌌다. 수건 끝으로 아기의 두 발을 잘 감싸고 얼굴만 내놓았다. 그 다음 아기를 들어 안았다. 아기는 성이 나서 짧게 경련하며 울어댔다. 그러자 공포가 다시 찾아왔다. 그녀는 아기가 그렇게 크게 울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누군가가 올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나 창고를 떠날 수 없었다. 해산 뒤에 쏟아지는 것들, 후산물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물컹한 것이 다시 다리 아래로 쏟아지더니 간처럼 보이는 덩어리가 튀어나왔다. 두껍고 붉은 줄의 끄트머리가 그 속에서 나왔다.
이제 그녀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웅크리고 있다가 일어나서 한 팔로 아기를 감싸 안고 한 손으로는 바닥을 밀치며 몸을 일으켰다. 피 웅덩이 옆에 벌벌 떨며 서서 아기를 높이 그러나 자기 몸 가까이 바짝 안고 두어 발자국 옮겼다. 개가 즉시 자기를 방해하지 말라는 절박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앞으로 기어나왔다. 개는 빠르게 후산물들을 삼켰다. 그리고 기대에 차서 피묻은 담요를 핥고는 길고 더러운 꼬리를 흔들며 잠시 주둥이를 들고 그녀를 보았다. 그 다음 제자리로 돌아가 벽에 등을 기대고 그녀를 응시하며 앉았다. 그러느 동안 아기는 짧고 성난 울음을 터뜨리더니 자기를 감싸고 있는 수건을 맹렬하게 걷어찼다. 줄리는 생각했다. 아기를 그냥 이곳에 두고 달아나? 안 돼, 저 개……. 그러나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자 아기는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쳐다보며 가만히 누워 있다. 아, 그녀는 아기를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아기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곳을 떠나야 했다. 그녀는 피와 물과 오물 범벅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살폈다. 피가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실제로 탐폰 한 두 개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개를 조심하며 그녀는 담요의 깨끗한 부분에 아기를 뉘었다. 아기의 눈은 손전등 불빛 속에서 빛났다. 그녀는 깨끗한 속옷을 입고 생리대를 착용했다. 여분의 패드용으로 손님용 타월을 허리에 둘러매려 했으나 너무 뻣뻣했다. 이제 아기를 안았다. 인디언처럼 보이는 아기는 흐릿한 작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는 쇼핑백을 들고 손전등을 집었다. 그리고 개에게 “불쌍한 개, 미안하다.” 라고 말하고는 개를 위해 문이 열려 있도록 확인하며 밖으로 나갔다. 땅이 울퉁불퉁하고 벽돌과 나무토막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지만 손전등을 껐다. 그래도 앞을 볼 수 있었다. 길 건너 높은 창문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 여전히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떨고 있었다. 아기는 고작 타월로 싸여 있었다……. 타월에 싸인 아기를 이제는 헐렁해진 코트 자락 아래 품은 그녀는 울퉁불퉁한 땅을 가로질러 재빨리 골목으로 들어섰다.
나는 언제쯤 이런 감수성과 관찰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정도의 관찰력은 있어야, 우리 주변의 무언가를 이해한다고, 공감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2. 그녀의 이력
그녀의 이력이 궁금해 <도리스 레싱>으로 검색을 시작했다.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단 말이야!'하는 자화자찬과 함께 그녀의 일대기를 살펴보았는데...
레싱은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에서 태어나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에서 성장했다. 1939년 공무원이던 프랭크 위즈덤과 결혼하는데 안락한 가정생활이 맞지 않다고 느껴 이혼한 후 지방 신문에 단편과 시들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이후 1945년 동료 마르크시스트이던 고트프리드 안톤 레싱과 결혼하지만 역시 이혼하고, 1949년 두 번째 결혼으로 낳은 아들을 데리고 영국 런던으로 떠나게 된다. 이후 영국 공산당에 몸담기도 했으나 1956년 헝가리 혁명이 발생하면서 당을 떠났다.
그녀에게 런던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1957년 어느 글에서 그녀는 이렇게 썼다.
"런던에 온 첫 해, 지금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나에게 런던은…… 일 년 동안은 악몽의 도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빛이 건물을, 나무를, 주홍색 버스들을 친숙하고 아름다운 무언가와 하나가 되게 만들었고, 나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해졌다."
그 이후로 레싱은 런던이라는 도시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예리하면서도 애정 어린 눈길로 관찰해 왔다. 그리하여 런던이라는 연결고리로 묶인 이 작품집에는 카페 테이블, 병원 침상, 택시 뒷좌석, 지하철 등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본 삶의 풍경들이, 그리고 현대인의 삶을 특징짓는 복잡한 인간관계의 단면들이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모자이크 되어 있다.
[출처] 도리스 레싱, 노벨 문학상 수상.|작성자 지니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이만교씨가 술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창작을 꿈꾸는 자들 중에 바보같이 스스로 자학하는 바보가 있다. 상처가 있어야 글을 쓴다나? 그런데 그건 허위의식이다. 그리고 그럴바에야 글을 쓸 필요 없고, 그냥 행복하게 살면 된다. 스스로 상처주지 말 것. 그러나 상처없는 지난 삶이 문학을 창작을 꿈꾸는 자에게 한계이자 컴플렉스임을 인정하고 응시하는 것은 필요하다. 이건 실존적으로 정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내 삶은 정말 상처가 없는 것일까? 이런 고민은 있어야 한다. 거기서부터 글도 창작도 시작된다."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박찬일 시인은 문학도를 넘어 최고의 인간, 계급, 불행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어디엔가 기재했다.
2007년 노벨상 수상 작가 도리스 레싱은 “이웃의 불행에 가장 심하게 아파하는 사람”이 최고의 인간이라고 했다. 이웃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고 이웃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시대는 과연 끝났을까. 약육강식, 전면적 자본주의의 시대인가. “굶주린 치타가(…) 새끼 누우를 공격”하고 “하이에나 무리들”이 “만 하루 된/아기치타에게 덤벼”드는 게 자연의 법칙일까.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말은 계급 없는 사회로 돌아가자는 의미였다. 이를테면 개나리·철쭉·진달래 사이에는 계급이 없다
전혀 다른 이야기같지만 알고 보면 같은 이야기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나의 상처와 불행, 그리고 남의 상처와 불행에 민감해질 것. 거기서부터 모든 이야기는 시작된다.
만약
이게 진실이라면,
2009년 내가 KBS로부터 받은 상처는, 큰 보물일 수밖에 없다.
3. 데비와 줄리, 문장 중의 문장
줄리 자신이 데비에게서 배운 것은 이런 것이다. 즉 모든 것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 말이다. 모든 것들의 대가. 사람들의, 당신이 그들을 위해 한 일의, 그들이 당신을 위해 한 일의 대가.
엄마에게 안길 수만 있다면. 그녀가 아기였을 때는 틀림없이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기억할 수 없었다. 이 집 식구들은, 서로 손을 잡지도 안아주지도 않았다. ... 그들은 서로 의견이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음성을 높이는 일도 없었고 논쟁을 하지도 않았다. 찻잔과 식사와 커피잔과 비스킷으로 매일매일이 채워졌으며 그 일들은 언제나 취침 시간을 향해 정확하게 똑같은 시간에 행해졌다. 그들은 거의 외출하지 않았고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오직 둘이서만 있었다. 마치 자신들을 소멸시킨 것 같았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그들은 벌써 늙어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을까?
이에 반해
데비의 집에서는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고 키스하고 껴안고 논쟁하고 싸우고 위협하고 울고 비명을 질렀다... 데비는 자다 깨면 줄리 쪽으로 돌아누워 그녀를 안아주었다. 그럴 때면 줄리는 사랑과 다정함에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느끼곤 했다. 이 크고 뜨겁고 무드러운 데비의 몸이 전해 준 깨달음, 데비가 다시 잠이 들어도 줄리는 여전히 그 깨달음에 놀라 잠들지 않은 채 누워 있었다. 그녀는 사실 절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줄리는 심지어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기도 했다. 전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 한번 데비는 줄리의 불룩한 배를 만지다가 재빨리 손을 거두었다. 줄리는 데비와 꼭 껴안고 누워 있었으며 그들은 서로를 핥아주고 잠이 든 두 마리 고양이 같았다. 줄리는 자기가 집에서는 얼마나 무서운 결핍 상태에 있었는지, 또 자신의 부모들은 얼마나 공허하고 슬픈 삶을 사는지 알게 되었다.
지금 그녀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자. “엄마, 오늘 엄마 침대에서 자게 해주세요. 무서워요. 엄마, 보고 싶었어요…….” 그녀는 단지 어머니의 당황하고 멈칫거리는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줄리, 넌 이제 다 컸잖니.”
줄리의 눈에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그러다가 눈물이 고인 것을 알고는 얼른 어머니를, 그리고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흐느끼며 그들에게 안겨 위로받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무엇이든 그들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사실을 알아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으며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텔레비전을 켜놓았었다. 이제 세 사람은 모두 화면을 응시하며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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