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신장위구르 자치구 룬타이현(輪臺縣) 남부에 타림 호양림(塔里木 胡楊林)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호양수(胡楊樹)들이 가을이면 노란색으로 물들면서 경이로운 사막 풍경을 연출하는데요, 적막한 타클라마칸 사막에도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광경이라고 합니다. 호양수는 식물계에 있어 가장 탁월한 생존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요, 지하 20m까지 뿌리를 깊이 박아 지하수를 빨아들이는데, 뿌리는 염도 높은 지하수에서 수분만 빨아들이는 능력이 있고, 줄기는 아주 견고하여 대량의 수분을 자기 안에 축적할 수 있다고 합니다. 호양수는 죽어서도 천 년 넘게 넘어지지 않고 넘어져도 그다음 천 년 동안 썩지 않는다고 전해지는데요, 호양림은 살아 있는 찬란한 호양림과 죽어 있는 신비로운 호양림이 독특한 풍경을 자아내는 곳입니다.
호양림이 자리한 룬타이현은 한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무제의 말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요, 룬타이의 우리말 독음은 윤대, 한 무제가 말년에 내린 ‘윤대의 죄기조(輪臺罪己詔)’는 이곳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죄기조는 황제가 신하나 백성들에게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는, 일종의 반성문인데, 무제가 이곳에서 말년에 일종의 반성문을 쓴 것이죠.
“짐이 즉위한 이후 망령되고 그릇된 일을 많이 저질러 천하의 백성들을 근심케 하고 고통스럽게 했다. 후회가 막급하다. 오늘 이후 백성을 힘들게 하고 국가의 재력을 낭비하는 일을 일체 중단하노라(朕即位以來, 所爲狂悖, 使天下愁苦, 不可追悔. 自今事有傷害百姓, 糜費天下者, 悉罢之).”
중국 역사에 있어 가장 큰 무대를 장악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던 한 무제는 왜 말년에 이런 반성문을 썼을까요? 그 중심에는 흉노와의 평생에 걸친 전쟁이 있습니다. 앞서 본 한 고조 유방의 백등산 전투 이후 한나라는 흉노에게 물품과 공주를 바치며 속국의 위치에 자리하게 되는데요. 외교적으로는 속국이었을지 모르나, 내치적 측면에서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였습니다. 나라가 안정되면서 백성들의 살림과 나라의 재정이 늘어난 것이죠. 풍요가 정점에 달한 시기, 제위에 오른 7대왕 무제(재위 기원전 141~87년)는 내부의 번영을 기반으로 삼아 흉노와의 전면전을 선포합니다. 전쟁은 소년 황제로 즉위한 한무제가 제왕으로서 자신감을 갖고 친정을 개시한 20대 후반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 되었는데요. 무려 50년 가까이 계속된 전쟁이었습니다. 그 시기 동안 나라와 백성들의 창고는 허망하게 열리고 모든 물자들은 전쟁터로 이동하게 됩니다. 창고가 비어가자 국가는 증세에 증세를 거듭했고, 그 사이 법률과 형벌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법가풍 관료들이 무제 정부의 내외에서 눈에 띄게 늘어납니다(p. 182). 백성들은 징병과 증세 속에 전장으로 차출되거나 유민으로 떠돌기 시작합니다. 그 사이 한나라의 인구는 4000만에서 2000만으로 반 토막이 났고, 아비가 병졸로 출정했고, 몇 년 뒤에는 아비를 환송했던 아이도 전장으로 끌려갔고, 마을의 남정네가 전부 전쟁에 나가 버리니 불구였던 불행한 한 남자만이 운 좋게 살아남았다며,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사자성어도 생깁니다.
무제의 집요한 공격에 흉노 역시 조금씩 쇠락의 길로 들어섭니다. 그러나 무너지지는 않았죠. 한나라의 공격 가운데 흉노 제국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것은 흉노제국의 본거지가 아니라 변방이었던 타림분지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에 대한 공격, 이른바 서역경영이었는데요. 이 공격으로 흉노는 안정된 재원과 각종 물자의 공급원을 잃게 되면서 곤란한 상태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쟁이 매듭지어진 것은 아닙니다. 흉노제국은 공격하면 흩어져 사라졌고, 공격을 멈추고 숨을 돌리면 다시 모이기를 반복했습니다. 결국 한나라는 흉노와의 의미없는 전쟁을 중지하기로 결정하는데, 그게 바로 앞서 살펴본 윤대의 죄기조였습니다.
전쟁이 멈춘 후 한나라와 흉노제국은 오랜 평화체제를 구축합니다. 그 기간은 ‘왕망의 신나라’라는 15년의 역성혁명 기간을 제외하고는 전한, 후한 시대를 관통하며 300년에 이르는데요, 세계 역사에서 300년의 평화시기는 매우 이례적인 사례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흉노나 한 모두 오랜만의 평화공존 속에서 내부적으로 점차 무너져내리고 있었다는 점인데요. 한나라와 흉노 모두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한 상태로 몰락해 간 것이죠(p. 184).
먼저 쪼개지기 시작한 것은 흉노였습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전한이 아직 숨을 쉬고 있을 때 흉노제국이 먼저 동서로 분할됩니다. 동흉노는 이후 한문 사료의 기록에 남았지만 서흉노의 모습은 사라졌습니다. 동흉노는 1세기 중반 무렵 고비사막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지는데 이유는 천재지변과 그것을 매개로 한 내분이었습니다(p. 195). 이 내분과 맞물려 후한 정권의 영향력이 파미르고원 동쪽에 있는 오사이스 지역까지 넓어지는데, 이는 반초(32~102)라는 희대의 개성이 만들어낸 짧은 시간의 영광이었습니다(p. 197). 한문 기록에 유일하게 남은 남흉노는 1세기 후반 이후 한나라의 품에 완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초원과 농경의 두 세계를 또렷하게 분담하는 형태가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죠. 한편 북흉노와 서흉노는 알타이의 서쪽, 천산 파미르의 북쪽, 그리고 도나우 흑해의 동쪽, 그러니깐 현재의 러시아에서 카자흐스탄에 걸친 당시 동서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곳으로 이동하는데, 이들이 다시 기록의 세계에 등장한 것은 4세기 남러시아 초원에 흉노와 비슷한 명칭의 이름을 가진 집단의 출현과 맞물려 있습니다. 이 집단이 바로 훈족인데요. 4세기 후반 로마제국을 해체로 몰아넣는 방아쇠가 된, 시대를 바꾼 훈족이 돌연 유럽의 역사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죠. 역사 학자들은 북흉노와 훈족의 관계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싶어 하는데, 훈족이 흉노족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합니다. 다만 흉노와 훈이라는 명칭이 비슷하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구요, 훈족의 압력 속에 게르만의 여러 종족이 서서히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했고 마침내 로마제국을 해체시킨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죠(p. 197~199).
흉노의 흔적은 유럽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흉노 또한 그들이 스스로 품에 안긴 후한이 황건적의 난으로 붕괴하고(220년) 중화 전역이 3세기 반에 걸친 분열 시대로 돌입하자 동란의 중앙에 놓이게 됩니다. 그 중원 속에서 흉노 소왕국이 만들어지기도 했죠. 좀 더 시간이 흘러 5세기에는 훈 또는 후나라 불리는 군사집단이 인도 대륙의 서북 지방에 나타나기도 했는데요. 그곳은 간다라 등을 포함해서 건조와 습윤, 목축과 농경의 접경지대였습니다. 이들이 모두 흉노의 후손이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흉노라는 과거 제국의 영광은 각기 다른 지역에서 각각의 사정과 상황에 맞춰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흉노의 후손이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p. 200).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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