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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즐거움/유목과 제국

[유목의 눈으로 본 세계사] 7부 사기의 기록, 흉노와 묵돌.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스키타이가 있다면, 사기의 기록에는 흉노가 있습니다. 유라시아의 동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목국가의 원형이 흉노인 것이죠.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원래 흉노는 중앙아시아, 특히 몽골고원에 흩뿌려져 살아가던 작은 집단에 불과했습니다. 기원전 3~4세기 무렵 중앙아시아에는 다양한 유목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요, 가장 동쪽 흥안령 산맥에는 동호라 불리는 유목민이, 서쪽 타림분지 지역은 월지가, 북쪽 바이칼 호수에서 예니세이강까지는 투르크라 불리는 정령 등이 있었습니다. 흉노족은 수많은 유목민 중에 하나였는데요, 이들이 동방 최초의 유목 제국이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사마천의 사기흉노열전(110)에 기록된 흉노에 관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흉노는 물과 풀을 따라 옮겨 살았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가 없고 농사를 짓지 않았으나 세력범위는 경계가 분명했다. 남자들은 자유자재로 활을 다룰 수 있어 전원이 무장기병이 되었다. 평상시에는 목축, 사냥을 직업으로 삼고 긴급한 상황에는 전원이 군사행동에 나설 수 있었다. 싸움이 유리할 때는 나아가고 불리할 경우에는 후퇴했는데 도주를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매우 실용적인 유목민의 패턴을 볼 수 있는데요. 이들에게 명분 때문에 죽는다? 후퇴는 굴욕이다? 이런 생각은 존재하지를 않았던 것 같습니다.


흉노가 중앙아시아에서 거대한 유목사회로 확장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4세기 후반, 전국시대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이었는데요, 중국 본토의 북쪽에 자리잡은 위치한 나라들이 이 흉노족 때문에 흙벽을 축조하기 시작했고, 전국시대를 매듭진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축조한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였습니다. 진나라의 초기 기세에 눌려 고비사막 너머로 후퇴해야 했던 흉노족이 다시 전성기를 맞은 것은 기원전 3세기 초반(BC 210년 전후) 시황제의 급사와 함께 요동치기 시작한 중국 본토의 혼란과 맞물려 있는데요, 항우와 유방의 대결로 유명한 초와 한의 공방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북방의 방위 체계가 무너졌고, 이와 동시에 흉노 시대의 문이 단번에 열리게 됩니다(P. 141~143).


이 문을 여는 주인공은 흉노의 태자 묵돌이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는 묵돌이 주인공이 되는 과정을 매우 드라마틱하게 설명하는데요,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흉노의 선우(군주의 칭호)는 두만이었다. 그의 아들이 묵돌이다. 그런데 후에 총애하던 연지(흉노 왕의 정실부인을 부르는 칭호)가 아들을 낳았다. 두만은 총애하던 연지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기 위해 이미 책봉된 묵돌을 월지에게 인질로 보낸다. 그리고 두만은 월지를 급습한다. 월지가 묵돌을 죽이게 만들려는 속셈이었다. 위기가 닥쳐오자 묵돌은 월지의 준마를 훔쳐 타고 본국으로 도망쳤다. 두만은 어쩔 수 없이 묵돌을 만인대의 기병군단, 즉 만기의 장군으로 임명한다. 묵돌은 명적, 쏘면 소리를 내는 화살을 만들어 자신이 거느리게 된 만기의 기병 군단에게 말 위에서 사격을 하는 훈련을 시켰다. 얼마 후 묵돌은 스스로 자신의 말을 향해 명적을 쏘았다. 좌우에서 쏘지 못하는 자가 있자 그들 역시 사정없이 죽였다. 다음으로 자기의 애처에게 명적을 날렸다. 다음으로 두만 선우의 말을 날렸다. 이 훈련이 계속되자 부하들이 자기의 명을 따르게 된다. 묵돌은 아버지 두만을 따라 사냥을 나갔을 때 그를 향해 명적을 쏘았다. 그 기세를 몰아 복종하지 않는 자를 모두 주살했고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올랐다. 기원전 209년의 일로 진시황이 죽은 다음 해였다.”


이후 묵돌을 중심으로 한 제국 확장의 여정이 시작되는데요, 가장 강력했던 동호, 서쪽의 월지, 남쪽의 누번을 겸하고, 진나라에게 빼앗겼었던 과거의 자신의 땅도 탈취합니다.


당시 흉노족의 등장은 보병을 주력으로 하는 중국 정주민들엑는 엄청난 충격이었는데요, 말의 기동력, 활의 파괴력, 강력한 금속무기, 대초원을 무대로 전개하는 특유의 기마전술, 광활한 초원을 이어주는 정보망 등으로 대표되는 흉노의 전투력은 공포 그 자체였다고 합니다. 특히 기마군단의 기동력은 상상을 초월하는데, 당시 서쪽의 제국 로마군 기마군단의 기동력인 하루 20~30km를 진군하는 속도였다면, 흉노족의 기동력은 60~100km 정도로 비교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었지요.

 

기원전 2세기 무렵 흉노제국이 지배한 영역은 600를 훌쩍 넘어서는데요, 이게 어느 정도냐구요? 기원전 6세기경 페르시아 제국, 그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알렉산더 최대 영토, 로마제국의 최대 영토가 600정됩니다. 중국이 가장 융성했던 한나라 한 무제 시대 최대 영토는 720수준이구요. 이걸 만든 주인공이 묵돌인데, 사마천은 묵돌의 피로 얼룩진 제국의 확장을 선연하게 묘사하면서, 그를 냉정하고 과감한 군사 지휘관으로 묘사합니다. 반면 자신이 속한 한왕조의 유방은 무능하고 어리석으며 칠칠치 못한 멍청이로 묘사하는데요, 사마천이 사기를 기록한 것이 무제 시대라는 걸 감안해보면, 묵돌의 모습에서 무제의 모습을 중첩해보려 했던 것 같습니다(P. 148).

 

그렇다면 유방과 묵돌의 대결은 어땠을까요? 유방의 한이 항우의 초를 물리치고 중원을 평정한 것은 기원전 202년입니다. 진의 시황제가 죽은지 8년 후의 일이었는데요. 이때만 하더라도 완벽한 통일 정권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방의 한왕조라는 약간 더 뛰어난 왕국이 다른 대중소 여러 왕국들로부터 중앙정권으로서 일단 승인을 받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좀 더 타당한데요, 그러다보니 묵돌과 유방의 힘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가혹할 정도로 그대로 드러난 것이 기원전 200백등산 전투였습니다(P. 149). 유방은 중국통일 후 북방을 위협하는 흉노를 정복하기 위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전쟁에 나서는데요. 때는 너무도 추운 겨울, 위치는 중국의 최북방 산시성 동쪽의 평성이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묵돌은 유목민 군대가 가장 잘 활용하는 위장 도주전술을 활용합니다. 그러자 신이 난 유방은 보병 32만명에 이르는 병사를 투입해 북쪽으로 흉노의 뒤를 추격합니다. 그리고 마주한 백등산. 보급과 구원병이 도착하기 전 먼저 달려 나간 유방 전위부대는 묵돌의 정예부대 40만 기병에게 순식간에 백등산에서 포위되는데요, 흉노는 유방과 그의 직속 부대를 7일 동안 포위했습니다. 목숨이 위태해진 유방은 사신을 보내 비밀리에 묵돌의 아내 연지에게 귀한 선물을 전하고 포위망을 좀 열어달라고 읍소합니다. 사신이 돌아간 후 연지가 묵돌을 설득하는데요.

 

두 나라 왕이란 서로 괴롭히지 않는 거예요. 지금 한나라 땅을 얻어 보아야 선우께서 그곳에 살 수도 없지 않겠어요?” 묵돌은 연지의 말에 따라 한쪽 포위망을 열아주는데, 유방의 목숨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한왕조는 이후 공주를 흉노의 왕, 선우에게 보냈고 매년 일정량의 비단과 목화, , , 식량을 바치게 됩니다. 한 제국은 개국하자마자 흉노제국의 속국이 된 것이죠. 이걸 벗어난 것은 70여년이 지난 한 무제 때가 되어섭니다.

 

백등산 전투는 통일 유목 국가와 통일 농경 국가와의, 그리고 창업자끼리의 직접 격돌이라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전투인데요. 이 전쟁으로 기동성과 집단성이 뛰어난 유목 집단이 그에 적합한 지도자를 얻어 조직화, 통제화되는 경우 정주민의 보병 대부대로는 도저히 적대할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진 사건이기도 했습니다(P. 154).

 

중앙아시아의 동쪽을 지배한 흉노는 몇 세기 전 서쪽의 스키타이와는 다소 다른 유목 국가의 형태를 보여주는데요. 우선 종적인 조직을 살펴보면 십, , , 만이라는 십진법 체계의 피라미드 구조를 갖춘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가운데 최대 단위를 이루는 것이 만이데요. 이를 이끄는 지휘자를 만기라 불렀고, 그들의 합계가 24명이었습니다. 횡으로 살펴보면 24개의 만인대가 좌, 중앙, 우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몽골고원의 자연 형태를 멋지게 본떠서 동방, 중앙, 서방이라는 횡적 배열로 국가를 구성하고, 이 세 부분을 하나로 합친 전체가 학이 날개를 펼친 형세를 이루며 장대한 모습을 구현합니다.

 

1) 군사 정치 사회조직을 관통하는 십진법 2) 남쪽을 향해 좌 중앙 우라는 3대 분할 체제의 구축 3) 영지를 가진 24명의 만기들에 의한 연합 권력 체제 등 흉노 유목민족에게 보이는 특징은 이후 많은 유목 국각에서 공히 나타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가령 몽골제국의 경우, 종주국 대원 울루스는 물론이고 서북 유라시아의 조치 울루스, 서아시아의 훌레구 울루스,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 울루스 등 각각 고유한 정치권력 체제를 구축한 다음에도 좌 중앙 우라는 체제를 채택합니다. 유목민족이 단일 민족 시스템이 아니라 연합체 하이브리드 국가라는 점은 스키타이 이후 흉노족에서도 발견되는 전통인데요.. 유목제국에서 보이는 연합체 조직과 다인종 혼합이라는 양면은 거의 필연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P. 161~164)

 

그리고!‘백등산 전투를 시작으로 유목민과 정주민, 유목국가와 농경국가의 대결은 이후 중화와 초원에 각각 새로운 형태의 삶과 정치를 만들어내는데요, 이 두 국가 패턴은 이후 유라시아 세계에서 거대한 조류가 됩니다. 그 새로운 이야기들은 다음 장에서 계속.

 

참고문헌) 진시황은 흉노가 무서워 만리장성 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