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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내 맘대로 감상문

MBC 수목드라마 트리플

후텁지근한 하루였다. 오후 내내 협회보를 만든다고, KBS 별관 근처를 배회하고, 저녁 내내 회의와 촛불집회를 한다고 여의도 공원을 서성거렸다. 촛불이 모자라 패밀리마트에 초를 사러 가는데, 해질 무렵 거리를 배회하는 몇 명의 여의도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커피를 홀짝 거리는 못생긴 커플, 노트북을 앞에 두고, 책을 읽으면서 '난 엘리트야'라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한 청년, 적당한 똥배 위에 넥타이를 올려 놓고 맥주잔을 기울이는 샐러리맨 군단, 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그 길고 긴 여름의 해질 무렵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과잉 해석이지만...

그러면서 문득 저런 아무 것도 아닌 일상이 그리워졌다. 언젠가부터 내 삶에 저런 '일상적이고 일상적인'느낌이 지워져가는 듯한 느낌이다. 석양의 빨간 색채를 배경으로 여의도 공원과 한강을 달리던 나는 같은 공간에서 촛불을 들고 선전물을 돌리는 나로 바뀌었다. 커피를 홀짝 거리면서 사랑이 어떻고, 꿈이 어떻고, 음식이 어떻고, 그놈이 어떻고를 그녀와 떠들던 나는, 어느 순간 노동이 어떻고, 국회가 어떻고, KBS가 어떻고를 떠들던 나로 바뀌었다.

이 변화가 나를 어떻게 만들까? 잘 모르겠다. 다만 배우는 것도 있고, 나를 키우는 매듭이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게 만약 일상의 느낌, 행복의 느낌, 삶의 감수성을 포기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삶은 전체적으로 우울해지는 것 아닐까? 디테일의 감수성을 의도적으로 의식하며 살아야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촛불 집회를 마치고 11시쯤 집에 돌아오니 와이프가 '트리플'을 보고 있었다.
'그치! 이런 게 있었지,'
지난 두 달간 TV와 영화와 책을 거의 보지 못한 나의 삶을 돌아보면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아갈 곳은 거기인데... 글인데...  영상인데... 콘텐츠인데... 감수성인데... 일상인데.... 내가 열심히 노동운동이랍시고 분주한 이유가 거기에 있는데 그걸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차 싶었다.

트리플
"시청률 5%, 시청자 공감할 수 없다 혹평..."
네이버에 트리플을 검색해보니 제일 첫 장에 이런 헤드라인 뉴스가 떡 하니 얹혀있더군.커피프린스 후속을 워낙 즐겁게 봐서, 내게 이윤정 감독의 두번째 장편 미니시리즈 트리플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드라마였다. 그러나 트리플 방송 시작과 함께 내 개인적인 삶 자체가 요동치면서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내게 트리플이란 드라마는 꽤 오랜 시간 기억에 남을 듯 싶다.이유? 딱 하나. 어제 저녁 우연히 만난 딱 한 마디 대사때문에...

"빙판이 사라졌다. 빙판에 쏟아부었던 18살 내 노력과 꿈과 사랑이 어디로 간 걸까. 빙판과 함께 녹아서 없어진 것일까. 빙판과 함께 녹아서 없어진 것일까. 스무 살 나는 또 다른 빙판 위를 달리고 있다."

트리플이 방영될 무렵, 내 30대 초반의 노력과 꿈이 담겨있던 빙판 역시 사라졌다. 그리고 34살 여름의 나는 또 다른 빙판 위를 달리고 있다. 아쉽지만, 화도 나지만, 그렇지만 또 한 번 빙판에서 넘어지고, 넘어지면서, 열심히 가보는 거다.

드라마를 평가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그러나 내게 트피플은 딱 하나, 이 대사 하나로 99점짜리 드라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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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트리플 (MBC)
방송기간 : 2009년 6월 11일 ~ 2009년 7월 30일
시청률 : 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