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의 눈으로 본 세계사] 1부 점의 세계에서 면의 세계로

왜 유목을 나의 것으로 삼고 싶은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과거와 조금은 다른 마음의 액자 하나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것을 좀 추상적으로 이야기해보면 점의 사고를 넘어선 면의 사고로의 확장. 이걸 욕망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점의 사고는 근대적 사유를 의미합니다. 근대적 사고는 인간의 내면과 사물의 본질로 깊게 들어가 그것을 통해 사유를 확장시키고 여러 지식체계를 발전시킵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세상의 문제들이 풀리지 않는다는 걸 느낍니다. 거창하게 볼 것 없이 내 문제가 점의 사유만으로는 도저히 풀리지 않는 겁니다. 가족의 문제, 사랑의 문제, 우정의 문제, 일의 문제, 회사의 문제, 세상은 풀어야 할 문제 투성이이고 이 문제를 풀어가는데 있어 점의 사유가 어느 순간 큰 도움이 되지 않더라구요. 그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계란 점이 아니라 면의 세계이기 때문이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한 점이 눌러지면 또다른 점이 올라옵니다. 면의 세계에서는 “이래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나, “내가 최고다”라는 자의식과 “이것은 요거다”라는 조작적 정의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근대로 표상되는 점의 세계는 규율과 자아와 본질이 중요한 세계였다면 면의 세계에서는 유연함, 관계, 전체를 이해하는 통찰력, 그리고 이동과 변화가 중요합니다. 면의 세계에서 점의 논리로 대응했다가는 스트레스만 받고 힘만 들 뿐입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매칭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면의 논리를 배워야 하는데, 도시 시민이나 농촌 농민의 삶이 점의 세계라면 유목민의 세계는 면의 세계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들의 삶의 근거지는 점을 넘어서고, 점과 점을 이어주는 선의 역할도 넘어서며, 관계의 네트워크는 이동하는 동선이 만들어내는 면의 관계망 안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좀 깊게 볼 책은 스기야마 마사야키 작가의 <유목민의 눈으로 본 세계사>입니다.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현대 일본에서 몽골연구 분야에서 최고권위를 인정받는 연구자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가 거의 알지 못했던, 아니 잘못 알고 있던 중앙아시아 거대한 초지에 펼쳐진 유목의 세계, 면의 세계를 매우 섬세하게 복원하는데요.

우선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 유목민의 삶의 터전이었던 중앙아시아 그 면의 세계의 풍경을 설명하는데 그 문장이 건조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유목의 세계처럼 말이죠.

“유라시아 북쪽에는 북극해가 있고 남쪽에는 거대한 인도양이 있다. 예부터 인간 활동의 주무대였던 유라시아는 무엇이든 얼려버릴 듯한 극한과 작열하는 뜨거운 태평양 사이에 펼쳐진 대지다. 기후는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면서 좌우로 띠모양을 이루면서 변한다. 유라시아의 연안 지방과 도서 지역은 습윤하다. 일본열도, 한반도, 중국남부, 동남아, 인도 대륙의 대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유라시아 전체를 바라보면 이런 환경은 바다와 가까운 곳으로 국한된다. 육지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건조해짐을 알 수 있다. 내륙까지 습한 공기가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과의 껍질을 벗기듯이 유라시아를 한 바퀴 돌아보면 거기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건조 지대가 많다. ... 유라시아 풍경은 하나로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기후대를 따라 북에서 남으로 내려오면 삼림, 삼림 초원, 초원, 반사막, 사막의 모양새를 이루고 있다. 이 기후조건에 요철의 지표가 더해진다. 삼림에서 초원, 그리고 사막에 이르는 대경관 중 산악의 기복이 있고, 산과 계곡의 무늬를 이루며, 산간과 산기슭의 용수선을 따라 크고 작은 오아시스가 흩어져 있다. 여기서 산이 중요하다. 눈 녹은 물과 빗물을 저장하는 수장고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생업도 수렵, 목축, 유목, 농경, 상공업 등 단순명쾌하게 분포되어 있다. 살아가는 형태는 인종 언어의 차이와 별개로 지역을 나누는 주요한 지표인 셈이다. 이 거대한 공간의 가장 큰 공통점은 역시 건조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몇 개의 지역 단위로 이루어진 이 거대 지역은 보통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역사적으로 밀접하고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던 적이 많았다. 현재 근대국가의 틀 속에서 이리저리 나뉘어져 있는 게 현실이지만 이것을 초월한 저류로 여전히 생명력을 잃지 않는 것처럼 보여진다. 이 잠재된 힘 속에서 일거에 현재 상황을 변모시킬 가능성까지 숨기고 있다. (p. 29~31)”

 

유목민의 삶의 터전에서 중요한 것은 여기는 남한, 저기는 북한, 저 멀리는 중국, 이런 인위적인 경계들이 아닙니다. 살아가는 형태, 그것을 만들어 내는 지형, 그리고 이들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배면에는 건조함이 있습니다. 무성한 초원들이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이 초원은 초록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흙과 자갈로 덮인 땅일 뿐입니다. 이런 공간에서 사람이 정주하여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유목은 바로 이 건조한 초원의 땅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며, 중앙유라시아의 역사는 바로 이 유목민들의 이동에 의해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됩니다.

 

스기야마 마사야키는 유목을 목축의 한 형태로 정의합니다. 꼭 그렇게 한정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동의 이유가 목축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들은 계절에 따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동한다. 여름에는 넓은 산의 경사면이나 평원으로 가 가축들을 풀어놓고 풀을 먹인다. 겨울에는 추위와 눈을 피해 산의 남쪽 기슭이나 계곡 사이에서 집단 생활을 한다. 이동경로는 정해져 있다. 이들의 삶은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지역을 순환하며 살기 때문에 역동적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유목 생활은 극단적인 잉여생산이 생기지 않는다. 여름의 가뭄, 겨울의 한파와 집단 자체가 사라지기도 한다. 위험과 공포가 끊임없이 따라다닌다. (p. 43)

유목민을 위협하는 것은 무엇보다 가혹한 기후였습니다. 이들은 건조한 중앙아시아의 가혹한 날씨 앞에서 생존하기 위해 이동하고 뭉쳤습니다. 이 이동성과 집단성, 이에 더해 말을 타는 기술이 더해져 이들은 정주민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유목민의 이동성을 낭만적이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유목의 현장은 고통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여름의 초원은 높고 맑은 하늘, 바람으로 말을 타고 초원을 질주하면 그렇게 신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나 긴 겨울이 오면 지옥으로 변합니다. 그저 참고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능력과 실력이 없으면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밖에 없는 주변인 겁니다. 이 혹독한 환경 앞에서 이들은 무엇보다 가축, 하늘, 땅에 대한 깊은 감수성과 판단력, 그리고 과감성을 가지게 되고, 이 강한 개인적 능력을 바탕으로 공동체에 귀속하게 됩니다. 서구적 개념으로 치자면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가 모순되지 않게 함께 보폭을 맞추어 가는 것이죠. 집단성과 개별성의 조화. 어쩌면 점의 세계에서는 모순으로 보이는 삶의 태도가 면의 세계에서는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 됩니다. 다음 장에서는 그 역사의 장으로 좀 더 깊게 들어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