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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즐거움/유목과 제국

[제국의 구조] 6부 자본주의의 끝, 거기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다시 제국이다!


<제국의 구조> 마지막 이야기. 이야기는 서양에서 시작합니다. 이유는 하나. 지금의 오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럽이 창조한 근대라는 개념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죠. 유럽 여행을 하다보면 엄청난 교회와 성당들을 곳곳에서 만나게 되는데요, 유럽의 중세는 교회=세계의 세상이었습니다. 중앙아시아가 세계=제국의 시스템으로 움직일 때 제국의 변방 유럽은 세계=교회의 시스템 위에 자리잡고 있던 것입니다. 세계=교회에 대한 반란은 종교개혁이라는 형태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붕괴 속에 자리잡은 것은 절대왕권이었습니다.

 

절대왕권은 왕을 신성화하지만 그 왕권이 봉건제후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은 도시 또는 시민계층과 결탁하면서입니다. 왜 민중의 지지에 의해 민중을 통치하는 절대자가 출현했을까요? 이 비밀을 사회계약에서 찾았던 것이 홉스의 라비이어던(1651)’입니다. 홉스에게는 주권자가 왕이든 인민이든 상관없이 주권이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것에 의해 다양한 세력이 난립하는 자연 상태가 극복되고 평화가 실현되기 때문이죠. 이것은 중앙아시아의 작은 무역상들에게 제국이 필요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절대왕권은 바로 그 인민들에 의해 무너집니다. 시민계층의 이해를 배반하면서 시민혁명의 바람이 분 것이죠. 시민혁명 후 절대왕권을 이어받은 것은 국민국가, 주권국가들이었습니다.

 

180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주권국가라는 개념은 유럽의 이야기에 한정되었습니다. 유럽 밖에는 견고한 제국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죠. 이것이 세계=제국의 시스템에 이식된 것은 산업혁명과 맞물려 유럽의 주권국가들, 그것을 버티게 하는 도시들이 경제적, 군사적 우위에 서면서부터입니다. 이들은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 청제국처럼 거대한 제국을 야만이라고 비난하면서 여기에 종속된 민족들을 해방하고 주권을 부여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리고 주권국가가 자리잡지 않은 광활한 공간은 언제든 정복 가능한 것츠로 치부합니다. 그렇게 세계=제국의 시스템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던 중앙아시아 대륙은 다수의 민족국가로 분해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들을 사실상 지배하는 것은 교환양식 c 세계=경제의 시스템이었습니다. 이 시스템을 주도하는 것은 헤게모니 국가들이구요. 고진은 세계=경제 시스템을 논할 때 이론적으로 윌러스틴의 논의를 상당부분 차용하는데요, 윌러스틴이 주장했던 것처럼 고진 역시 이 시스템 속에서 헤게모니 국가는 역사적으로 세 곳밖에 없었다고 진단합니다.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아메리카.

윌러스틴은 말합니다.

헤게모니 국가가 확고하게 존재하는 시대에는 그것은 자유주의적 정책을 취한다. 이 자유로움이 경쟁 국가에는 불리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다른 나라는 보호주의적이 되지만, 이게 특별히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힘에 있어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p. 234)”

한 헤게모니 국가의 힘이 쇠퇴하고 다수 국가가 다음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싸우는 시점도 있는데, 윌러스틴은 이를 제국주의적 단계라 생각합니다. 그러니깐 교환양식 c 세계=경제의 시스템은 헤게모니 국가 - 제국주의적 단계-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의 흐름 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죠.

이 흐름에 대해 좀 간략하게 개괄해보면 우선 네덜란드 헤게모니 시대. 그 중심에는 암스테르담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암스테르담은 데카르트나 로크가 망명하고 스피노자가 안주할 수 있었던 당시 유럽에서는 예외적인 자유로운 도시였습니다. 네덜란드가 몰락하고 새로운 헤게모니 자리를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가 싸우게 되는데요, 이를 중상주의 시대라 부르는데 윌리스틴의 용어를 빌리자면 제국주의적 단계의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의 종언은 1815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프랑스가 쇠퇴하고 영국의 우위가 확정되면서입니다. 영국의 하강은 19세기 후반에 시작됩니다. 그 다음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 독일, 미국, 러시아, 일본이 치열하게 싸우는데요, 1차 대전 기점으로 미국의 헤게모니가 확정됩니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은 독일과 일본입니다. 그것이 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아는 것처럼 2차 세계대전은 미국의 헤게모니를 좀 더 단단하게 확립하는 결과로 끝납니다. 미국의 헤게모니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고진에 따르면 1970년대입니다. 그것을 흔들기 시작한 것은 부활에 성공한 독일과 일본이라고 하는데요, 2018년의 관점에서 보면 이 관점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만 1980년대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새롭게 구성된 신자유주의 담론은 헤게모니를 쥐기 위한 새로운 싸움의 시작, 즉 제국주의적 단계로의 이행으로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싸움에서 누가 이길까요? 누가 이긴들 우리의 삶은 좋아지는 걸까요?

 

고진은 지금 이 시대를 전 세계가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작렬하는 각축전이 벌어진다는 점에서 1870년대 이후의 제국주의 시대와 유사하다고 진단합니다.


신자유주의 내지 신제국주의는 지난 날의 역사, 지리적 장에서 생겨난다. 현재 일이나고 있는 것은 일찍이 청일전쟁 시기에 있었던 일의 반복이다. 청일전쟁, 일본, 중국, 조선만의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가 관여하고 있었고, 미국이 관여하고 있었다. (p.242)”


이 제국주의 단계에서 고진은 다음 헤게모니가 중국이나 인도로 이동할 것이라 전망합니다. 하지만 이런 추측은 세계자본주의가 존속한다고 가정하는 경우에만 성립하는데요, 실제로는 중국이나 인도의 경제발전 자체가 자본주의의 종언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산업자본주의의 성장은 자연 자원이 무한 할 것, 인간 자연이 무한히 확장할 수 있을 것, 기술 혁신이 끝임 없이 계속될 것을 전제로 하는데 중국, 인도의 산업발전은 그 어마한 인구 규모 때문에 자원 고갈, 자연 파괴로 귀결된다는 것이죠. 아울러 중국과 인도에는 세계 농업 인구의 과반수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사라지게 되는 것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소비자의 원천이 사라진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두 사태는 자본의 자기증식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싸게 노동력을 사고 비싸게 물건을 팔 수 있는 시장이 사라지는 것이죠. 여기에 자본주의의 한계가 작동한다고 고진은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주권 국가들은 어떻게 될까요? 자본의 약체화는 국가의 약체화로 이어지고 국가는 어떻게든 자본 축적의 존속을 시도할 것이며 세계적으로 자본경쟁은 필사적 몸부림이 됩니다. 이제 자본은 공간을 넘어, 사람들의 '시간의 영역'까지 진입할 것이라고, AI로 상징되는 테크놀로지가 생산을 대체하면서 노동의 수요는 감소할 것이며, 수요가 감소하면서 사람 대 사람의 경쟁은 점점 더 치열해질 것이며, 언젠가는 로봇에게도 소비를 시켜야만 자본주의를 돌아가게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고진은 이런 구도로 계속 가다가는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생산을 하고 교환을 하겠지만 국가는 실업”, “경제성장의 정체”, “도시의 과밀화”, “자연 자원의 고갈과 기후 변화의 재앙로 치명적 사태를 마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태를 극복하는 길은 전쟁밖에 없을 것이라고 고진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전쟁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이론적 아이디어를 고진은 칸트의 세계공화국에서 찾습니다. 칸트는 주권국가가 부채질하는 내셔널리즘을 근절해야 할 망상으로 배척한 후 조국애와 세계시민주의가 그것을 대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조국애란 근대의 국가주의가 아니라 향토애, 마을애 같은 것입니다. 코스모 폴리스는 내셔널리즘과 배반되지만 향토애와는 양립합니다. 코스모폴리스는 수많은 향토가 존재하는 공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제국입니다. 제국은 다수의 향토, 언어, 종교를 허용합니다. (p. 249) 그러니깐 고진은 칸트의 세계공화국이나 교환양식 bc를 넘어서는 교환양식 d를 통해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를 위한 도덕법칙은 타자를 단지 수단으로서만 아니라 목적으로 다루어라라는 것인데요, 교환양식 d는 바로 이와 같은 자유의 상호성을 의미합니다(p. 263). 그런 의미에서 교환양식 d는 조금은 종교적이고, 타율적이며, 의무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이런 도덕법칙은 어떤 형태로든 외부에서 오기 마련입니다. 부모나 공동체의 규범이 한 개인에게 내면화되고, 그런 의미에서 타율적인 것이죠. 그러나 칸트는 말합니다. “그것은 가족이나 공동체에 의해 부과되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그에 반하여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의무는 다른 의미에서 외부로부터온 것이 된다. (p. 264)"

 

그렇다면 결국 그것은 신의 명령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이를 칸트는 신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해결하려 합니다.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질로 설명하려 하는 것이죠. 이 설명이 설득력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사례는 근대의 역사에서 너무도 많이 찾아볼 수 있죠. 그러나 고진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배경으로 삼아 억압된 것으로서 자유가 회귀할 때 그것이 강박적 형태로 도래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씨족사회 이전에 원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원부 살해를 통해 가부장 내지 국가의 가능성을 봉쇄했던 것처럼, 거기서 호수적 증여가 출현했던 것처럼, 우리의 미래 역시 잃어버린 자유를 집단 차원에서 최대한 회복하려는 시도가 있을 것이라고, 이 시도는 타율적이고 억압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교환양식 c에 내재한 규범에 저항하는 자율성으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충동 내지 공격충동과 비슷한 어떤 것으로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p. 266~267). 여기서 중심이 되는 것은 국민국가를 넘어선 국가연방, 세계공화국이고, 주권국가가 세계공화국으로 이르는 과정에서 작동하는 강력한 힘은 증여의 힘이라 말합니다. 즉 무력이나 돈의 힘이 아니라 그것을 증여하는 힘에 의해 어떤 공동체의 힘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이것이 제국의 구조이고, 결국 고진이 이 두터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였던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의 끝, 거기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다시 제국이다! 자유의 상호성과 증여의 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