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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즐거움/유목과 제국

[제국의 구조] 5부 세계=경제 시스템의 도래와 제국의 쇠퇴



제국은 몽골의 전과 후로 나뉩니다. 근대 각지의 제국, 이를테면 투르크 제국, 러시아 제국, 무굴 제국, 청 제국 등은 모두 몽골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몽골의 지배가 가져온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와 광대한 판도, 그리고 다민족을 포섭하는 제국의 원리는 이들 제국에 고스란히 남아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 제국은 예외 없이 19세기 서양열강에 의해 동반 몰락하게 됩니다


도대체 서구열강의 무엇이 제국을 쇠퇴하게 한 것일까요? 


15세기 전후까지만 하더라도 서양은 변방 중의 변방이었습니다. 거대한 아시아와의 교역에 참여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시아에 가서 팔 산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투르크 제국에 의해 길도 막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콜럼부스로 표상되는 대항해의 시대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거기에서 은산(銀山)을 얻었습니다. 선주민을 정복한 대가, 가혹한 노동의 강제를 통해서 말이죠. 그 은을 가지고 유럽은 비로소 아시아와 교역을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대항해시대는 본래 몽골제국이 만든 세계통상권에 유럽인이 참여하려고 하는 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랬던 유럽이 동양의 제국들을 압도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갈림길은 1800년 무렵이었는데요, 고진은 그것을 교환양식에 근거하는 세계시스템의 변동으로 이해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중세의 유럽에 대해 간단히 살펴봐야 하는데요. 중세의 유럽에서는 세계=제국이 성립될 수 없었습니다. , 봉건영주, 교회가 경합하고 그 틈을 이용하여 자립적인 도시가 번영했기 때문이죠. 유럽의 사회구성체는 이때부터 교환양식 c의 우위, 즉 세계=제국과는 다른 세계=경제의 우위에 있었습니다. 18세기 전까지 세계=경제는 세계=제국이라는 중심에 대해 아주변에 있었다는 것이 고진의 생각입니다. 이는 제국으로부터 떨어진 변방이기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한데요, "쟤네들은 그냥 지들끼리 놀게 둬라." 제국의 심장은 유럽에 대해 이런 마음이었던 것이죠. 


이랬던 변방이 1800년 전후하여 세계=제국을 압도하게 된 것은 어떤 이유때문일까요?

 

세계=제국은 교환양식 b에 근거하는 시스템입니다. 복종=보호라는 교환에 의해 여러 국가를 통합하는 것이죠. 제국은 한편으로는 타국을 정복하여 공납을 하도록 하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교역의 안전(평화)을 보증하고 대신 그 교역에 세금을 메기는 것으로 이익을 얻습니다. 제국이 확대될수록 교환양식 c도 확대되는 이유죠. 하지만 여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역이 국가에 의해 관리된다는 것, 교환양식 cb의 관리 하에 있다는 것. 그것이 제국의 이주변에서 발전한 세계=경제와의 차이였습니다. 이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차이인데요, 그것이 나타나는 게 바로 도시입니다. 제국의 도시는 곧 그 제국의 수도이고, 제국이 망하면 도시도 생명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나 세계=경제의 교환양식 하에 탄생한 도시는 국가와는 별개로 교환과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정치적 도시와 경제적 도시가 분리되는 것이죠. 경제적 도시는 교역의 규모, 원활함, 능력에 따라 그 힘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패권이 이동하구요(p. 192), 기존의 정치 권력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권력을 탄생시키기도 합니다. 가령 서유럽의 근대는 자유로운 교역을 방해하는 봉건 영주를 제압하고, 다음으로 절대 왕권을 붕괴시키고, 국민국가를 탄생시키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세계=경제의 교환양식이 있고, 그 토대는 도시와 부르주아지였습니다.


이 세계는 교환양식 cb를 능가하는 세계입니다. 여기서는 제국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대신 헤게모니 국가가 생겨날 뿐입니다. 세계=제국의 세계가 중심의 붕괴와 새로운 중심의 탄생을 서사로 가지고 있다면, 세계=경제의 세계는 중심이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경쟁이 생겨납니다. 유럽에서는 제노아에서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으로 헤게모니 국가의 이동이 있었습니다. 1800년 이전까지는 이 이동의 규모가 아직은 작았습니다. 고작 움직여봐야 유럽 대륙을 오간 것이죠. 그러나 1800년 이후에는 그 스케일이 달라집니다.

 

단적으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영국을 인도로 압도하게 된 것인데요. 영국이 진정으로 인도를 제패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군사적 차원이 아니라 경제적 차원이었습니다


영국은 18세기 중반까지 인도에서 면제품을 수입하고 있었는데 산업혁명 후 인도에서 원료를 수입하고 그것을 가공하여 인도에 수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인도에서는 전통적 산업과 사회구조가 근본적으로 해체되었다. 이것인 영국을 세계=경제의 헤게모니 국가로 만들었다. ... 역전을 가져온 것은 산업혁명이다. 이같은 역전을 가져온 것은 서유럽 전체가 아니었다. 영국에서 일어났다. ? 세계=경제의 중심은 세계=제국의 아주변에서 그리고 그 아주변으로 이동하고 있다. 세계=제국이 육지인데 반해 세계=경제는 바다를 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p.196)


영국이 헤게모니를 쥔 것은 제국의 아주변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고진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헤게모니 도시, 국가가 미치는 영향이 유럽을 넘어서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산업혁명이었는데요. 헤게모니를 쥐거나, 헤게모니를 쥐고자 열망하는 국가와 도시들이 산업혁명을 계기로 19세기 세계제국의 주변부에 들어가 그곳을 식민지화하게 됩니다. 그 과정은 느리지만 집요했고, 20세기에 들어서 기존의 제국들은 세계=경제에서 생겨난 세계자본주의에 의해 안팎으로 파괴되어 쇠퇴해 갑니다. 그리고 그 공백에 자리 잡은 것은 근대국가, 국민국가들이었습니다.


가령 오스만제국, 1827년 그리스 왕국이 독립합니다. 이후 이집트나 발칸의 민족들이 자치 내지 독립을 획득합니다. 20세기 초엽 오스만제국의 세력범위는 발칸의 극히 일부와 아나토리아, 아랍지역으로 축소됩니다. 쇠퇴의 흐름 위에서 반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좋아지지 않습니다. 반전의 계기로 제국헌법에서 무슬림과 비무슬림을 오스만 신민으로 완전한 평등으로 보장하자 역으로 불평등이 생기고 종교적 관용도 사라지게 됩니다. 헌법에 법적 평등이 규정된 이후 민족, 종교간 차별이나 대립이 격화된 겁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의 슬로건과 더불어 오스만제국은 해체됩니다. 아나토리아 지역에서 터키공화국이 성립했고, 그 외 지역은 영불의 위임통치 하에 자리합니다. 다수의 민족은 민족자결에 의해 분리되었고 역으로 자율성을 잃었습니다.


민족자결주의, 민족주의,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는 그러니깐 세계=경제 시스템의 헤게모니 국가들, 즉 서구 열강들이 제국을 해체하기 위한 전략이었다는 것이 고진의 이야기인데요. 이 주장에 따르면 근대의 국민국가는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지역들을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배하는 우회로였던 겁니다. 이 식민지를 배경으로 세계=경제는 헤게모니 국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헤게모니 도시의 영향력을 어마무시하게 키우게 되는데요. 헤게모니는 자본이 마음껏 증식할 수 있는 조건에 따라 이동합니다. 앙베르(안트베르펜)에서 암스테르담으로, 다시 런던으로, 런던에서 뉴욕으로. 마치 병균이 숙주를 필요로 한 것처럼 움직이면서 그것의 스케일을 어마무시하게 확장시킵니다. 산업혁명, 정보혁명, 인터넷혁명, 금융자본주의혁명, 4차산업혁명 등등의 이름으로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는 헤게모니를 쥔 도시는 달라진다 할지라도 영원회귀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 세계=경제의 시스템 속에, 교환양식 c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의 교환 양식이란 호수성도 잃고, 지배의 야수성도 잃고, 다원성도 잃고, 오롯이 화폐와 상품의 교환 프레임 속에서, 증식과 생산성과 이윤의 논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이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나 할까요? [제국의 구조] 마지막 챕터는 이 질문에 대한 고진의 생각을 따라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