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즉불통이라는 말을 들어봤는지. 通則不痛 통하면 아프지 않다. 이것은 동양 의역학을 대표하는 아포리즘이다. 이른바 통한다는 것, 흐른다는 것은 건강하게 산다는 뜻이다. 반대로 아프다는 것은 어딘가가 막혀있다는 거다. 통하고 막히는 것, 이 경계는 실로 다양합니다. 몸과 마음, 나와 너, 몸과 조직, 몸과 우주, 물질과 정신 등등.
요즘 곳곳에서 부동산 값 때문에 말들이 많은데, 사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문명은 그것이 자본, 효율, 이윤, 생산성 등을 강조하기 때문에 아프지 않은 게 쉽지 않다. 자본의 논리는 통함을 욕망하지 않고 축적과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한) 최소비용과 (누군가의 수익을 가로채는) 최대수익과 독식과 배제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나와 네가 분리되고, 물질적으로는 넘치고 넘치지만 정신은 이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 욕망은 크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고, 이 간극만큼 몸이 찌뿌둥한 상태. 이 상태로 박제화된 삶이 자본주의 문명에서의 삶인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 문명은 그 자체로 닫힘의 절정이다. 물질적으로는 태과(太過)이나 정신적으로는 불급(不及)이기 때문이다. 간극만큼 몸의 기혈이 막힌다. 이걸 뚫는 방법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물질적 욕망을 조절하고 정신적 풍요로움을 위한 작업들을 하는 것. 하지만 쉽지 않다. 마음과 정신의 영역이 척박하다 보니 방향을 잡지 못하는 거다다. 알면서도 잘 안된다.
이 태과불급이 낳는 질병이 바로 암과 우울증이다. 암은 스스로의 삶을 위해 숙주의 몸 전체를 죽음으로 이끈다. 돈은 스스로의 흐름을 위해 숙주의 인간 전체를 욕망의 극단으로 이끈다. 돈의 서사와 암의 서사는 싱크로율 상당히 높은 거다. 우울증은 무언가 기운이 막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과거에 우울증은 있는 자들의 질병이었는데, 이젠 일반인들의 보편적 질병이 되었다. 먹고 살만하다보니, 움직이지 않고, 몸을 쓰지 않으니, 망상과 정념은 하늘을 찌르는 거다. 이런 경우를 주변에서 너무 많이 봤다. 밖으로 흘러야 할 기운이 통로를 읽어버리면서 정기가 안으로 누적되고,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빵! 폭발하는데 그게 외부를 향하면 살인이 되고, 내부를 향하면 자살이나 우울증이 된다. 안으로 향하든, 밖으로 향하든 그것이 곧 죽음을 향한 질주라는 데서는 차이가 없고, 그래서 태과불급은 무서운 거다(고미숙, 2012, p. 172).
문제는 태과불급. 물질적 태과와 정신적 불급. 이 상태는 정말 정말 개인에게 악한 상황이다. 이 나쁜 기운을 선하고 맑은 기운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뭘까? 일단 부의 순환. 자본의 그물망에서의 탈주가 필요한 거다. 그렇다고 돈을 가볍게 여기거나 우습게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돈을 즐겁게 공부하고, 돈을 즐겁게 모으고, 사용하면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피를 흘리며 등장한’ 것이 자본임을 잊지 말라는 거다. 수많은 타자들의 죽음 위에서 자본이 축적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거다.
자본의 그물망에서 탈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선물과 증여의 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타자에게 선물과 증여의 호수성을 보이는 윤리적 실천. 이는 단지 타자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 자본에 울체한 우리가 기존의 프레임을 해체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사실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번뇌의 장 역시 클 수밖에 없다. 잃어버리진 않을까? 어디에 어떻게 투자를 해야 할까? 투자를 잘못한 것은 아닐까? 증여의 윤리, 호수의 윤리를 배우는 것은 소유-닫힘-기의 울체를 해체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사람들은 번뇌의 장이 돈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지 않지만, 사실 돈에 딱 달라붙은 무겁고 탁한 기운을 가볍고 맑은 기운으로 바꾸지 않는 이상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길은 없다(같은 책, p. 175). 돈을 둘러싼 기운의 배치를 바꾸는 것은 기존의 자본의 윤리에서 탈주한 새로운 윤리를 몸에 새기는 작업과 함께 할 수밖에 없는데, 난 그게 호수성와 증여의 원리를 몸에 새기고, 가급적 소박하고 담백하고 싸게 노는 법을 다종다양하게 연마하는데서 온다고 생각한다. 가령 걷기, 달리기 등등
이 연마의 목적은 결국 통즉불통, 즉 순환이다. 마음에 새겨진 온갖 소유의 흔적을 지우고, 흐름의 발자국을 만들어야 하는 거다. 그 흐름 위에서 내가 나 아닌 존재로 변이할 수 있어야 하고, 섞일 수 있어야 하고, 흐를 수 있어야 하는 거다. 여기에 잉여도 없고, 고정도 없다. 무수한 흐름과 변이만 있을 뿐이다. 통즉불통의 세계로의 진입,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건강하고 즐겁게 살기 위해 새롭게 열어야 하는 장이다.
통하였느냐? 그러면 아프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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