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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독서일기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1] 좌절의 공간을 떠나지 못하는 인간들에 대하여.

 

필립로스가 쓴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필립로스의 팬이 되었습니다. 책을 덮은 후 필립로스에 대한 검색질을 시작했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목소리는 2015년 절필 선언을 한 후 한 인터뷰에서 했던 이야기입니다.

매일 매일의 절망과 굴욕을 견뎌낼 힘이 더 이상 없다. 쓰는 것과의 투쟁은 끝났다."


그렇습니다. 필립로스의 책을 따라 읽다보면 이건 투쟁이자 싸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집요하게 쫓아가고, 끈덕지게 묻고, 잔인할 정도로 냉정하게 세상, 관계, 삶에 메스를 들이댑니다. 스스로에게 묻고, 질문하고, 답하는 방식이 참 대단합니다. 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삶의 절망과 굴욕을 온 몸으로 현시하는 일이며, 그것과 싸우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문장 하나 하나, 스토리 하나 하나, 꾸역꾸역 밀고 나아가면서 보통의 사람들이 닿을 수 없는 어떤 곳에 도달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미국의 현장과 동떨어지지 않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1950년대 메카시즘 열풍이, 정치와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개인들의 꿈을, 사랑을, 가족을 무자비하게 파멸시키는지를 촘촘하게 그려냅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거대한 관념이나 이데올로기나 시대사가 아닙니다. 개인의 삶, 그들이 삶을 살아내는 방식과 개인사에 좀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집니다. 그것이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입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이야기하고픈 사람은 미국 사회에서 이념, 이데올로기, 메카시 열풍에 의해 몰락했던 남자 아이라 린골드였습니다. 이야기는 60대에 가급적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살기 위해 시골로 들어온 작가 네이선이 그의 고등학교 시절 영어 선생님이자 아이라의 형인 머리선생님의 목소리를 듣는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머리 선생님은 아이라의 사생활에 대해, 그 엄청난 불행에 대해 네이선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시절 수많은 미국인이 파멸했지만, 아이라처럼 파멸한 사람은 아무도 없네. 그건 미국의 위대한 전쟁터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어. 이념, 정치, 역사 같은 걸 떠나서, 진정한 재앙은 결국 개인의 근저에 자리에 나약한 감상이 아닐까 싶네. 실패가 인간을 초라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인생을 비난할 순 없어. 한 인간에게서 제멋대로 사회적 지위를 빼앗고 자존심을 깔아뭉개는 기술들을 보면 오히려 인생에 경의를 표해야 하지.”(p. 12)


그러니깐 이 소설은 아이라의 파멸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를 파멸에 이끈 수많은 미국의 기술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이라는 거친 이웃과 매정한 가족 틈에서 불행하게 컸습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기 싫어합니다. 고등학교 중퇴 후 미국 전역을 다니며 일자리를 구했고, 진주만 공습 직후 군에 입대합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철강 노동자인 공산주의자 존 오데이를 만납니다. 매일 밤 오데이는 친구에게 책 읽는 법과 편지 쓰는 법을 가르쳤고 마르크스주의를 학습시킵니다. 제대 후 그는 자본주의와 민중, 착취와 억압, 노동자계급과 혁명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이가 됩니다. 노조 행사에서 우연히 에이브러햄 링컨을 연기하며 일약 스타가 되고, 이를 계기로 라디오방송의 성우로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라디오방송의 스타 이브와 결혼하게 됩니다.

 

세 번의 결혼에 실패한 40대 여배우 이브를 아이라는 왜 사랑하게 되었을까요? 반대로 이브는 왜 아이라를 사랑하게 된 걸까요? 아이라와 그의 이상은 문제를 안고 사는 모든 부류의 마음을 끌었습니다. 슬픔에 지친 여자들이 열광한거죠. 부드러운 야성, 거대하고 거친 사내의 선량함. 이 모든 것이 이브에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습니다. 아이라가 살아온 혹독한 삶이 그녀에게는 색다르게 다가왔습니다. “그 활력, 그 힘, 삼손같은 거인 혁명가. 그에게서 풍기는 우직한 기사도. (p. 147)" 그녀의 독특한 모성본능이 그에게로 향했습니다. 아이라는 이브의 헌신적인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브는 끔찍했던 결혼생활과 남자들 이야기를 했고, 헐리우드, 폭군 같은 감독들, 속물근성에 찌든 제작자들,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비속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깐 아이라는 그녀가 겪은 위험들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죠(p. 100). 이에 대해 그의 형 머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갑자기 고통과 상실이 가득한 현실에서 벗어났다는 자아도취적 환상에 빠졌어. 자기 인생이 헛되지 않고 절대 무익하지 않다는 환상에 사로잡힌 거야. 더는 자기 한계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골짜기를 걷고 있지 않았어. 더는 영원한 이방인 신세를 감내해야 하는 추방당한 거인이 아니었지. 그렇게 무모한 용기를 내어 돌진한거야. 새로운 아이라, 세상 속의 아이라, 훌륭한 인생을 갖게 된 훌륭한 사나이. 그럴 때 더 조심해야 하지. (p. 109)

 

이후 아이라의 삶은 거대한 모순으로 나아갑니다.

 

아이라의 모순은 분명했지. 개방적인 성격과 공산당의 비밀주의, 가정생활과 당, 자식에 대한 갈망, 가족에 대한 갈망, 삼십대 사내가 사십대 여자와, 그것도 다큰 딸과 함께 사는 여자와 결혼한다? 모순점이 끝도 없었지. 하지만 그때는 그게 헤쳐나가야 할 도전이었지. 아이라에겐 잘못된 게 많으면 많을수록 바로잡을 게 많은 거였으니까. ...그는 그녀가 딸을 데리고 (첫번째 남편) 페닝턴을 보러 간다는 사실에 미칠 듯이 괴로워했네. 난 그에게 이렇게 말했지. 페닝턴 문제는 잊어버려. 모든 걸 변화시킬 순 없어. 하지만 변화는 아이라의 인생 목표였네. 그가 열심히 사는 이유. 모든 것을 의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는게 그의 본질이었다네. 그는 항상 영향을 미쳐야 했고, 모든 걸 바꿔야 했지. 그것 때문에 그가 세상에 존재하는 거였어. 그리고 눈앞에 그가 바꾸고 싶은 게 전부 놓여 있었고.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애타게 원하는 순간부터 좌절은 피할 수 없게 된다네. p. 147~148

 

좌절의 중심에는 모녀의 관계, 이브와 실피드의 왜곡된 공생 관계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딸에게 정서적으로 협박당하고 있었고, 권위가 역전되어 있었죠. 겁에 질린 엄마와 거들먹거리는 아이 사이에 융화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딸은 엄마의 재혼에 대해 분노했고, 엄마를 짓밟았고, 아이라는 스스로 그 분노의 장에 들어간 겁니다. 보다 못한 형이 아이라에게 이런 말을 전합니다.

 

난 지금 엄마가 딸애한테 카펫처럼 불쌍하게 마구 짓밟히는 가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야. 우리 아버지 밑에서, 우리 집안에서 자란 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집안 문제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그게 사람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지 모를 수 있는 거냐, 그 피곤한 말다툼, 매일 반복되는 절망, 매순간 겪어야하는 타협의 긴장을, 그 집안은 완전히 망가졌어... 넌 진짜 위험한 게 뭔지 모르고 엉뚱한 데에만 신경쓰고 있어. 널 위협하는 건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아니야. 널 위협하는 건 너의 공식적인 활동이 아니라고. 널 진짜 위협하는 건 너의 사생활이야.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거야.” 152

 

그러나 이런 말이 당체 인간에게 먹히기나 할까요? 사람들은 끝이 날때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인간이란 그런 겁니다. 문제가 있어도 불만이 있어도 그 장에서 떠나지 않고 그냥 살아가곤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과거의 인연, 삶과이 고리를 자르고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오만가지 것을, 심지어 아주 병적인 행동까지도 서로 맞춰가면서 살아갑니다. 왜 아이라는 이브와의 감정을 끝내지 못할까요? 대답은 하나. 우리는 모두 결점 많은 인간들이고, 그 결점과 결점이 만나 만들어지는 비극적인 공간을 떠나는 게 그렇게 힘들기 때문입니다.

 

비극적인 공간을 떠나는 것만 힘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통념, 관행, 이데올로기가 자신의 상식과 어긋날 때 그것을 나의 것으로 삼지 않는 것, 그것에 저항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이라가 사랑한 이브는 그것을 표상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유대인인 이브는 첫 번째 남편 페닝턴의 반유대주의를 자신의 것으로 삼습니다. 엉터리 비유대인을 연기했고, 이 연기는 자신이 배역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배역이 개인의 삶을 옭죄는 방식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미워했고 생김새를 미워했습니다. 자신의 아름다움이 곧 자신의 추함이었으며 분노와 모욕감이 평생 그녀를 따라다녔습니다. 이브는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법을 전혀 몰랐고, 공습경보가 울리면 이성이 끼어들 틈 없이 아주 잠깐 악의와 분노를 분출했다가 금방 항복하곤 했습니다. 인생에 치이고, 딸에게 치이고, 자기 자신에게 치이고, 자신의 불안정함과 시시각각 찾아오는 모든 불안에 치여 망가진 여자가 곧 이브였던 것이죠(p. 272).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는 세상이 만들어낸 배역에 개인이 좌지우지 되는 삶이라는 게 어떤 모습인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배역에 저항하지 못하고, 비판하지 못하며, 떠나지 못하는 삶의 좌절과 비극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 비극의 진동이 모이고 모여 배신의 챕터로 넘어가게 됩니다.

배신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장에 계속됩니다~~ 아 삶의 비루함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