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장 죽이기> 2부는 주인공인 “내”가 “아키가와 마리에”를 만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아키가와 마리에는 멘시키가 자신의 딸일 것으로 여기는 꼬맹이입니다. 멘시키의 부탁으로, 아니 어쩌면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인연 때문에 그는 마리에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마리에의 눈에는 신비로운 광채가 있습니다. 열기를 품은 동시에 철저히 냉정한 광채. 그는 그 눈의 반짝임을 화폭에 담고 싶습니다. 마리에가 어린 시절 병에 걸려 죽은 여동생을 연상시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는 멘시키는 어떨까요? 마리에를 멀리서라도 보기 위해 산꼭대기 대저택을 매입해 군사용 망원경까지 구입한 사람이 멘시키입니다. 그는 아이를 앞에 두고 피를 나눈 친딸이라고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새롭고 맑은 혈액을 온몸 구석구석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에는 매주 일요일마다 그의 집에 고모와 함께 찾아옵니다. 고모는 거실에서 책을 읽고, 마리에와 그는 이젤을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눕니다. 그 시간을 멘시키는 멀리서 구경하고 전해 듣습니다. 마리에는 흥미로운 캐릭터입니다. 이 꼬맹이는 주인공의 죽은 여동생을 떠오르게 하고, 멘시키의 친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바깥을 향하는 순수한 요구의 힘과 완결을 향하는 내향적인 힘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눈빛을 가진 존재입니다. 주인공에게 들리는 방울소리는 그녀에게도 들리고, 그것이 자리한 구덩이는 그녀에게도 더불어 함께 사고하며 살아 움직이고 있는 공간입니다. 그러니깐, 주인공, 멘시키, 마리에는 방울소리와 구덩이를 공유하는 존재들인 거죠.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여기 오는 길에 방울소리가 들린 것 같아요. 선생님 작업실에 있던 방울이랑 똑같은 소리였어요.
어디쯤에서?
그 숲속, 사당 뒤쪽요.
무섭지 않았니?
제 발로 나서서 말려들지 않으면 무서울 일은 없어요. (p. 70)
<기사단장 죽이기> 2부에서는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린 도모히코의 지난 삶도 하나 하나 밝혀지기 시작합니다. <기사단장 죽이기> 1부에서 주인공인 “나”는 서양화를 전공했고,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학했던 도모히코가 1938년 석연치 않은 이후로 일본으로 돌아온 이후 1947년까지 침묵한 이유가 뭔지, 이후 일본화로 전향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궁금해 했습니다. 우연히 다락방에서 발견하게 된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은 그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된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왜 이 그림은 발표되지 않고, 저 깊숙히 다락방에 은폐되어 있었을까요? 도모히코의 아들이자 그의 미대 친구의 목소리를 통해, 그리고 멘시키의 도움으로 그 비밀들이 하나하나 탐색하고 표면 위로 드러납니다.
도모히코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공부하던 시절은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때였습니다. 이 시기에 도모히코는 한 오스트리아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녀와 함께 독일 점령세력에 저항하는 지하조직의 단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 활동이 발각되어 사랑하던 여인은 죽임을 당했고, 그는 일본으로 강제 추방당합니다. 도모히코에만 비극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의 비극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그의 동생 야마다 쓰구히코가 중일전쟁에 참전하면서 벌어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도모히코의 아들이자 주인공의 미대친구에 의해 담담히 고백됩니다.
“사람 목을 치는 데 익숙해질 수 있는 인간은 적지 않을 거야. 사람은 많은 것에 익숙해지는 법이야. 특히 극한에 가까운 상태라면 의외로 간단히 익숙해지곤 하지. 그 행위에 의의나 정당성이 부여되면. 대부분의 행위에는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지. 군대 같은 폭력적인 시스템에 내던져져 상관의 명령을 받는다면 아무리 부조리한 명령일지라도 비인간적인 명령일지라도 나는 그에 대항해서 확실히 거부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는 않을 거야. .... 삼촌은 상관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어. 그만한 용기도 실행력도 없었지. 하지만 그뒤에 면도칼을 갈아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나름의 매듭을 지을 수 있었어.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삼촌이 결코 나약한 인간은 아니었다고 생각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삼촌에게는 인간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거야. (p.111)"
전쟁 상황에서 상관의 명령으로 무차별적인 살육게 가담하게 된 도모히코의 동생은 전쟁이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주인공 ‘나’와 멘시키는 이러한 일련의 은폐된 가족사가 도모히코로 하여금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기묘한 그림을 그리게 했다고 추론합니다.
도모히코를 둘러싼 가족사들이 시대사와 얽히면서 다양하게 드러나지만 <기사단장 죽이기>가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군국주의를 고발하고 있는 작품은 아닙니다. 하루키 역시 증언과 침묵 속에서 어쩌면 침묵의 가치에 좀 더 방점을 찍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기사단장 죽이기>가 그 아픈 시대를 그린 메타포라면, 그 이야기는 세상에 나오지 않고 다락방에 꽁꽁 숨겨졌으니깐요.
이 소설이 오히려 지향하는 바는 역사보다 창작에 방점이 찍혀져 있습니다. 초상화를 그리는 주인공이 아내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은 후 자신의 작품을 그리기 위해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현현하는 이데아와 전이하는 메타포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죠. 그 만남을 주선하는 것은 기사단장입니다. 기사단장과 주인공의 대화를 한 번 들어보실까요?
이데아는 타인의 인식 자체를 에너지원 삼아 존재하네.
그럼 혹시 제가 기사단장은 없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겠군요.
이론적으로는. 그러나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왜냐하면 사람이 어떤 생각을 멈춰야겠다고 마음먹고 실제로 멈춘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니깐.
무언가를 생각하기를 멈추려면 그걸 멈추자는 생각 자체를 멈춰야 해.
당신은 이데아에게 도덕 같은 것이 없다고 했죠. 이데아란 중립적인 관념이고 그것을 좋게 만드는 것도 나쁘게 만드는 것도 인간에게 달렸다고. 그렇다면 이데아는 인간에게 좋은 일을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좋지 않은 일을 할 경우도 있다는 거네요.
e=mc2은 본래 중립이었을 테지만 원자폭탄을 만들었네. .. 제군 이 우주에서는 모든 것이 카베아트 엠프로트 caveat emptor거든. 라틴어로 매수자 위험부담이란 뜻이지. (p. 131~133)
현현하는 이데아는 결국 매수자 위험부담입니다. 문제는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을 하더라도 실제로 일이 진행되는 방식, 어떤 경로를 밟아나갈지는 의도, 생각과 상관없이 시간이 흐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 나중이 되어봐야 사후적으로 해석할 뿐입니다. 주인공인 “내”가 그녀와 헤어진 후 미대 동창생의 도움으로 아마다 도모히코의 산속 저택에 무상으로 살게 된 후 방울 소리를 듣고, 멘시키를 만나고, 구덩이를 찾고, 기사단장과 마리에를 만나고, 이런 사건들은 시간이 흐르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사건들입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그녀와 헤어지게 된 것 역시 시간이 흐르기 전에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겁니다. 왜 그녀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을까, 주인공은 이 질문과 생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내게는 바꿀 수 없는 어떤 경향 같은 것이 있었고 그것이 결혼생활에 장애가 되었던 것일까? 반대로 바꿀 수 없는 어떤 경향 같은 것이 결여되어 있었고 그것이 결혼생활에 장애가 되었을까?” (p. 153)
도모히코의 산속 저택에 홀로 살게 되면서,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현실과 가상, 과거와 오늘을 오가게 되면서, 그 과정에서 수많은 새로운 인연과 사건을 만나게 되면서 “나”는 나의 과거를 조금씩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생계를 위해 내키지 않는 그림을 숱하게 그려야 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오히려 좋은 쪽으로 작용한 부분이 있을지 몰라요. 최근 들어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될 것도 같습니다. 스스로의 자아를 버리는 것도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 뜻인가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경우는 보다 단순히, 내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는 데 시간이 걸린 것뿐인지도 모른다. .. 삼십대 후반에 접어든 남자가 이런 말을 하면 바보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왠지 이제 막 인생이 시작됐다는 기분이에요. p 157
그렇습니다. 이 소설은 하루키 월드가 직조한 캐릭터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주인공의 성장과 변신에 관심을 두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일이든, 어떤 아픈 상처과 기억이든 반드시 좋은 측면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둡고 두꺼운 구름도 그 뒤쪽은 은색으로 빛나는 것이지요(p. 266). 이 소설은 그 은색을 찾기 위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보는 이야기입니다. 하나의 메타포로서 말입니다.
이야기는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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