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이야기들을 좋아합니다. 그가 만들어낸 주인공들은 대부분 이런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려는 걸까. 근본적으로 나는 대체 누구인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자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삶이 우울할 때, 쓸쓸할 때, 외로울 때 아파트 옥상에서 가끔씩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가라앉을 때 저도 모르게 하루키의 소설을 다시 보게 되는 이유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오늘 읽은 책은 <기사단장 죽이기>.
누군가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나름 초상화 시장에서는 평판이 좋은 친구입니다. “나중에 커서 초상화를 그릴거야!” 그렇게 시작한 일은 아닙니다. 그냥 어쩌다보니, 먹고 살기 위해 맡은 일들을 해치워 가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붓을 가지고 캔버스 앞에 앉은 이상 아주 가치 없는 결과물을 내놓을 수는 없었고, 초상화를 원하는 방문객들에게 좋게 볼 자질 하나둘 발견하는 게 그에게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고객을 만족시키는 미술계의 고급 창부로 어제도 오늘도 누군가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습니다. 거기에 자신의 욕망이라고는 단 한조각도 없이 말입니다.
왜 이러고 살아, 누군가 물으면 결혼하고 생활의 안정을 고려해야 했다고 대답하겠지만, 그건 핑계였을 겁니다. 30대 후반의 나이, 그는 이미 청년이라 할 수 없는 나이였고, 갈수록 무언가가 자기 안에서 사라지는 느낌으로 살아갑니다. 어느 시점에 청춘이 갔음을 깨끗이 인정하고 새로운 수단을 강구했어야 하는데, 나도, 너도 그게 쉽지 않은 것처럼 이 친구 역시 쉽지 않았죠. 하루 이틀 미루기만 합니다. 그러다 의도치 않은 지점에서 변화의 장벽을 넘어서게 됩니다. 그건 바로 아내가 그를 포기한 겁니다.
“우리 헤어져.”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육 년을 한집에 살면서도 이 여자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집을 나와 자동차에 시동을 켜고 그는 그대로 대로를 달리기 시작합니다. 휴게실 화장실 세면대 거울에 비친 얼굴. 물감이 얼룩진 추레한 스웨터를 입은 서른여섯 살의 피폐한 남자가 서 있을 뿐입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스스로에게 애정 비슷한 것을 조금이라도 품을 수 있을까?
작은 조각 하나라도 좋으니, 반짝이는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을까?” (p. 41)
<기사단장 죽이기>는 그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바꾸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게 마치 의도된 일처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키가 이야기한 것처럼 세상은 수많은 우연의 연속이죠. 시간이 흐른 뒤 돌이켜보면 우리 인생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 일 투성이입니다. 믿을 수 없이 갑작스러운 우연과 예측 불가능한 굴곡진 전개가 넘쳐나죠. 하지만 그것들이 실제로 진행되는 동안에는 대부분 아무리 주의 깊게 둘러보아도 불가해한 요소가 전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쉼없이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비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이치에 맞는지 아닌지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드러날 뿐이죠.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발휘하는 것은 대개 결과뿐입니다. 결과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실재하며 영향력을 행사하죠. 그러나 그 결과를 가져온 원인을 가려내기란 쉽지 않아요. 연쇄적으로 끝없이 어떤 일들이 이어지는 사이 가장 먼저 일어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대개 흐릿해져버리는 것이죠. 혹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지거나. 혹은 딱히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 않거나. 그리하여 ‘어쨌든 많은 장기짝이 연달아 넘어졌답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p.95)
그에게 갑작스러운 우연과 예측 불가능한 굴곡진 전개는 친구의 아버지이자 저명한 일본화가 아마다 도모히코가 살던 빈 집에 들어가 살면서 시작됩니다. 아마다 도모히코는 병세가 악화되어 요양원에 가 있는 상태. 그 집에서 생활을 하던 그는 밤마다 천장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소리를 쫓다 천장 위에 숨겨져 있는 그의 미발표작 <기사단장 죽이기>를 찾아냅니다. 도모히코가 그려낸, 두 남자가 목숨을 걸고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광경에는 보는 이의 마음을 밑바닥까지 뒤흔드는 것이 있었습니다.
“기사단장죽이기, 도모히코가 그려낸, 두 남자가 목숨을 걸고 격렬한 싸움을 벌이는 광경에는 보는 이의 마음을 밑바닥까지 뒤흔드는 것이 있었다. 이긴 자와 패배한 자, 찌른 자와 찔린 자. 그 낙차가 내 마음을 빼앗았다. 이 그림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 네 사람 중 놀라지 않은 이는 젊은 살인자뿐이다. 그는 타고난 살인자가 아니다. 죽이는 일을 즐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누군가의 숨통을 끊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젊고, 이상에 불타고 있으며, 힘이 넘치는 남자다. 그리고 검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 또 한 사람, 기묘한 목격자가 있다. 각주처럼 왼쪽 아래 그려져 있다. 땅에 붙은 뚜껑을 반쯤 밀어올리고 고개를 내밀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듯한 그 네모난 뚜껑은 이 집 천장 위로 통하는 문을 연상시켰다. 모양도 크기도 꼭 닮았다. 남자는 그곳에서 지상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다. .. 그림을 보면서 가극 <돈 조반니>의 한 장면을 되풀이해 들었다.” (p. 110~111)
기사단장 죽이기는 평소 도모히코가 그리는 그림과 전혀 다른 화풍의 그림입니다.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주인공은 궁금해집니다. 그렇게 그는 아마다 도모히코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시작되는 기이한 일들, 멘시키라는 골짜기 건너에 살고 있는 남자가 상식 밖의 금액을 제시하며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요구합니다. 거액의 보수를 내놓는 대신 무얼 요구할 셈일까요? 그 무언가를 끝까지 지켜보고 싶어진 그는 일단 흐름대로 흘러가보기로 합니다. 멘시키라는 인물 안에는 무언가가 은밀히 숨어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을 이루는 요소는 하나같이 아름답고 반듯했다. 눈초리가 길고 안와가 조금 움푹하며 이마는 넓고 반듯하고 또렷한 눈썹에 콧대는 가늘면서 적당히 높았다. 작은 얼굴에 어울리는 이목구비다. 하지만 얼굴이 작은 것에 비해 옆으로 퍼진 편이라 미적 관점에서 밸런스가 아주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가로세로 균형이 불안정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얼굴 고유의 매력이었고 그 불균형에 오히려 보는 이를 안심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 크고 뾰족한 귀, 가을비가 그친 아침, 숲속에 쌓인 낙엽 사이로 삐죽 머리를 내민 활기찬 버섯이 연상되었다. 얇고 옆으로 긴 입술은 반듯하게 일자로 다물려, 언제든 바로 미소지을 수 있도록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 더할 나위 없이 청결하고 솔직한 미소였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닐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멘시키라는 인물 안에는 무언가가 은밀히 숨어 있다. 그 비밀은 자물쇠 달린 작은 상자에 담겨 땅속 깊이 묻혀 있다. 아주 오랜전에 묻혔기에, 지금은 그 위에 부드러운 초록 풀이 무성하다. 그런 유의 비밀을 간직한 고독을, 나는 그의 미소 너머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p. 136~146)
멘시키에만 비밀이 있던 것은 아닙니다. 주인공에게도 자신만이 간직한 고독이 있습니다. 바로 동생의 죽음. 하루키의 소설에서 자주 나오는 과거의 상처 중 하나죠. 동생의 모습을 흰 종이 위에 어떻게든 되살려보려고 애쓰다보면 그곳에 의심할 수 없는 진짜 슬픔이 넘쳐흐릅니다. 그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흐르곤 합니다. 동생의 죽음이 그에게 가져온 것도 있습니다. 극도의 폐소공포증. 그리고 밤마다 어디선가 방울소리가 들립니다. 누가 무엇 때문에 그에게, 정체 모를 장소에서 밤마다 신호를 보내는 걸까요?
그 신호를 따라가 보자고 독려한 것은 멘시키였습니다. 멘시키는 기계를 빌려 소리가 나는 곳을 덮은 거대한 돌들을 하나둘 치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발견한 방울. 마치 오랫동안 누구의 눈에도 닿지 않도록 감춰뒀던 어두운 비밀이 기계의 날 밑에서 한 겹씩 벗겨지는 느낌입니다.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을까요?
그 사이 이별을 선언한 아내 유즈에게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습니다. 그 사실은 그에게 큰 상처가 됩니다. 정확히 말해 그에게 상처를 준 것은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녀의 침묵 속에서 그의 감정은 무거운 추처럼 한끝에서 다른 한끝으로 커다란 호를 그리며 왕복하며, 피부에 생생한 상처를 몇 군데 남깁니다. 그 아픔을 잊을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일뿐입니다. 멘시키의 초상화를 그립니다. 그의 초상화만 그린 것은 아닙니다. 아내와 헤어지고 무작정 이곳저곳을 헤맬 때 우연히 만났던, 강력한 인상의 남자,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의 초상화도 그의 이젤 위에서 형상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아내 유즈와의 이별, 그것이 피부에 남긴 상처, 그 아픔을 잊는 레써피는 적어도 그에게는 그림이었습니다. 그의 일상은 “그림”을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밑그림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 선의 힘을 믿고, 선이 나누는 공간의 힘을 믿어야 한다. 내가 아니라 선과 공간이 말하도록 해야 한다. 선과 공간이 대화를 시작하면 뒤이어 색이 입을 연다. 그리고 평면이 점차 입체로 모습을 바꿔간다. 내가 할 일은 그것들을 격려하고 손을 빌려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가서 집 뒤쪽 잡목림으로 향했다. 숲의 정적 속에서는 시간이 지나고 인생이 흘러가는 소리마저 들려올 것 같았다. 한 사람이 가고 다른 사람이 온다. 한 생각이 가고 다른 생각이 온다. 한 형상이 가고 다른 형상이 온다. 나 자신조차 반복되는 나날 속에서 조금씩 무너졌다가 재생된다. 무엇 하나 같은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은 상실된다. 시간은 내 등뒤에서 조금씩 죽은 모래가 되어 무너지고 사라진다. 나는 그 구덩이 앞에 앉아 시간이 죽어가는 소리에 마냥 귀를 기울였다." (p. 367~369)
그가 그린 사람은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 무작정 차를 몰고 달리다 마주한 어느 어촌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마주한 남자입니다. 깊은 분노와 슬픔이 있고, 그 사람은 그걸 토해내지 못해 분노가 몸속에 소용돌이칩니다(p. 373). 이 남자는 하루키 세계에서는 주인공의 내면이 직조한 대상이기도 합니다.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는 바로 주인공 자신이기도 한 것이죠. 완성되지 않은 흰색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 초상화를 본 멘시키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이 그림을 발견했어요. 당신 자신의 내부에 묻혀 있던 이미지를 찾아서 이끌어낸 겁니다. 발굴했다는 표현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말하자면 그것은 깊은 해저에서 발생한 지진 같은 거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햇빛이 닿지 않는 세계에서 다시 말해 은밀한 무의식의 영역에서 커다란 변동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지상으로 전해져 연쇄반응을 일으킨 결과 우리 눈에 보이는 형태를 띠게 됩니다. 저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그런 프로세스의 원리는 대강 이해할 수 있어요. 탁월한 아이디어란 어둠 속에서 근거 없이 나타나는 사념인 경우가 많죠.” (p. 335)
주인공이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이와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감정을 그려내려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에서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내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여기 있는 것들 가운데 마땅한 것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그는 생각합니다. 어디 그림 뿐일까요? [기사단장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서사가 이어집니다. 가령 죽은 동생을 떠올리는 장면.
“그거 알아? 앨리스는 정말 있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3월 토끼도, 바다코끼리도, 체셔 고양이도, 트럼프 병사들도, 전부 이 세상에 진짜로 있어.” ....작은 구멍 앞에서 동생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시간의 무게. 그때 나를 감싸고 있던 짙은 어둠, 뼛속까지 얼어붙은 한기를, 구멍에서 제일 먼저 그애의 검은 머리가 나타나고, 뒤이어 어깨가 천천히 나오던 모습을. 그애의 흰색 티셔츠에 묻어 있던 정체 모를 여러 가지를." (p. 418~419)
끊임없이 들리는 방울소리와 방울소리가 멈추자 그림 밖으로 뛰쳐나온 기사단장도 같은 맥락입니다. 어느 날 저녁 스툴에서 일어나 작업실 불을 끄고 나와서 문을 닫는데, 문득 방울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닫습니다. 침묵이 들릴 뿐입니다. 그때 거실 소파 위에 뭔가 낯선 물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쿠션이나 인형만한 크기. 살아 있는 조그만 인간이었습니다. 그 작은 인간은 기묘한 흰옷을 걸치고 있습니다. 옷뿐만 아니라 그의 얼굴도 눈에 익습니다. 기사단장이었던 겁니다.
이처럼 하루키 세계에서는 현실과 비현실이 섞이고, 현재와 과거, 꿈과 현재가 뒤죽박죽 섞입니다. 여기에 어떤 논리적 관계란 없습니다. 다만 하루키가 만든 세계에서는 그게 현실입니다. 기사단장이 귓전에 속삭였다. “두눈 똑바로 뜨고 봐두게나. 판단은 나중에 하면 돼.” 지금 여기와 가상의 거기가 이어지는 연결 고리에는 늘 주인공의 아픈 기억들, 상실했던 사람들, 지금은 손에 없는 것을 동력 삼아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루키가 창조한 주인공의 주변에는 이상한 일 투성이입니다. 이 소설만 해도 이상한 일의 스케일이 굉장합니다. 천장 위에서 발견한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 기사단장죽이기. 잡목림에 뚫린 구덩이에 남아 있던 기묘한 방울, 기사단장의 모습을 빌려 내 앞에 나타나는 이데아, 그리고 희색 스바루 포레스터를 타는 중년남자. 그에 더해, 골짝기 맞은편에 사는 불가사의한 백발의 인물 멘시키까지.
<기사단장 죽이기> 1부는 어느 날 오전 불연 듯 도착한 이혼신청서류를 주인공이 멍하게 바라보는 장면에서 마무리됩니다. 육 년에 걸친 결혼생활의 무게가 그 봉투에 고스란히 쑤셔 넣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 어떻게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 그는 전혀 경위를 읽어낼 수 없습니다. 유즈가 다른 누군가와 자는 설 선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리 쉽게 이해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지금 본인이 당하는 일은 지독히 부조리하고 지독히 비정한 처사처럼 느껴졌습니다. 분노는 없었습니다. 다만 마비의 감각이 있을 뿐입니다. 누군가를 강하게 원하는데 그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생기는 격렬한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마음이 자동으로 작동시킨 마비의 감각입니다.
자 과연 주인공은 이 부조리와 비정한 마음과 격렬한 고통을 어떻게 완화시켜갈까요? 그럴 수는 있을까요? 그런 우연적 계기는 가능할까요? 다음 이야기는 2부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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