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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독서일기

무서워하면 끝장이다. <그리스인조르바 3>



넌 도대체 조르바가 왜 좋아?

도대체 왜왜왜? 왜가 없으면 좋아하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하는 거요?

이런 말을 하고 싶지만 어디서든 무언가 마땅한 답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럴 때 마주한 다음 문장은 제가 조르바를 좋아하는 이유의 처음이자 끝이에요.

 

나는 조르바를 마을까지 전송했다. 사면을 내려가면서 조르바가 돌멩이를 걷어차자 돌멩이는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조르바는 그런 놀라운 풍경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고 돌멩이를 바라보았다.

두목 봤어요? 사면에서 돌멩이는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매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그는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아니 보는 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그는 이성의 방해를 받지 않고 흙과 물과 동물과 하느님과 함께 살았다. (p. 201)

 

매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삶, 흙과 물과 동물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삶, 제가 그를 좋아하는 이유죠. 일상에서 이런 새로움을 만들어가는 것은 쉬운 듯 쉽지 않습니다. 특히 세상에 가득 찬 플라스틱, 일회용 종이컵, 매연 같은 언어, 질시와 분노와 저주의 눈초리들을 마주하다보면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는 관계보다 그 반대의 관계가 일상을 압도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 요즘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sns를 오가며 안봐도 그만인 뉴스들, 목소리들을 듣다보면, 가령 김부선과 이재명의 스캔들에 대한 이야기, 내가 사는 이 공간이 싫어지기도 하고, 한반도라는 작은 땅이 답답해지기도 하며, ‘풍문과 소문으로 연명해가는 호모사피엔스종이 미워지기도 합니다. 사람을 존중하지 못하고 야욕과 욕망 때문에 누군가의 상처를 외면하는 이야기들도 절망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그리스 인 조르바>에서 화자가 그리스를 떠난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는 장면이 있는데, 친구가 화자에게 하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카잔스키가 바라보는 그리스와 내가 지난 10년간 대한민국을 바라봤던 시선과 태도의 유사함에 놀라기도 합니다.

 

친구에게 편지가 왔다. 친구는 젊은 신학 교사 겸 신부로 있다가 고향 크레타를 떠났다. 나는 길을 벗어나 바위 위에 앉아 편지를 뜯고 읽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바위에 달라붙은 삿갓조개, 제 지위를 놓치지 않으려고 조직에 달라붙어 있는 관료같은 자여. 자네 역시 술집이나 어슬렁거리고 카페 놀음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전형적인 그리스 놈이 되고 말았는가? 하기야 자네에겐 카페는 카페가 아닐 것이네. 책이 그렇고 자네 습관이 그렇고 그 알량한 이데올로기가 그럴 것이네. 그러나 어쩌랴. 그게 다 카페인 것을. .. 나는 외롭지만 이 외로움을 즐기네. 여기에도 거지 같은 그리스인은 있지만 어울리고 싶지 않네. 구역질이 나. 여기에도 자네같이 빌어먹을 술집 건달들이 있네. 자네들 그리스인이 퍼뜨린 더러운 중상모략가, 고약한 험구가들이 있다네. 그리스를 망치고 있는 건 바로 이것, 정치라네. 나는 유럽인이 싫어. 그중에서도 더러운 그리스인, 그리스가 가진 모든 게 싫어. 내가 죽을 곳은 이 땅. 비석을 세우고 큼지막한 글씨로 비문을 내 손으로 새겨 놓았네. 그리스인을 증오하는 그리스인 여기 잠들다. .. 이곳으로 오면서 나는 내 운명을 데려왔네. 운명이 나를 데려온 것이 아니네. ... 번 돈의 반쯤은 떼어 내어 아무렇게나 어디서나 마음 내키는 대로 써버리네. 내가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이 내 노예인 것. (p. 205)


제게 이 친구만큼의 용기나 증오는 없습니다. 다만 이 공간을 망쳤던 게 정치이고, 때로는 거지 같았던 한국의 언론과 정치에 구역질이 났고, 인터넷을 떠도는 중상모략과 날선 언어가 지금도 싫은 것에서는 이 친구와 비슷한 감정을 느낍니다. 이 감정을 깊게 들여다보면 내 속에 악마 같은 게 숨어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치사하고 더러워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여기서 뭐를 하든지 돈을 벌고, 모두를 벌벌 떨게 만들거나 존경하게 만드는 성공이라는 걸 해보고, 내 속의 악마에 나를 맡기고 브레이크 없이 가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겁니다. 꽈당 부딪히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말이죠(p. 217). 다른 한편으로 내 속에 하나님과 수도승이 살아있다는 것도 느끼곤 합니다. 예쁘고 부유한 사람과 돈과 술통과 권력을 좋아하는 만큼 교회와 예배와 하나님과 수도승과 못생기고 가난한 사람을 좋아하는 내가 있는 거죠.

 


이 가운데서 제가 조르바를 좋아하는 것은 쭈삣거리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할 수 있는 것은 무슨 짓을 하든지 화끈하게 한다는 거죠. 악마도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말이죠.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나는 지금 이 순간도 얼마나 망설이고 흔들리고 있는지...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장나는 겁니. 말도 어정쩡하게 하고 선행도 어정쩡하게 하는 것,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건 다 그 어정쩡한 것 때문입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하는 겁니다. 못 하나 박을 때마다 우리는 승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악마 대장보다 반거충이 악마를 더 미워하십니다.! 어디든 무엇이든, 일 포도주 사랑 뭐든, 자신을 던져 놓고 하느님과 악마를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p. 335)


~ 멋지지 않나요? 어정쩡하면 모두가 끝장인거에요. 아니 내가 끝장인 거예요. 못 하나 박을 때마다 승리해야 한다는 조르바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무언가 불끈 힘이 솟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작은 것 하나, 일상 하나에서부터 승리해 나가야 하는 거예요.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게 진실이고 저게 거짓이다, 그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요? 내 팔과 가슴과 다리는 움직이지 않고 침묵하면서 입으로만 툴툴되고 있는데...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이건 진실이고 저건 아니다, 그 사람은 옳고 딴 놈은 틀렸다. 그래서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당신 팔과 가슴을 봅니다. 팔과 가슴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침묵한다 이겁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아요. 흡사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것 같다 이겁니다. 그래,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건가요, 머리로? 웃기지 맙시다!” 324


그래요, 웃기지 맙시다. 머리로 뭘 이해하고 말로 뭘 떠든다는 건가요? 지금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별 것 없어요. 바다, 사랑, , 그리고 노동!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을 던져 놓고 두려워하지 않는 거죠. 화끈하게 해보는 거죠. 무엇이든 말이죠. 조르바의 이야기를 읽고 읽다보면 내 자신을 격려하며 걸음을 재촉하는 나를 발견하곤 합니다. 내 안의 조르바를 마주하게 되는 거죠. 그러다보면 어깨가 펴치고, 세상이 놀랍도록 즐거워지며, 사람들이 기막히게 사랑스럽게 보입니다. 아니 사랑스러운 게 아니라 각자의 악마와 하나님을 품고 사는 모든 인간들이 불쌍해집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자 역시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한다. 이자 속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있고, 때가 되면 뻗어 땅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된다.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 모두가 구더기 밥이니깐. (p. 329)

 

누군가에게 큰 기대를 걸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100년 후면 모두가 구더기 밥이 되는 인간이 불쌍할 뿐입니다. 거짓말쟁이라고 매도당하고, 화냥년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사람들에게 붙잡혀 블라우스가 찢겨 나가고 머리와 이마와 뺨에서 피가 흐르는 그 사람이, 그에게 모진 말을 하고 블라우스를 찢고, 단도로 목줄을 따버리는 그 인간이 불쌍하고 슬프고 부끄럽고 그런 겁니다.

 

부불리나가 아팠다. 나는 마을 길로 들어섰다. 인적이 끊긴 과부네 뜰에서 향긋한 바람이 불어왔다. 미미코는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얻어맞은 개처럼 꽁알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니 미미코?

나는 정원을 바라보았다.

그런 건 왜 물으세요? 가서 일이나 보세요.

담배 주랴? 이제 담배는 안 피우겠어요. 모두가 돼지 새끼들 같아. 당신네들 전부, 전부 다! 돼지들 건달들 사기꾼들 살인자들.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들.

미미코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그는 웃기 시작했다.

네 말이 맞아 미미코. 네 말이 맞고 말고.

내가 그를 달랬다. (p. 370)


마을의 과부가 화냥년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하며 마을 사람들에 의해 집단구타를 당하고 따돌림을 당하고 결국에는 목이 베입니다. 마을의 퇴물 캬바레 가수 부불리나가 죽어가는 꼴을 모든 마을 사람들이 구경하며 낄낄댑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돼지들이고 건달들이고 사기꾼들이고 살인자들입니다. 죽어가는 자와 낄낄대는 자들 사이에서 나는, 조르바는,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 걸까요?

 

어느 날 눈 덮인 마케도니아 산에 굉장한 강풍이 일어났지요. 나는 불가에 홀로 앉아 웃으면서 바람에 약을 올렸어요.

이것 보게. 아무리 그래 봐야 우리 오두막에는 들어올 수가 없어.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을 테니까. 내 불을 끌 수도 없겠어. 내 오두막을 엎어? 그렇게는 안 되네.

조르바의 이 몇 마디 안 되는 말에서 나는 인간이 취해야 할 도리와 강력하면서도 맹목적인 필연에 부딪혔을 때 우리가 맞서 대적할 어조를 감득했다. 나는 호령했다. 내 영혼에는 들어오지 못해. 문을 열어주지 않을 거니까. 내 불을 끌 수도 없어. 나를 뒤엎다니. 어림없는 수작. (p. 421)


결국 조르바가 강조하는 것은 외부의 강풍에도 꿈쩍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입니다. 광산이 무너져도 춤을 출 수 있고, 종이와 잉크는 지옥에나 보내 버리고, 상품이나 이익을 개코로 비웃으면서 인내와 날램과 용기와 긍지에 찬 자유, 기민하고 맹렬한 스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유가 이 질퍽한 세상에서 수많은 환희와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근간이 되는 겁니다. 이 자유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내 안의 하찮은 확신, 이익이 얼마고 손해가 얼마고를 따지는 좀스러운 가게 주인 같은 머리, 내적 불안, 공포에 함몰되는 마음을 물릴 칠 필요가 있다고 조르바는 큰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좀스러운 마음과 머리의 장벽, 내가 스스로를 묶고 있는 줄을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고 살맛나게 산다는 것이죠.

 

이제 마무리, 과연 우리는 조르바가 말하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화자인 나는 그러지 못하고 조르바를 떠나보냅니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언젠가는 자를 거요."

내가 오기를 부렸다.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 합니다. 당신에게 좋은 머리가 있는데,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상점과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좀상스러운 가게 주인이지요. 가진 걸 다 걸어 볼 생각은 않고 꼭 예비금을 남겨 두니까.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더 붙잡아 맬 뿐이지. 줄을 놓쳐 버리면 머리라는 병신은 허둥지둥합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지. 그러나 인간이 이 줄을 자르지 않을 바에야 살맛이 뭐 나겠어요? 잘라야 인생을 제대로 보게 되는데." (p. 432) 


과연 자를 수 있을까요? 과연 계산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유라는 건. 그러나 바로 이 마음 때문에 나는 오늘도 일상에서 지옥과 불안을 경험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자유에 대한 열망과 자유에 대한 불안 속에서 오가는 일상이겠지만, 이 책을 덮으면서 기억하고 싶은 것은 하루 하루를 살아간다는 건 축복이라는 것, 인생이란 놀라운 기적이라는 것, 우리는 매일같이 새로운 삶을 창조해간다는 것, 그리고 어디에서든 용기를 내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 속으로 묻겠다는 것.

조르바라면 뭐라고 할까?”

인생은 무서워하면 끝장인 겁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그리스 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스키의 묘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