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퇴근 길 한강을 걸어오면서 주변을 돌아봤습니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사람, 음악을 들으며 조깅하는 친구, 돗자리를 펴고 친구들끼지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미세먼지가 걷히며 조금씩 선명해지는 하늘, 엉금엄금 살포시 강변북로를 밟고 있는 차들, 한강을 흐르는 유람선, 녹음이 짙어진 나무들, 개망초, 노랑선씀바귀, 벌사상자, 벳지, 냉이꽃, 지칭개, 노랑꽃창포, 민들레, 애기똥풀, 인동덩굴 등등 수많은 이름 모를 야생화들. 제게 여전히 이 모든 것들은 스쳐가는 풍경에 불과하지만 조르바는 다릅니다.
조르바는 울타리 곁을 지나다 갓 핀 수선화 한 송이를 꺾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그 꽃을 들여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이, 수선화를 생전 처음으로 보는 사람처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눈을 감고 냄새를 맡더니 한숨까지 쉬었다. 그는 꽃을 내게 건네주었다. 두목,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 거예요. 두목, 언제면 우리 귀가 뚫릴까요!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만물, 돌, 비, 꽃 그리고 사람들을 안을 수 있을까요? (p. 140)
정말 언제 즈음 저의 귀는 뚫릴까요? 언제면 팔을 벌리고 만물을 안을 수 있을까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점점 더 말만 많아지고, 팔이 있어도 누군가를 안기는커녕 점점 더 경계만 하는 나를 보면서 조르바의 질문이 심장을 찌릅니다. 귀를 막고, 팔은 펼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세상과 관계에 대한 경계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인연과 세상이 내게 들어왔을 때 그게 펼치게 될 사건과 말썽을 경계하는 거죠. 연애가 힘든 것, 사랑이 힘든 것, 우정이 힘든 것, 떠남이 힘든 것, 어쩌면 이것은 모두 골치아픈 말썽에 대한 무의식적 울타리치기의 결과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당신에게 이가 있지요? 그럼 이를 박아요.
말썽이 생기는 건 질색이에요. 내가 짜증으로 응수했다.
말썽이 질색이라고!
조르바가 어이없다는 듯이 소리쳤다.
산다는 게 곧 말썽이오. 죽으면 말썽이 없지. 산다는 것은, 두목,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
조르바의 말이 옳다는 건 나도 알았다. 그러나 그럴 용기가 내겐 없었다. 타인과의 접촉은 이제 나만의 덧없는 독백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타락해 있었다. 여자와의 사랑과 책에 대한 사랑을 선택하라면 책을 선택할 정도로 타락해 있었다.
두목, 계산 같은 건 이제 그만 하쇼. 숫자 놀이는 그만두고 저울은 부숴 버리고 구멍가게는 문을 닫아 버리라고요. (p. 151)
계산 같은 건 그만 하라는 조르바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들라는 조르바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정말 나를 골치 아프고,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누군가가 아니라 “말썽”과 “사건” 앞에서 쭈삣거리기만 하는 나의 타락 때문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타락에서 탈주해 진정한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조르바는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 성탄절 잔치에 들러 진탕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람들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뭍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 문득, 기적이 일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동화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p. 177)"
행복이란 나와 타자의 경계를 허무는 일이기도 하고, 나의 인식과 행동, 육체와 마음, 그리고 세계를 일치시키는 일이기도 하며, 지금 이 순간에 온 에너지를 다 투자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루를 지내고 집에 돌아오는 날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날 우리는 “주위 세계에 함몰된 소박하고 단순한 모습, 여자, 빵, 물, 고기, 잠, 주위 세계의 모든 것이 유쾌하게 육화하여 내가 되고, 우주와 인간이 다정하게 맺어진 하나의 예시(p. 195)”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사는 게 팍팍해질수록 사람들은 요가, 명상, 종교 등 영적인 것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어느 날부터 종교 활동도 열심히 하고, 태극권도 배우고, 수많은 철학가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는 것은 이 복잡한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발버둥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핵심에는 “자기 비우기”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 “비움”에 대해 조르바는 “아 여보쇼! 그거야 말로 최후의 인간이지!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슈?) 최후의 인간 옆에는 물이 흐르지 않고 풀도 자라지 않으며 아기도 태어나지 않아요! 열심히 비워보쇼. 그러나 이것 하나는 잊지 마요. 인간 본질은 야만스럽고 거칠며 불순한 것이요. 사랑과 육체와 불만의 호소로 이루어졌단 말이지. 근데 자신을 비운다고? 그거야 말로 세련된 사기극 아니요?”
이 이야기에 딱히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면 저는 어찌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작중 화자의 대안은 이런 것입니다.
“나는 단호하게 원고를 잡았다. 나는 나 자신에게 말하며 쓰기 시작했다. 아니 쓰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이었다. 무자비한 추격전, 포위 공격, 은거로부터 괴물을 불러내기 위한 주문이었다. 예술이란 사실은 마법의 주문. 예술은 우리의 오장 육부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의 살인적인 힘을 충동질한다. 필사적으로 살인과 파괴와 증오와 타락을 충동질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술은 달콤한 노래로 다시 나타나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이다." (p. 199)
정리해보니 결국 대안은 예술이고 문학이며 음악이며 드라마네요. 열심히 응원하고 듣고, 이야기하고, 나 역시 단호하게 원고를 잡고 쓰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착한 글 말고 무자비한 추격전, 포위 공격, 괴물을 불러내기 위한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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