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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즐거움/유목과 제국

[제국의 구조] 1부 잃어버린 자유를 탈취하라!



유목의 삶, 제국의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요즘 제 몸에 익히고 싶은 게 있다면 유목의 삶, 제국의 삶입니다. 우리는 흔히 유목하면 저 푸른 초원만 생각하고, 제국하면 미국을 먼저 떠올리기 마련인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유목은 초원만큼 낭만적이지 않고, 미국은 제국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유목은 무엇이고 제국은 어떤 의미일까요? 지금부터 가을에 읽을 책들은 이 두 개념 위를 오갈 겁니다. 그로부터 개별적인 자유와 집합적인 다원성을 강조하는 유목과 제국의 구체적 면모를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으려 해요.

그 첫 번째 책은 가리타니 고진의 [제국의 구조]입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이 2014년에 쓴 책인데요. 그는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제국주의시대와 비슷하다고 진단합니다. [미스터 선샤인]의 배경이 되는 그 시대의 느낌과 지금의 시대가 사뭇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은 일찍이 청일전쟁 시기에 있었던 일의 반복입니다.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즉 일본, 중국, 조선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 당시 미국과 일본은 결탁했으며, 이후 일본이 조선을 취하고 미국이 필리핀을 취한다는 밀약을 맺습니다. 이와 같은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상황은 오히려 현재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이 말에 동의하시나요? 저는 좀 의아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나의 시선이 그렇게 부감에서 시대를 조망할 정도의 높이는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겠죠. 다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강국 사이의 갈등, 북한을 둘러싼 동북아 정세의 변화 등 최근의 뉴스를 보면 고진의 현실진단이 조금 의아해도 믿어보고 가보려 합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인정할 경우 큰 일도 이런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국가의 어려움이 동시에 우리의 삶을 강타하는 시기가 바로 19세기 후반이기 때문이죠. 그 위기의 결과로서 조선은 일본에 합병됩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조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하는 시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진은 지금과 같은 국가 간의 필사적인 자본 축적의 몸부림이 전쟁으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고 말합니다. 설마 그럴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의 팽창에 어느 순간 한계가 올 때, 그 한계에서 어느 국가도 예외가 아닐 때, 그것을 돌파하는 전략으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게 고진의 섬뜩한 미래 전망인겁니다.


위기의 오늘에 대한 고전 선생님의 대안, 제국 

 

그렇다면 고진이 생각하는 대안은 무엇일까요? 이 지점에서 고진의 사유는 근대라는 경계를 훌쩍 넘어섭니다. 근대 이전 오래된 미래에 존재했던 옛 제국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보는 것이지요. 제국은 유목민적 요소와 정주농민적 요소를 통합한 체제입니다. 그 속의 여러 공동체나 소국들에 평화·안전·번영을 확보해줌으로써 환영받는 존재이기도 하죠. 제국은 그것이 어느 시대든 다수의 민족, 국가, 인종, 종교를 인정하고 통합하는 원리를 지니고 있는데요, 근대 이후 국민국가 개념이 확대되고, 헤게모니를 쥔 특정 국가가 타민족과 국가를 지배하면서 제국이 아니라 제국주의로 변모하게 되었다고 고진은 진단하고,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변모, 이게 인류 문명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이라 강조합니다.

 

제국이 미래의 대안일까요? 가리타니는 인간이 사회구성체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생산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교환양식에 의해 설명된다고 보는데요, 그렇다면 과거 제국에서 펼쳐지던 교환양식에 오래된 미래의 지혜가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교환 양식하면 우리는 흔히 화폐를 환전하거나, 물건을 구매하는 것 같은 상품 교환만 생각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좀 꼼꼼히 주변을 살펴보면 교환의 방식은 실로 다양합니다. 가족이나 이웃에서는 (많이 사라졌지만) 증여와 답례라는 호수 교환이 있구요. 피지배자가 힘 있는 지배자에 복종을 하는 대신 보호를 받는 교환도 있죠. 상품 교환 안에서 교환의 종류도 다양하죠. 화폐와 상품의 교환이 있다면, 화폐와 노동력의 교환도 있고, 부동산의 교환도 있죠.

 

이처럼 다종다양한 교환양식을 고진은 크게 4가지로 구분합니다.

A 호수, B 약탈과 재분배(지배와 보호), C 상품교환(화폐와 상품) D 이들을 넘어선 그 무엇이 그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 국가가 탄생하기 전 씨족사회의 교환양식이 A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국가의 성립 이후 근대 이전까지 세계를 지배하던 제국의 저변에는 B의 교환양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도래와 맞물려서는 C가 중심이구요. 그렇다면 고진이 배워야한다고 강조하는 제국의 교환양식은 단순히 B일까요? C가 파생하는 문제를 풀기 위해 B로 돌아간다?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을 겁니다. 고진은 이 부분에서 AB를 해체한 후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것을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D라 말합니다.


억압된 것의 회귀 교환양식 D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교환양식 D가 인간의 의지나 욕망, 상상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의지에 반하여 부과된 명령=의무로서 생겨난다는 점입니다. 교환양식 D가 보편종교에서 시작한다는 거죠. 이 부분에서 고진에게 가장 큰 영감을 준 학자는 세계종교, 세계공화국을 주창한 칸트인데요. 칸트는 내적 이성에 도덕법칙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법칙은 바로 이겁니다.

각 사람은 타자를 그저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다뤄라.”

목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자유의 존재로 다루는 것인데요, 칸트는 이 자유의 상호성을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지향해야 할 내적 이성의 도덕법칙이라 말합니다. 이 법칙이 또 다른 말로는 신의 명령이고, 고진의 언어로는 교환양식 D에 해당하는데요, 이 부분에서 흥미로운 것은 교환양식 D가 인간의 욕망, 의지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의사에 반해 강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강박적인 형태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에 대해서는 고진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시죠.

이런 사고는 예를 들어 모세와 일신교에 제시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모세와 그 신은 한 번 살해당하고 이후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출현했다고 주장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가설은 역사적 사실과 배반되지 않는다. 만약 모세의 가르침이 사막에서 살았던 유목민사회의 윤리, 즉 단독성과 평등성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정주한 가나안땅에서 발전한 전제국가 하에서 살해당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나안 사람들은 정주하고도 과거의 생활을 전면적으로 방기하지 않고 말하자면 그것을 저차원적으로 회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상태야말로 억압 또는 망각의 완성태이다. 거기서 모세와 그의 신이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도래한 것이다. 즉 일찍이 존재했던 유목민시대적 윤리의 고차원적인 회복은 공동체의 전통이나 사제에 반해 예언자를 통해 신의 말로서 즉 강박적으로 도래했던 것이다. 과거에 존재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전방(미래)에서 도래한다. ... 다른 관점에서 말하자면 과거의 것이 회귀할 때 그것은 미래에서 도래하는 형태를 취한다. 미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란 교환양식 d. 그것은 교환양식 a를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항상 아직 의식되지 않은 것또는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나타난다.” (P. 50)

 


정리를 해보면 고진은 지금의 문명사적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제국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제국의 회복이란 과거에 존재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미래에서 도래하는 새로운 교환양식 D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교환양식 D는 인간의 의지, 욕망에 의해 오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 예언자를 통해 신의 말로서 강박적으로 도래하는데,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는 이것!

각 사람은 타자를 그저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목적으로 다뤄라.”

잃어버린 자유를 집단 차원에서 최대한 회복하라!”

 

[제국의 구조] 첫 번째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