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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독서일기

개인주의자는 황금률을 지키옵니다 :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 선언>을 읽었습니다.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는 서구 근대철학에 있어 동전의 양면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사회는 국가주의와 시장주의가 워낙 강하게 지대를 점령하고 있어 이 두 개의 근대성 축이 자리를 잡기 힘든 상황이죠.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근대성으로 핵심 축으로서 합리적 개인주의를 허하라!” 정도 되겠습니다. 합리적 개인주의가 뭐야? 너무 추상적이고 학구적으로 보이시나요? 그러나 그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정말 고민하는 겁니다

~ 난 세상의 인정, 사랑, 존중 그런 것 받고 싶지 않아요. 세상에 전면적으로 헌신하고 싶지도 않고, 광장에 있으면 피곤해지고, 술자리에서 우리가 남이가외치면 도망치고 싶어요. 제발 저 좀 그냥 놓아둘 수 없나요?

 

개인주의자 문유석 판사의 고민은 오롯이 자신의 행복입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고민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문장 그대로 전해보면 이렇습니다.

 

개인주의자로 살다보면 필연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고민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타인을 존중해야 하는가. 최소한 그들을 참아주기라도 해야 하는가. 왜 가끔은 양보해야 하는가. 내 자유를 자제해야 하는가. 타협해야 하는가. 연대해야 하는가. 결국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목적이고 나머지는 방편이다. 호모사피엔스에게 있어 타인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최고의 유용한 자원이다.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개인의 행복을 위한 도구인 집단이 개인의 행복의 잣대가 되어버리는 순간 집단은 바다괴물로 돌아가 개인을 삼킨다.” (p. 11)


정말 그렇죠? 회사도, 조직도, 공동체도, 국가도 결국 나의 행복을 위한 존재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이게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보다는 불행하게 만들곤 합니다. 남들 눈에 비치는 내 모습,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집착, 이런 낭비로 삶을 낭비하고, 스스로를 불행하게 구석으로 몰아가는 겁니다. 저라고 뭐 다르겠습니까? 내 조직이 내가 되고, 내가 졸업한 학교가 내가 되고, 사는 동네가 내가 되고, 이러면서 스스로의 경계를 좁혀가는 거죠.

 

그래서 행복하냐구요? 즐겁냐구요? 물론 즐거울 때도 있죠. 그러니깐 스카이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땄을 때, 밥벌이 하는 공간에서 승진했을 때, 마눌님이 시간강사 딱지를 떼었을 때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무슨 대단한 사건이나 성취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고 무덤덤해지죠. 이건 생물체의 기본 메커니즘인 적응 때문이라고 문유석 작가는 이야기해요. 이 매커니즘 때문에 행복 전략에 있어 다양하고 자잘한 즐거움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강한 한 방보다 훨씬 좋다고 해요. 이건 그의 주장이라기보다는 여러 심리학의 연구결과이기도 하죠.

 

그렇다면 어떻게 다양하고 자잘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요? 과학이 알려주는 자잘한 행복의 지속성은 가족, 연인, 친구, 동료 등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느끼는 만족감이 핵심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딜레마가 있습니다. 제가 사주명리와 동양철학을 한참 공부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관계는 때론, 아니 자주 시련이에요. 사주명리에서 관성이라는 게 있는데 이게 이른바 관운이라는 건데, 이 기운이 센 사람은 리더십이 있고, (여자의 경우) 남자에게 인기가 있고, 조직에서 승진의 기회가 많다고 합니다. 이 기운이 관계적으로 봤을 때 공식적이고 조직적인 대인관계망, 네트워크 기운을 의미하는데(이른바 마당발을 의미하죠~), 이 기운이 실은 자기를 치는 기운이라고도 해요. 한마디로 관운이 세면 관계 때문에 시련도 많다. 그런 이야기죠. 이게 딜레마입니다. 우리는 사람 때문에 행복하지만 또 그 사람 때문에 괴롭다. 특히 우리와 같은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그 관계의 속성(관성!) 때문에 불행의 원천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갑을관계, 상명하복관계, 나를 평가하고 지배하는 관계, 내가 일방적으로 순종하고 모셔야 하는 관계에 있는 인간들 속에서 어찌 행복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러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국의 개인주의자들이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p. 58)"


그의 이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개인주의자선언을 넘어 개인주의의 관점에서 본 한국 사회의 문제를 조금은 쿨하게 조금은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상당부분 새겨들을 부분이 많습니다. 인상적인 것 일곱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인터넷 선비들과 막말들에 대하여..

인간 세상에는 하늘에 뚝 떨어진 가치중립적인 팩트란 없다. 요즘 인터넷에는 왜 선비인 척 하느냐라는 용어가 횡행하다. 선비가 모멸적 용어인 세상이다. 위선 떨지 말라는 뜻이다. 속시원한 본능의 배설은 찬양받고, 이를 경계하는 목소리는 위선과 가식으로 증오받는다. 그러나 본능을 자세하는 것이 문명이다. 저열한 본능을 당당히 내뱉는 위악이 위선보다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 나치들은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며 유대인의 열등함, 사악함이 모든 문제의 원흉이며 아리아인의 우수성이 팩트라는 우수성까지 주장했다. 성실하고 착한 가장들이 이웃들을 대량학살하고 그 피하지방으로 비누를 만들었다. 그게 우리 인간의 악한 본성이다. 여성 차별, 흑인 차별, 이민자 증오. 우리의 본성은 전자발찌를 채워야 할 상습 전과자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선비질을 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후배 세대의 위악은 선배 세대인 나 같은 사람들의 위선이 낳은 것이다. 열린 교육과 인간화를 주장하며 뒤로는 내 자식만 잘되라고 선행학습이라는 이름의 조직적 커닝을 시키느라 고전을 읽고 인간과 사회에 대해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권위주의와 싸운다는 명분으로 막말과 냉소가 주는 쾌락에 도취했고 그 결과 진보와 보수라는 탈을 쓴 반지성주의가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는 인터넷 생태계를 만들어냈다. 후배들에게 사과한다. 기득권은 다 누린 주제에 극심한 경쟁과 불투명한 미래에 좌절하는 후배들을 싸잡아 욕하는 선배의 일원이기에 말이다. (p. 134)


둘째, 과학의 시대 문학이 필요한 이유

실제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 중 상당수는 인과관계도 동기도 선악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 신문기사처럼 몇 문장으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참 많다. 하루키는 픽션을 읽어본 경험의 부재가 엘리트 과학도를 광신도로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검증된 법칙고 데이터의 세계에서만 살던 이가 아사하라 쇼코(옴진리교 교주)처럼 통상적인 사고의 범주를 넘어선 예외적 인간의 극단적인 상상력과 조우했을 때 오히려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협소한 상식에만 갇혀 있는 인간은 비상식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인간과 세상을 깊이 이해하는 데 실패하기 십상이다. 더 많은 문학이 필요한 이유다. (p. 156)

 

셋째. 진정한 영웅에 대한 생각

조너선 하이트에 의하면 사람들은 도덕적 판단을 하는데 있어 자신이 속한 사회집단의 의견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한데, 만일 집단 내의 도덕적 입장이 빠르게 변했다면 이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다른 의견이 용인된다는 신호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의견이 명백히 나뉘는 사안에서 반대되는 입장의 상대방을 설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반대 의견을 듣고 나면 오히려 기존의 신념을 강화한다는 것이 심리학계의 정설이지만, 비슷한 의견을 가진 집단 내부에 균열이 생기면 집단 전체가 마음을 바꾸는 일도 벌어질 수 있다. 실제로 의미있는 변화를 도출하는 것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 과격한 목소리들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의견을 가진 집단의 반발과 결속만 강하게 만들어 의견의 양극화를 심화시킬 뿐이다. 한 진영 내부에 생기는 작은 균열에서 변화의 지점이 생겨난다. 이 균열을 만드는 것은 같은 진영 내의 온건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작고 부드러운 다른 목소리들이다. 작은 균열들이 생기기 시작하면 선거와 같은 큰 세력 다툼의 시기를 전후하여 집단 내부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생긴다. 실제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코끼리를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과 맞서 싸우기보다 슬쩍 다른 길로 유도하는 방법을 택했다. 거창하고 근본적인 해결책만 고집하지 않고 당장 개선가능한 작은 방법들을 바로 적용했고, 작지만 끊임없는 균열을 일으켰다. 영웅은 이런 사람들이 아닐까. (p. 163)


넷째, 진영논리에 대하여

불편한 진실 자체에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어 왜곡하지 말고, 그 진실을 토대로 어떻게 사회를 개선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관점에 따라 한쪽 측면만 이야기하고 다른 측면은 애써 외면하는 진영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는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하다.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가 서로를 부정하는 것은 비극이다. 그림자를 강조하기 위해 빛을 애써 지울 필요도 없고, 빛을 강조하기 위해 그림자를 외면할 필요도 없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이 사회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출발점이다..... 실사구시 정신이 필요하다. 집단의 논리, 막연한 믿음보다 실증적 근거를 들어 토론하고 최선이 안 되면 차선, 최악보다는 차악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진실의 일부분을 자신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한쪽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승리란 존재하기 어렵다. 상대를 몰살하는 전쟁이 아닌 이상 중간에서 타협하는게 현실적이다. 당파적 진영 논리는 이 복잡하고 힘든 과정을 생략하려는 게으름이다. 아름다운 윤리와 당위만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 인간의 이기심,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일단 인정하고 그걸 출발점으로 타협할 지점을 찾는 냉정함이 현실적이다. 세상이 복잡하다고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신념과 분노에만 의지하다가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도 최악의 결과만 가져올 수 있다. 의심하고 근거를 찾고 다시 생각하고 아니다 싶으면 주저 없이 결론을 바꾸는 노력 없이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깨어 있어야 한다. 미래는 우리가 공동구매해야 하는 어떤 거다. 내 협소한 경험 안에 갇히고 울컥하는 감정에 치우치게 되면서도 다시금 차분히 반성하게 될 때 드는 생각이다. (p. 201~204)

 

다섯째, 과도한 이념논쟁에 대하여

나는 모든 집단주의를 혐오하는 전투적 개인주의자이며 이념보다도 태도가 후진 사람, 상상력이 빈곤한 사람을 더 견디기 힘들어한다. .. 어느 하나를 이야기하면 그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를 제기하는 저의부터 의심한다. 그냥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고 한 것인데.. 20세기식 이념의 시대는 끝이 났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보수 정당 역시 수정자본주의, 복지국가를 부인하지 않는다. 이념이란 신념의 체계이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가 없다. 그 결과 수천만 단위 희생을 낳았다. 그러나 정책은 토론과 타협이 가능하다. 동태적 과정이 중요하다. 이념이든 정책이든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 과도한 이념 논쟁은 두가지 점에서 위험하다. 첫째, 실제적으로 필요한 토론과 의사결정을 방해한다. 각 안의 장단점을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 따지는 머리 아픈 과정을 우리 편의 주장인지 적들의 주장인지로 대체하는 반지성주의를 낳는다. 둘째, 삼인성호. 몇몇이 떠들어대면 호랑이도 만들어진다. 몇몇 소수가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념투쟁을 벌이는 것을 보다보면 마치 이 사회에 진짜 심각한 이념 대립이 있는 것처럼 착시 현상이 생긴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인류는 속을만큼 속았다. 좌우자판기를 철거해야 하는 이유다. (p. 209)


여섯째, 내부고발자에 등돌리는 한국인의 윤리관에 대하여

민주주의는 투명성을 전제로 한다. 자본주의는 효율성을 필요로 한다. 잘못을 은폐하는 문화는 투명성도 효율성도 침해할 뿐이다. 이런 문화 속에 작은 종양이 말기 암으로 진행되어 조직을 썩게 만든다. 파렴치한 성추행 교수들이 수십 년째 어린 여제자들을 건드리며 자리를 보전하곤 한다. 사실 한국 사회의 윤리관은 조폭의 의리 수준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 웃픈 것은 배짱도 기회도 없는 소시민들이 가당치도 않게 조직의 보스에 감정이입하고 동정한다는 점이다. 현실의 조폭에게 의리 따위는 없다. 이익이 있을 뿐이다. 그것도 조직의 이익이 아니라 보스와 간부들의 이익이 있을 뿐이다. 말단 조직원은 소모품이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조직에 이용당하는 호구에 불과하다. 공범도 되지 못한다. 내부고발자는 결과적으로 당신의 몫을 가로챈 권력자들의 치부를 폭로하여 당신에게 이득을 주는 사람들이다. ... (p. 212)

 

일곱째, 결국 남는 질문은 두 가지.

인간사회는 참 묘해서 교과서처럼 정의가 늘 승리하지도 않고 거기 앞서 정의가 무엇인지도 정의하기 어렵고 선의에서 비롯한 정책이 사람들의 고통만 심화하기도 하고 인간의 능력과 노력에는 많은 격차가 있고, 빈곤고 불평등에는 사회가 책임질 부분도 있지만, 개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도 분명 있다. 이런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뭔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훼손되는 걸까? 결국은 직시할 문제와 모색할 해결책 두 가지가 있을 뿐 아닐까? p. 229

 

문유석 판사는 어찌 보면 묵직하고 민감한 문제를 아주 상식적인 수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솔직하고 소탈하게 이야기합니다. 이 점이 좋았습니다. 책을 덮으며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나는 합리적 개인주의자인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조직논리, 진영논리, 집단논리에 이용당하는 호구가 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당위와 도덕적 잣대로 세상을 타자를 재단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무엇보다 내가 누군가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와 행동을 남에게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결국 개인주의자 선언은 황금률의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네요.


개인주의자는 황금률을 지키옵니다. 그게 기본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