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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독서일기

내 사랑하는 친구 조르바 (1)


과거에는 이런 저런 책들을 마구 마구 읽어내는 것에 대한 어떤 갈망이나 조급이 있었습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드는 것처럼 읽는 것에도 이런 허기가 있었던 거죠. 어느 날 거실에서 여기저기 무질서에게 자리 잡은 책들을 바라보다 이제 왠만하면 책을 그만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작가와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읽자는 마음을 먹었다네요. 천천히, 오래오래. 그렇게 지난 한 달 제 가방에는 카잔스키의 [그리스 인 조르바]가 있었습니다.

 

조르바를 처음 만났을 때 그건 충격이었습니다. 너무 마초적이야. 누군가는 조르바의 야수성과 마초적인 목소리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게 조르바는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일상이 무력해질 때 그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하하하 일상에 새로운 기운이 샘솟습니다. 조르바를 만난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제대로 살면 그걸로 족하다는 걸 자기만의 언어로, 아니 몸으로 표현해낸 독보적이게 자유로운 한 인간을 만나는 일입니다. 강력한 자극을 받기도 하고, 나의 초라한 몸을 돌아보게 되기도 합니다.

 

사실 그리스 인 조르바를 나의 언어로 재현해 낼 재간은 없습니다. 그런 시도조차 무의미합니다. 그냥 그의 목소리 하나 하나는 압축할 수도 요약할 수도 없는 풍성한 삶의 지침 같은 것입니다. 조르바는 강렬하고 자유로운 힘과 봄날의 생동감, 그리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자신에 대한 자부심으로 응축된 덩어리입니다. 그의 삶에는 지겨울 틈이 없고, 무료한 여지가 없습니다. 늘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그리하여 이 정도면 됐다라는 만족의 여지가 없으며, 일상에 마주하는 소소한 모든 것, , 나무, 여자, 우정, 음악, 노동, , 바다, 돌맹이 모든 것을 황금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와 마주하게 되는 모든 것은 스쳐가는 풍경, 소외되고 외로운 존재, 나약하고 무료한 생명에서 원시적이며 열정적이며 살아있는 존재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뜨겁고 다정하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그런 존재가 되는 거죠.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이유입니다.

 


다시 한 번 그의 책을 읽어보니 [그리스 인 조르바]는 조르바가 세상에 전하는 어록 모음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 앞에서 쭈삣거리는 사람들에게, 일상이 무료하다며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죽음을 두려하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며 함께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자는 격려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고함을 치며 인생 똑바로 안살래!”라는 처방전같기도 했습니다. 특히 머리만 커지고 육체는 퇴화하는 현대인들에게, 허상, 관념, 머리, 정신의 감옥에서 탈주하여 육체에 피, , 눈물을 새기게 하라는 조언이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는 크레타로 가는 길에서 극중 화자인 가 조르바를 처음 만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여행하시오? 그가 물었다.

크레타로 가는 길입니다. 왜 묻습니까?

날 데려가시겠소?

나는 주의 깊게 그를 뜯어보았다. 움푹 들어간 뺨, 튼튼한 턱, 튀어나온 광대뼈, 잿빛 고수머리에다 눈동자가 밝고 예리했다.

왜요?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왜요!왜요! 못마땅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 날 데려가쇼, 요리사라고나 할까요, 당신이 들어 보지도 못한 수프를 만들 줄 압니다.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공갈 비슷한 태도와 격렬한 말투가 우선 마음에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오?

그가 그 큰 머리통을 내저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당신 역시 저울 한 벌 가지고 다니는 거 아니오? 매사를 정밀하게 달아 보는 버릇 말이오. , 젊은 양반, 결정해버리쇼. 눈 꽉 감고 해버리는 거요. (p.17)

 

야생 날것의 배짱 하나로 뭉쳐진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왠지 오늘 마주하게 될 세계가 재미있어 집니다. 누군가를 만나고 일하고 사랑하고 춤추는 일에 설레게 됩니다. 그는 늘 모든 순간에 자신을 아낌없이 줍니다. 일도, 사랑도, 먹는 것도, 여자에게 수작을 부리는 것도, 별을 바라보는 것도, 이야기를 하는 것도, 허투루 하는 게 없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건 육반입니다. 우리 마음이 육반이 되게 해야 합니다. 내일이면 갈탄광이 우리 앞에 있을 겁니다. 그때 우리 마음은 갈탄광이 되어야 합니다. 어정쩡하다 보면 아무 짓도 못하지요."(p.54)

조르바, 그는 남자나 꽃핀 나무, 냉수 한 컵을 보고도 똑같이 놀라며 자신에게 묻는다. 조르바는 모든 사물을 매일 처음 보는 듯이 대하는 것이다. 포도주 한 잔이 돌았을 때 그가 놀란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두목 이 빨간 물이 뭐요? 말해 봐요. 늙은 가지에 새 가지가 뻗으면 처음엔 아무것도 없지요. 그리고 거기 처음에 달리는 건 쓰디쓴 열매뿐이지요. 시간이 지나고 태양이 이 열매를 익히면 마침내 꿀처럼 달콤한 물건이 되지요. 이게 포도라고 하는 겁니다. 이 포도를 짓이겨 성 요한의 날 열어보면 아! 포도주가 되어 있지 뭡니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또 어디 있겠어요! 빨간 물을 마시면 오 보라 간덩이가 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하느님께 시비를 겁니다. 두목, 말해봐요. 대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요!"

나는 조르바의 말을 들으면서 세상이 다시 태초의 신선한 활기를 되찾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지겨운 일상사가 우리가 하느님의 손길을 떠나던 최초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었다. , 여자, , 빵이 신비스러운 원시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태초의 회오리바람이 다시 한 번 대기를 휘젓는 것이었다. (p. 78)

 

그는 모든 순간에 자신을 아낌없이 주지만 그렇다고 인간을 무턱대고 사랑하거나, 사랑하라고 강요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에 대한 그의 관찰은 객관적이고 냉철합니다. 그는 인간을 경멸하고 불쌍히 여기면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과 함께 살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특히 사나이란 여자를 보면 그 여자를 갖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고 큰소리 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 여자란 건강에 해롭고 토라지기 잘하는 동물이면서, 누가, 사랑한다, 갖고 싶다고 하면 웃음을 터뜨리기 때문이죠. 그는 큰 목소리로 말합니다. 남자라면 여자에게 그렇게 말하고 여자를 기쁘게 해줘야 하는 거다! 이런 이야기들 때문에 조르바는 여성 독자들에게 무지막지 욕을 먹기도 합니다. 여성에 대한 지독한 비하와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러나 조르바는 그런 비판과 우려에 대해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받아칠 겁니다.


개코같은 소리. 여자는 당신을 전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당신이 여자에게 입맛이 없을 수도 있고, 여자가 싫다고 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건 문제가 안 됩니다. 여자를 보는 남자는 모두가 여자를 갖고 싶다고 말해야 합니다. 여자란 가엾게도 그걸 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남자라면 여자에게 그렇게 말하고 여자를 기쁘게 해줘야 하는 겁니다.” (p. 70)


좀 불편하다구요? 조르바는 남자든 여자든 인간을 구더기가 될 미물, 짐승으로 봅니다. 여성에 대해 비하과 편견을 가졌다고 비판하기엔 남성에 대한 인식도 가히 우월적이진 않습니다. 모두가 불쌍한 존재들일 뿐이죠. 

 

두목! 남자란 짐슴이에요. 짐승이라도 엄청난 짐승이에요. 두목은 이걸 알지 못해요. 이 짐슴을 사납게 대하면 당신을 존경하고 두려워해요. 친절하게 대하면 눈이라도 뽑아갈 거요. 두목, 거리를 둬요! 놈들 간덩이를 키우지 말아요. 우리는 평등하다, 똑같은 권리가 있다, 이따위 소리는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당신에게 달려들어 당신 권리까지 빼앗고 당신 빵을 훔치고 굶어 죽게 할거요. 두목, 좋은 걸 다 걸고 총고하건대, 거리를 둬요. 아무도 믿지 마요. 나요? 물론 안 믿지요. 아무것도 안 믿어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눈곱만치도 나을 거라고는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조르바의 말이 채찍이 되어 날아들었다. 강인했기 때문에 그토록 인간을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 함께 살고 일하려는 그를 나는 존경했다. (p. 84)

 

그의 이야기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조르바와 함께 땀흘려 일하고 마주하는 크레타의 저녁은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그와 함께 지는 태양을 마주하다보면 행복이라는 것이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다 소리처럼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 뿐인 거죠. 사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껴지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극중 화자인 나는 어느 날 이 행복감을 친구에게 편지로 전하는데요. 

 

사랑하는 친구여, 이곳에서의 기쁨은 적지 않아. 이를테면 맑은 공기, 태양, 바다, 밀로 만든 빵처럼 단순하면서도 영원한 것들이네. 밤이면 기가 막힌 뱃사람 신드바드가 내 앞에 터키 사람처럼 퍼질러 앉아 이야기를 한다네. .. 이따금 이 사람은 야만스러운 노래도 부르는데 듣고 있노라면 우리 삶이 아무 색깔도 없어 보이고 비참하게 보이고 덧없게 느껴져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아진다네. 인간의 영혼이란, 기후, 침묵, 고독,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눈부시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네! ... (p. 136)



여러분은, 저는 지금 어떠시나요? 주변에 존재하는 단순한 것 앞에서 즐거운가요? 누군가에게 조르바가 될만한 우리인가요? 주변에 조르바같은 친구들 좀 있나요? 인간의 영혼이란 기후, 침묵, 고독,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눈부시게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 인상 깊습니다

이 말을 마음에 머금으면서 조르바 1부는 여기서 마무리.

기후, 침묵, 고독, 함께 있는 사람에 따라 인간의 영혼이 눈부시게 달라질 수 있다는 말. 

참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