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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독서일기

자기혁명의 길라잡이 [산 위의 신부님]



박기호 신부님의 <산 위의 신부님>을 읽었습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왜인지 울컥하는 거에요. 이 에세이는 너무도 위트있고 따뜻하며 사랑스런 삶으로 가득차 있는데도 말이에요. 무엇이 마음을 이렇게 흔들었을까, 생각하면 그건 글이 아니라 삶이었던 것 같아요. 박기호 신부님의 삶이 제겐 큰 자극을 준 거죠. 박기호 신부는 2004년 가톨릭 신자들의 영성공동체인 산위의 마을을 세운 사람이에요. 책은 서울이라는 소비와 반생태의 공간을 떠나 단양의 마을을 찾아 떠나는 길에서 시작해요.


산 위의 마을을 찾아가는 여정은 대안이 아니라 원안의 삶을 좇는 한 인간의 발걸음이었어요. “우리가 사이좋게 지냈던 시절의 기억으로 거슬러간다면 서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온다고 믿었던 신부님은 잃어버린 본래의 삶을 찾아 안정된 삶을 누리게 했던 서울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 거죠. 그가 거기서 새롭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공동체였어요. 해와 달, , , , 초가집, 골목길, 밭두렁, 가축, 꽃으로 둘러싸인 곡선의 공동체.


사실 그에게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만한 자본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의 용어로 치자면 클라우디 펀딩을 받습니다. 이 펀딩을 위해 그가 한 것은 천 일의 기도. 여기에서 기도라는 것의 의미를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아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마을건립 청원 천일기도. 기도의 방법. 무엇보다도 천일이라는 기간 설정이 중요했다. 기도 자체에 대한 정화가 되기 때문이다. 기도 가운데 섞여 있는 이기적 사욕과 부정성을 정화시켜내는 힘이 있다. 꼭 필요한가? 진실하고 순수한 방법인가? 물어보고 그 과정에서 중간에 청원이 바뀔 수도 있고 그만둘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추구하는 공동체 마을도 꼭 필요하다면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이루어질 일이고, 아니라면 애만 쓰고 망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 되거든 부르심으로 믿고 헌신적으로 노력했는데 내 소명은 아닌 것 같더라하고 물러서면 그만인 것이다. 그것이 내가 이해하는 기도는 정화다.” 48


기도는 정화다. 멋지지 않나요? 사실 저는 기도란 걸 할 때마다. 어색해요. 어색하다보니 잘 안하게 되죠. 박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기도란 걸 습관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기도를 방해하는 건 인간의 욕망과 이기적인 마음이잖아요. 나를 버리기. 이게 모든 종교의 핵심인데 쉽지 않아요. 주변에서 자꾸 내가 누구인지를 상기시키기도 해요. “넌 이런 사람이야!”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과거의 어떤 기억이 만들어낸 누군가가 말하는 나를 버리는 데방해가 되요. 인간은 안 변해, 넌 늘 똑같아와 같은 질책, 난 네가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와 같은 칭찬. 이런 말을 듣는 순간 나를 버리는 건 어려운 작업이 되요. 지금 이 순간,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고 길을 걷고 옆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기에는 과거의 나, 기억, 상처, 빛, 인정에 대한 욕망, 누군가의 수근거림이 장해물이 되는 거죠.

 

오늘 개인적으로 많이 혼란스러웠어요. 밤이 되어도 어둡지 않고 하늘이 있어도 별을 볼 수 없고, 땅이 있어도 신발에 흙이 묻지 않고, 겨울이 되어도 웅크릴 일이 없고 봄이 되어도 땀 흘릴 일이 없는 이상한 동네에서 사랑, 우정, 관계, 가족, 직장, 일상이 모두 흔들리는 느낌이었어요 이 요상한 동네에서 신체적으로 활력 있고, 마음과 정신이 평화롭고, 자연과 가족과 이웃과의 관계가 사이좋으면 오늘 하루 잘 살았네라고 위무할 수 있을텐데 그렇지 않은 불균형의 상태였던 거죠. 건강하지 않은 하루였어요.

 

어떻게 해야 내일은 이 이상한 서울에서 건강하고 즐겁게 살 수 있을까요? 습관에서 벗어나려 해요. 습이란 몸이 사물과 타자를 대할 때 일어나는 몸의 기억으로 자동 반응인데요, 저에게는 좋지 않은 습관이 많았던 것 같아요. 결별하고 새로운 습관에 도전하려 해요. 장자는 산새는 온 숲을 자기 세상처럼 노니지만 제 둥지는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다고 말했어요. 자유롭게 세상을 노닐고 돌아와 나뭇가지 하나에 만족하는 삶, 필요 이상을 기대하거나 욕망하지 않는 삶, 떠남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 조금은 추상적이지만 절제하고 자유로우며 담백한 단독자로서 순례자의 습을 만들어보려 해요. 99% 잘 안될 줄 알면서도 말이죠.

 

이 새로운 습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산 위의 신부님은 이 질문에 대해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줘요. 일단 같은 가치와 이상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필요할 것 같아요. 박기호 신부님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보면 이래요.

 

어려운 것은 세상을 바꾸는 혁명이 아니라 자기 욕구의 제어와 습관 하나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부터 공동체 수행이 시작될 수 있다. 공동체 생활은 자신과의 투쟁이요, 수행의 풀무질이다! .. 행위는 신념의 문제만은 아니다. 몸이라는 물건은 마음먹은 대로 작동해주지 않는다. 책상 앞의 지성과 흙 위의 몸은 대단히 다른 차원이다. 새로운 삶을 컨설팅하려 한다면 먼저 자신의 몸을 검증하고 보신하는 생활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임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첫째, 문화생활의 개조다. 지출을 과감히 정비해야 한다. 은둔의 시기도 가져야 한다. 친구들에게서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면 뿌리를 내릴 수 없다. 둘째, 새로운 공간에 살아갈 몸을 만드는 일이다. 셋째, 집을 구하는 문제다. 2~3년 친교를 맺고 공부를 하면서 살 곳을 정탐하는 것이 좋다.” (p. 190)

 

사실 이건 귀농을 꿈꾸는 사람들에 대한 조언인데, 꼭 귀농이 아니더라도, 새로운 삶의 장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팁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하나 쉽지 않지만 가장 어려운 건 아무래도 몸의 변화가 아닐까 싶어요. 서울은 참 시끄러운 동네에요. 특히 제가 밥벌이하는 공장은 특히 말이 많은 동네이고, 제가 전공으로 삼는 커뮤니케이션학이라는 것도 담론이다 수사다 언론이다 다 말과 관련된 이야기에요. 사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시끄러운 건 주변이 아니라 바로 저죠. “넌 말만 번지르해.”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뜨끔따끔하는 경우가 있어요. 이에 대해 신부님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말은 많은데 실천이 없는 세상. 이성과 정신, 철학과 교육은 풍요롭지만 노동과 희생, 사랑이 없다. 가르치는 것도 잘하고 배우는 것도 잘하는데 실현이 없다. 머리는 엄청난데 몸과 손발이 작동을 못한다. 행동 없는 믿음, 실천 없는 기도, 증거 없는 삶, 희생 없는 제사가 꽹과리처럼 요란하다. .. 사람이 되는데 필요한 것을 배워 머금고 성장시켜 피워내는 것이 교육이다. 교육이란 사물의 개념을 배우고 그 사물을 대하는 태도를 깨우치는 일이다. 교육은 학습과 노동의 통합으로 완성된다.... 영성, 관계, 노동은 공동체의 세 기둥이다. 몸을 쓰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극복되고 함께 사는 관계가 향상되고 있다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노동이 힘들면 몸 쓰는 일이 두렵고 그것은 가족과의 관계 문제에 투사되어 공동체에 대한 부정성으로 나타난다.” (p. 265~276)

 


자주 걷고, 태극권도 배우고, 엘리베이터도 타지 않고, 이래저래 몸부림을 치지만 이정도 가지고 몸으로 쓰는 노동을 따라가지 못하죠. 좀 더 바지런히 땀을 흘리고, 기도를 하고, 무엇보다 사랑과 희생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 이렇게 쓰고 나니 이 말에 책임을 질 자신이 없어요. 지금의 내가, 그게 가능할까?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백 일 기도라도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박기호 신부님이 쓴 <산 위의 신부님>은 그래서 저한테 하나의 도전이자 혁명 같은 책이었어요. 기도하고 싶게 만든 책, 좀 더 영적이고 관계적이며 노동친화적인 인간이 되고 싶게 만든 책, 앎과 삶의 일치를 독려하는 책, 절제하고 자유로우며 담백한 순례자로서의 삶을 가고 싶게 만든 책. ~ 내가 이런 글을 쓰게 될 줄이야. 마지막 문단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습니다. 기도하러 가야지. 총총.

 

p.s. 마지막으로 책의 한 구절. 잊고 싶지 않아 기록으로 남겨요.


나는 생각하는 존재로서 생의 경험과 믿음도 가지고 있지만 내 생각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더 큰 옳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며 살아간다.

내가 경험적으로 아는 것은 부분일 뿐이며 전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며 살아간다.

내 믿음은 분명하지만 모두가 그 분명함 때문에 속는다는 것을 잊지 않으며 살아간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모두 알 수는 없다는 것을 잊지 않으며 살아간다.

나와 관련된 일이면서도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며 살아간다..

내가 확실하게 모르는 존재와 시간과 공간과 세계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며 살아간다. 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