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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독서일기

인생은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지난 한 달 동안 제 가방에는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똑같은 아침이었습니다. 710, 용산을 빠져나와 노량진으로 연결되는 한강대교로 들어섭니다. 떠오르는 빨간 태양을 쳐다보고, 한강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리스본에 가고 싶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한강, 붉은 빛, 태양, 아침, 파란 하늘 그리고 리스본은 어떤 인연이 있는 걸까요? 가느다란 상상의 실. 지금 여기가 아닌 상상의 그곳이 새로운 삶의 장을 이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습니다. 문득 다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꽤 촘촘하게 천천히 읽어나갔습니다. 

 

한 남자가 있습니다.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 스위스의 아름다운 마을 베른에 사는 고전문헌학 교사입니다. 책 읽기와 고전문헌학의 세계가 삶의 전부인 고리타분한 50대 후반의 이혼남입니다. 제자들은 그를 좋아합니다. 고전, 라틴어, 문학세계에 있어서 강의실에서 그만큼 섹시한 선생은 없는 겁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탁월하게 잘 하는 사람이었고, 학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사랑하는 남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랑했던 여자는 떠났고, 늘 똑같은 옷 스타일과 안경만을 고집하는 외골수였으며, 죽은 단어 몇 가지로 만들어진 듯한 건조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여느 날과 똑같은 아침, 그는 출근을 하는 키르헨펠트 다리 위에서 자살을 시도하려는 한 포르투칼 여인과 마주칩니다.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포르투게스라는 낯선 단어의 울림, 포르투게스 여자를 찾아 거리를 헤매다 한 허름한 책방에서 우연히 마주한 포르투게스 남자 프라두의 글을 보게 된 그레고리우스. 그는 기초 문법책과 CD를 사들고 포르투칼어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리스본으로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도대체 이 책이 무엇이길래? 책방 주인이 번역해 읽어준 프라두의 책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1권, p. 31)

 


이 문장에 이끌려 그레고리우스는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무작정 리스본으로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어떻게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때론 부질없습니다.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 순간은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처럼 오는 게 아니라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하게 오는 겁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유럽 지도를 꺼내 펴놓고 기차를 타고 어떻게 리스본으로 갈지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차를 예약한 다음 교장에게 편지를 씁니다. “우리 둘 모두 존경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가운데 한 부분을 기억하실 겁니다. 네 인생은 거의 끝나 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깐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한 노교수의 영혼의 떨림을 따르는 조용한 여정인 겁니다. 이 여정의 중심에는 프라두가 있습니다. 프라두는 확실히 매력적인 의사이자 언어의 연금술사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였던 때는 자기 인생에서 단 일 분도 없다고 확신하던 젊은이,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라 믿던 자, 다른 사람을 향한 자신의 시선에 상대방은 존재하지 않고, 자신의 추측과 생각의 단상과 날조된 특성들만 남아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던 사람, 자신의 직업을 초지일관 철두철미하게 수행했던 프로페셔널리즘. 사제와 살인자의 경계 위에서 인간 백정으로 통하던 멩지스의 목숨을 구해주던 의사, 그 죄가 아닌 죄를 씻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저항운동가. 침묵하는 인간적 삶의 경험을 무언의 상태에서 건져내려던 뜨거운 정열을 지닌 연금술사. 무엇에 관해 한 번 생각하면 끝을 보던 예민한 영혼, 영혼은 사실이 있는 장소인지 아니면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우리 이야기의 거짓 그림자에 불과한지를 고민했던 철학가, 천박함과 허영심, 그것을 허용하는 우둔함을 증오하던 사제, 천박함과 경솔함이라는 치명적인 독에 대항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시를 사랑했던 남자.

 

프라두가 쓴 <언어의 연금술사>를 따라가다 보면 이 예민한 영혼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프라두는 사실 우리처럼 깨지고 상처받기 쉬운 영혼이기도 했습니다. 사랑에는 욕망과 만족과 편안함밖에 없다며 믿을 것은 영혼의 견해표명으로서 신의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이 가장 믿고 따르던 친구 조르지가 사랑하는 여인을 사랑하게 됨으로써 번민합니다. 자신감에 넘치고 두려움을 모르는 행동을 한 뒤에 언제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그에게 타인은 그의 아버지처럼 자신의 법정이었던 것입니다. 친구 조르지의 여자친구인 에스테파니아와 에스파냐로 야반도주를 할 때의 조급함, 다른 사람들의 존경, 조르지와의 우정, 성스러웠던 우정과 목숨, 그리고 사랑까지도 자신의 완전함을 위해서는 희생할 수 있다는 강렬한 열망, 그 열망이 좌절된 후 처절한 무너짐까지 그는 타자에게는 강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깨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예민한 영혼이었던 것입니다.

 

ⓒ 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주)


그래서일까요? 프라두는 늘 기차 여행을 동경했고, 멀리 떠나고자 했으며, 그렇지만 리스본을 떠나면 바로 향수병에 걸리곤 했습니다. 여기서 기차는 삶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기차와 관련한 프라두의 글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적인 열쇠가 담겨있습니다.

 

움직이는 기차에서처럼, 내 안에 사는 나, 내가 원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직 목적지조차 모른다. 기차의 궤도와 방향을 바꿀 수 없다는 것, 속도도 정할 수 없다는 것, 누가 기차를 운전하는지, 기관사가 신뢰할만한 사람인지도 전혀 알 수 없다.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 사람들이 있는 칸은 내 칸과 아주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타고 있는 칸의 불빛이 바뀐다. 불빛은 내가 결정할 수 없다. 해가 나고 구름이 끼고 새벽이었다가 다시 황혼이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폭풍이 몰아친다. 기차 칸에는 시간표가 놓여 있다. 난 우리가 어디에서 정차하는지 보려고 애쓴다. 그러나 종이는 텅 비어 있다. 정차한 역에는 이정표가 없다. 차를 타고 있는 동안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칸을 청소할 수 있겠지. 물건을 고정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바람이 강해져 유리창이 깨지는 꿈을 꾼다. 내가 힘들여 정리해두었던 물건들이 모두 날아간다. 놓친 기차, 기차표에 잘못 적혀 있는 정보들, 도착하면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역들, 내 옆을 타인의 풍경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들의 기분과 흩뿌리는 무의미함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그러나 그들이 똑같은 말과 행동을 할 때면 고통스러울 만큼 느리게 지나기도 한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정신을 집중한다. 한 번만이라도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다. 그러나 이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뒤의 인상이 앞의 것을 지워버린다. 모든 것이 일시적이고 구속력이 없으며 잊혀질 운명이다. 여행은 길다. 이 여행이 끝나지 않기를 바랄 때도 있다. 아주 드물게 존재하는 소중한 날들이다. 다른 날에는 기차가 영원히 멈추어 설 마지막 터널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2권, p. 237) 

 

삶의 우연성과 무의미함과 덧없음에 대해 이처럼 깊게 통찰한 문장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정도의 통찰이라면 왜 그가 떠나기를 욕망했으나 곧 향수병에 걸리는 줄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건 사람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게 아닙니다. 자신을 지켜줄 내부의 견고한 댐으로의 도피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렇게 도피만 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알면서도, 알기 때문에 세상의 끝까지 달려가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프라두가 그랬던 것처럼, 그레고리우스는 세상의 끝 피니스테레로 무작정 운전을 해달립니다. 이 광경이 이 소설에서는 클라이막스입니다.

 


노이아에서 피니스테레까지는 족히 150킬로미터는 되었다. 불꺼진 주유소를 몇 개 지나치고 나서야 열려 있는 주유소를 발견했다. 잠이 덜 깬 직원에게 피니스테레가 어떤 곳인지 물었다. “당연히 세상의 끝이죠!” 그는 어느 선술집의 첫손님이 되어 커피를 마셨다. 그는 이 정신 나간 여행을 감행했다는 것, 그래서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을 즐겼다. 주인이 주는 담배를 받아 두 모금을 빨자 가벼운 현기능이 일었다. 그레고리우스는 몇 킬로미터 남지 않은 곶까지 차의 유리창을 열고 운전했다. 도로는 어선들이 있는 항구에서 끝났다. 방금 바다에서 돌아온 어부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어느 순간 그레고리우스는 어부들이 건네준 담배를 피우며 그들 사이에 있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그들에게 삶이 만족스러운지 물었다. 이 상황을 즐겼다. 불합리함과 피로, 과장된 쾌감과 경계를 넘어서는 해방감이 섞인 이 상황을 그는 한껏 즐겼다. “만족하냐고? 다른 삶은 모르는 걸!” 그는 어느 어부의 어깨에 손을 얹어 바다 쪽으로 돌려세우고는 돌풍에 대고 소리를 질러댔다. “계속 직진! 오로지 직진! 아무것도 없어요!” “아메리카!” 그 어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아메리카!” 그가 웃옷 안주머니에서 청파지에 장화, 카우보이 모자를 쓴 한 소녀의 사진을 꺼냈다. “내 딸이라오!” 어부가 바다 쪽으로 손짓을 했다. 어부들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단단한 손이었다. 그레고리우스가 비틀거렸다. 어부들이, 바다가 소용돌이쳤다. 쏴아 하는 바람이 귀를 울리는 소리로 변하더니 점점 커졌고, 어느 순간 갑자기 모든 것을 삼키는 정적 속으로 사라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배의 긴 의자에 누워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아팠다. 어부들이 독주를 권했다. 그는 거절하고 괜찮다고 말했다. “정말 세상의 끝이네!” 그가 덧붙인 말에 어부들은 마음이 놓인다는 듯이 유쾌하게 웃었다. (2권, p. 263)

 

전 이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과거의 무게, 불안, 슬픔, 실망, 외로움을 넘어서는 가벼운 목소리, 어깨에 올려진 누군가의 단단한 손, 유쾌한 웃음소리, 그리고 햇빛과 바람과 언어로 이루어진 꿈. 인생은 바람이 만들었다가 다음 바람이 쓸어갈 덧없는 모래알같은 건지 모릅니다. 완전히 만들어지기도 전에 사라지는 헛된 형상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완벽히 우연히 한곳에 있던 두 남녀의 욕구와 습관이 만들어낸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나라는 존재는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과 거짓을 뒤짚어 쓴 자기기만의 대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게 뭐 어때서요? 삶이란 세상의 끝을 상상할 수 있는 마음과 작은 웃음이면 충분한 것 아닐까요? 그래서 프라두의 말은 참입니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2권, p. 334)

 

즐겁게 상상하고 만나고 읽고 쓰고 웃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게 아무리 부질없는 짓일지라도 그게 뭐 어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