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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내 맘대로 감상문

초록의 혼이 지나간 자리 우포늪<KBS스페셜 인간과 습지>




공사창립특집 <KBS스페셜 인간과 습지 1>을 봤습니다. 우포늪의 아름다운 풍광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여러 생명의 삶이 잘 포착된 다큐멘터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포늪이 이렇게 멋진 곳이었어?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불러일으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프로그램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겨울, , 여름, 가을, 다시 겨울로 이어지는 흐름이 좋았습니다.

 



겨울

프로그램의 시작은 겨울입니다. 우포늪의 겨울. 칠십 평생을 우포늪과 살아온 한 노인의 얼굴이 꽁꽁 얼어버린 대지에 비칩니다. 평생 욕심 없이 살아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표정입니다. 그 표정 밑으로 겨울의 날선 수면이 있고, 얼어붙은 잿빛 수면 아래로 가물치가 지나갑니다. 바람소리가 들립니다. 쓸쓸하고 외롭습니다. 적막한 우포늪, 그러나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감이 있습니다.

 

우포늪에 봄바람이 붑니다. 넓게 수초가 초록의 융단을 펼치기 시작하고 잉어떼의 짝짓기가 시작됩니다. 노랑어리연꽃이 핍니다. 후미진 곳의 꽃이 더욱 노랗습니다. 물속에서 생명의 씨앗이 꿈틀대고 이 씨앗이 자라 연꽃이 됩니다. 늪의 수초는 물고기의 삶의 터전입니다. 물고기들은 이 수초를 터전으로 삼아 알을 낳고 미생물을 먹고 자랍니다. 어부는 바빠진 봄의 꿈틀거림이 좋습니다. 봄은 그런 겁니다. 새로운 생명의 약동과 설레임과 분주해지는 손길.


 

여름

우포늪에 가시연이 울긋불긋 퍼지기 시작합니다. 꽃은 보라색이고, 잎은 잘 자라면 직경이 2미터에 달합니다. 가시연을 깊게 들여다보면 그 안에 수많은 작은 생물들의 움직임이 보입니다. 생명들에게 가시연은 대륙이자 산맥입니다. 버들붕어와 참붕어가 가시연에 몰려들기 시작하고, 그 위에서 나그네새라 불리는 물꿩이 부부의 연을 맺기 시작합니다. 우포늪은 여름의 햇살을 머금고 거대한 가시연의 숲이 됩니다. 모든 생명을 보듬고, 그렇게 우포늪의 여름은 뜨겁게 약동합니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수컷 물꿤이 알을 품고 있고, 산란기의 버들붕어가 알을 지킵니다. 누군가 알을 품고 있을 때, 어디선가 물안개가 피어오릅니다. 해질 무렵 한 어부가 노를 저어 우포늪을 가로질러 갑니다. 이 느림의 미학이 멋들어지게 화면위에 잡힙니다. 여름햇살이 기울고 밤이 되면 또 다른 생명의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환절기

큰 비는 늪의 지도를 바꾸기도 합니다. 무지개가 피어오른 우포늪. 늪은 범람을 통해 다시 태어납니다. 물에 잠긴 땅. 땅 위의 강아지풀들이 수초가 되고, 범람은 늪의 길을 넓히고 새로운 길을 만듭니다. 그 사이로 우렁이를 잡는 할머니가 보입니다. 새로운 물이 들어오자 우포늪에 생명의 기운은 넘쳐나기 시작합니다. 갓 태어난 물꿩 새끼는 비틀비틀, 본능적으로 아빠의 품속으로 파고듭니다. 산란을 마친 버들붕어 수컷은 둥지를 떠나지 못합니다. 새끼를 지키겠다는 부모의 본능입니다. 쇠물닭 어미는 새끼에게 일일이 입으로 먹이를 물어줍니다. 형이 먹이를 물고 동생에게 넘겨주는 모습도 보입니다.

 


가을

여름이 기울어가는 어는 날 반딧불을 보러 온 아이들의 소리가 재잘거립니다. 그 소리 사이에 반딧불이는 초록 향연을 펼칩니다. “반짝반짝 작은 별노래에 맞추어 귀뚜라미 소리가 들립니다. 별똥별이 떨어지고 하늘 위로 별들의 축제가 시작됩니다. 아침이 오고, 참붕어들은 가시연 열매를 공처럼 가지고 놉니다. 가시연 열매에서 씨앗들이 흩뿌려집니다. 씨앗들의 여행이 시작됩니다. 바람을 타고 퍼지며 새 미래를 찾아갑니다. 퍼진 씨앗은 참붕어의 축구공이 되기도 하고 먹이가 되기도 하고 다시 늪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아빠 물꿩은 여전히 새끼를 보듬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습은 세월을 속이지 못합니다. 아빠의 가슴털도 머리털도 다 빠지고 초라하게 변해갑니다. 어디 아빠 물꿩만일까요? 작은 초록의 영토, 우포늪은 화려했던 기억을 뒤로한 채 조금씩 조금씩 앙상해지고 적막해져갑니다. 그리고 아빠 물꿩과 새끼 물꿩은 늦가을 새벽 어느날 우포늪을 한 번 쳐다보더니 날아오릅니다. 이렇게 이별인겁니다. 탄생-성장-죽음, 만남-마주침-이별의 마듭, 이게 가을인 겁니다. 

 

겨울

수초로 덮였던 초록영토가 갈색물로 바뀌어 갑니다. 늪은 매끄러운 갈색 칠판이 되어갑니다. 큰 고니들은 물을 찾아 날아오릅니다. 어부의 뱃길은 묶였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우포늪을 마주하다보면 인생이란 계절의 순환과 조응한다는 것을, 돌아갈 곳은 침묵과 적막이라는 것을, 그러나 어김없이 초록빛은 다시 우리에게 다가옴을, 그리하여 얼음을 밀어내고 노를 저을 수밖에 없다는 걸, 몸 안 깊숙이 생명을 보듬고 보살피며 겨울을 벼텨낼 수밖에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KBS스페셜 인간과 습지 1>은 우포늪을 다룬다면 2(38일 오후 10, KBS1)은 낙동강을 다룰 예정입니다. 이 프로그램도 기대가 되는 건 어쩌면 늪과 습지가 가진 매력 때문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햇별 들다 만 고요의 수렁이라도 늪에는 범할 수 없는 초록의 혼이 있다. 우포는 수십만 평의 그 혼의 영토다. 새가 와서 노래를 낳고 풀씨가 꽃을 피우고 깨어져 혼자 떠돌던 종소리도 쉬고 가지만 생명의 여인숙 같은 이곳엔 거절이 없다. 편안대로 닿아서 스스로 생을 가꾸는 배려와 위안의 따뜻한 나라여. 늪에는 범할 수 없는 초록의 혼이 있다.” (이우걸의 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