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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스쿨/독서일기

시간의 점, 알랭드보통의 <여행의 기술>



  <먼 북소리>, <여행의 기술>,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유럽문화기행> 등등 요즘 여행기를 좀 자주 읽는 편입니다. 미세먼지가 잔뜩 낀 겨울 하늘을 마주하면서 삶에 있어 귀중한 요소, 그러니깐 아름다움, 호기심, 청명함, 순수함 이런 것을 현실보다 기행 문학, 에세이에서 찾는다고 할까요? 그 중 오늘 이야기할 책은 알랭드보통의 <여행의 기술>입니다.

  

  알랜드보통은 일상적 풍경과 인문학을 아주 멋들어지게 엮어낼 줄 아는 작가입니다. 별 것 아닌 일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의 심리적 연원과 철학적, 미학적 뿌리를 찾아가는데 이만큼 탁월한 작가가 있을까, 그의 책을 보다보면 맛깔스럽고 풍부한 밥상 앞에 참 대단한 놈이야감탄을 할 수밖에 없는데요.

 

  <여행의 기술>은 제가 볼 때 알랭드보통의 작품 중에 그의 스타일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여행을 말하지만 여행기는 아니고, 특정 여행 공간을 매개로 철학, 문학, 사진, 인물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냅니다. 편집의 대마왕입니다왜 그의 책 중 이 책이 최고일까, 생각하면 그건 여행이 가진 어떤 속성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움직이는 비행기나 배나 기차보다 내적인 대화를 쉽게 이끌어내는 장소는 찾기 힘들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다른 경우라면 멈칫거리기 일쑤인 내적인 사유도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으면 술술 진행되어 나간다. (p. 46)


  여행은 생각의 산파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내적인 대화든 새로운 생각이든 그것은 흘러가는 풍경의 도움을 얻어 놀라운 비약을 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에는 무릎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비약이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공항 터미널 천장에 매달린 비행기의 출발과 도착을 알리는 화면들. 이 화면들이 계속 호출하는 공간들, 모스크바, 동경, 대만, 뉴욕, 런던, 뮌헨 등등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손쉽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오후 3, 권태와 절망이 위협적으로 몰려오는 시간에 늘 어딘가로 떠날 수 있는 겁니다. 비행기를 타는 게 어렵다면 가까운 용산역만 가보더라도..

 

<여행의 기술>에서 가장 생기를 부여한 장은 영국 레이크 디스트릭트와 그곳을 사랑했던 시인 윌리엄 위즈워스를 소개하는 챕터였는데요. 구글맵에서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찾아보면 놀라운 자연풍경이 펼쳐지는데, 그곳에서 시를 쓰던 윌리엄 위즈워스는 기본적으로 도시문명에 대해 매우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뭐 굳이 그렇게 자기 파괴적이고, 흔들리며 사나, 그런 느낌인 거죠.


영국 디스트릭트레이크


 

도시는 생명을 파괴하는 여러 감정을 만들어낸다. 지위에 대한 불안, 다른 사람들의 성공에 대한 질투, 낯선 사람들의 눈앞에서 빛을 발하고 싶은 욕망. 도시 거주자들은 뚜렷한 관점이 없기 때문에 거리나 저녁 식탁에서 이야기되는 것에 귀를 곤두세운다고 한다. 그들은 먹고살기가 편해도 자신에게 진정으로 부족하지도 않고 또 자신의 행복을 좌우하지도 않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이런 혼잡하고 불안한 곳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진지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어려워 보인다.” (p. 190)

 

멀리갈 것 없이 최근 비트코인 논쟁을 보면 위즈워스의 이야기에는 귀담아 들을 부분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위즈워스에 감탄한 것은 도시에 대한 비판을 넘어 그가 살아가는 시골 마을에 대한 놀라운 관찰력때문입니다. 그는 떡갈나무 밑에 앉아 빗소리를 듣거나 나뭇잎들 사이에 햇살이 비쳐드는 모습을 지켜보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흔들리지 않은 영속성, 절대적 순수 같은 것을 발견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알랭드보통의 해석을 들어보죠.

 

워즈워스는 떡갈나무 밑에 앉아 빗소리를 듣거나 허공에 금이 가듯 잎들 사이의 햇살이 비쳐드는 모습을 지켜보기를 좋아했다. “현재 있는 것들, 그리고 지나버린 것들이 추는 빠른 춤에 취해버린 마음 앞에 영속하는 것들의 단정한 모습을 내보여라워즈워스는 자연이 우리로 하여금 삶에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바람직하고 선한 모든 것을 얻게 한다고 주장했다. 자연은 올바른 이성의 이미지로서 도시생활에서 나타나는 비꼬인 충돌들을 진정시킨다는 것이다... 그는 180년 젊은 학생에게 보낸 편지에 시의 임무를 이렇게 말한다. “위대한 시인은 사람들의 감정을 좀 더 건정하고 순수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p. 201)

 

 워즈워스는 자연이 우리로 하여금 삶에서, 그리고 서로에게서 바람직하고 선한 모든 것을 얻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연과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고, 관습적인 무관심에서 벗어나 일상의 아름다움과 경이를 발견하는 능력, 즉 도시의 분주함에서 벗어난 멈춤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일상은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보고이지만, 익숙함과 이기적인 염려 때문에 우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심장이 있어도 느끼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나요? 이 무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멈춤, 발견, 관심, 매력의 부여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 선한 것을 얻는 능력을 통해, 자연에 살고, 그 자연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면서 우리의 성격은 경쟁, 질투, 불안에 저항하는 쪽으로 형성되어간다고 위즈워스는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에 대해 이렇게 찬양합니다.


나는 위대하거나 아름다운 것들을 통해서 인간을 처음으로 보았고, 그러한 것들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인간과 교감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사는 보통 세상의 모든 곳에서 들끓고 있는 비열함, 이기적 관심, 거친 행동거지, 그리고 천한 욕정에 대한 확실한 안전판과 방호벽이 세워졌다.” (p. 209)  


 정말 그렇다면, 저 역시 도시의 감수성에서 벗어나 자연의 이야기를 내 것으로 삼는 연습을 해보고 싶습니다. 문제는 그런 자연이 일상에서 많지 않다는 것. 내 삶의 근거지는 서울 한복판이라는 것. 그래서 맨날 누군가를 욕하고 천한 욕정과 이기적 관심과 비열함에 부들부들 떤다는 것. ㅜㅜ 그런데 워즈워스는 이에 대한 방책도 제시합니다. 바로 시간의 점이라 불리는 것.

 

워즈워스는 1790년 가을 알프스 산책 여행에 나선다. 그는 누이에 보낸 편지에서 자기가 본 것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쓴다. “이 수많은 풍경들이 내 마음 앞에 둥둥 떠다니는 지금 이 순간, 내 평생 단 하루도 이 이미지들로부터 행복을 얻지 못하고 지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큰 기쁨이 밀려온다.” 알프스가 그의 기억 속에 계속 살아남게 되자 워즈워스는 자연 속의 어떤 장면들은 우리와 함께 평생 지속되며 그 장면이 우리의 의식을 찾아올 때마다 현재의 어려움과 반대되는 그 모습에서 우리는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연 속의 이러한 경험을 시간의 점이라 불렀다. “우리의 삶에는 시간의 점이 있다. 이 선명하게 두드러지는 점에는 재생의 힘이 있어 이 힘으로 우리를 파고들어 우리가 높이 있을 땐 더 높이 오를 수 있게 하며 떨어졌을 때는 다시 일으켜 세운다.” (p. 210)

 

지금 저는 경복궁의 한 카페에 앉아 있습니다. 나에게 시간의 점은 어디일까? 고양이 한 마리가 스티로폼 위에서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바람과 햇살이 조금씩 섬세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미세먼지, 강추위의 변주 속에서도 나무들은 이 척박한 서울에서 건강하고 충만한 인상을 줍니다. 서울이 구태의연하고 또 자주 슬프다는 것에 개의치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게도 시간의 점들이 있습니다. 그 점들에서 마주했던 아름다음에 대한 느낌, 그것이 그 점에 내재한 특징이든 아니면 나의 내면 회로에 의해 결정된 것이든, 이 느낌을 언젠가는 담백하게 적어보려 합니다.

책 리뷰를 마치면서 알랭드보통 <여행의 기술> 마지막에 나온 이야기를 적어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잘 관리함으로써 그것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만들어 1년에 세 번 열매를 맺게 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운명의 솟구치는 파도에 휩쓸리거나 시대와 나라가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물줄기 속으로 밀려들어가면서도 늘 그 위에 코르크처럼 까닥거리며 떠 있다. 이런 것을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인류를 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 즉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소수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다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p. 343)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들어 내는 저와 당신이 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