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디어 스쿨/독서일기

일시적이고 과도적인 이야기, <먼 북소리>



새해 들어 다시 읽은 첫 번째 책은 무라카미하루키의 <먼 북소리>입니다.

마음이 무거워질 때 저는 여행기를 쓰거나 여행과 관련한 에세이를 읽곤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 새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걸 발견할 수 있는데요, 하루키의 여행 산문집 <먼 북소리>는 마음에 짙은 황사가 머물고 있을 때 제격인 에세이집입니다. 황사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거리를 다니기 힘든 날, 한번 읽어보실래요?

일단 들어가는 글이 참 솔직합니다. 하루키는 여행의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마흔 살이란 하나의 큰 전환점이어서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무엇인가를 뒤로 남겨두고 가는 때가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단 그런 탈바꿈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는 좋든 싫든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세월이란 앞으로만 나아가는 톱니바퀴라고 나는 막연히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 않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느 한 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 그렇다. 나는 어느 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던 것이다.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갸날프게.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p. 15)”

여행에세이가 하루키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담백하게 적어놓습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본래 목적은 내 의식을 일정한 문장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붙잡아 놓는 데 있었다. 자기 눈으로 본 것을 자기 눈으로 본 것처럼 쓴다. 이것이 기본적 자세다. 자신이 느끼는 것을 되도록 그대로 쓰는 것이다. 안이한 감동이나 일반화된 논점에서 벗어나 되도록 간단하고 사실적으로 쓸 것. 다양하게 변해가는 정경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든 계속 상대화할 것.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잘 안 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글을 쓰는 작업을 자기 존재의 수준기로 사용하는 것이며 또한 계속 그렇게 사용해 나가는 것이다.” (p. 21)

 

그리고 허름한 매점에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까만뿔테 안경을 쓴 아저씨, 폭퐁우가 몰아친 뒤 돌담 수리의 풍경, 마라톤을 할 때 볼 수 있던 것들, 글이 안 써져 방황했던 마음, 세계의 끝 메타 마을의 풍경, 비내리는 카빌라의 모습, 크리스마스에 만난 거지, 방금 잡은 송어요리에 대한 예찬, 지금 들은 모차르트 교향곡의 맛, 우연히 만난 블로섬 디어리의 나이듦 등등 소소한 일상을 자기 존재의 수준기로 적어놓습니다.

 그리고 50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 끝에 이런 이야기로 에세이를 마무리하는데요.

 "유럽에서 보낸 3년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런저런 일을 겪은 후 결국 본래의 위치로 돌아온 것일 뿐 달라진 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는 말하자면 상실된 상황에서 이 나라를 떠났다. 그리고 마흔이 되 돌아온 지금도 여전히 그때처럼 상실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무력감은 무력감으로서, 피폐는 피폐로서 그대로 남아 있다. 두 마리 벌, 조르지오와 카를로는 지금도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다. 그들이 예언한 것처럼 그저 나이만 먹었을 뿐이고 아무것도 해결되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한다. 다시 한 번 본래의 위치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만도 다행이 아닌가. 훨씬 안 좋은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라고. 그렇다. 나는 낙관적인 인간인 것이다. .....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처음에 가졌던 자기의 사고방식에서 무언가를 삭제하고 삽입하고 복사하고 이동하여 새롭게 저장할 수가 있다. 이런 일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면 나라는 인간의 사고가 혹은 존재 그 자체가 얼마나 일시적이고 과도적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불완전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불완전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과도적이고 일시적이라 한 것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내게는 지금도 간혹 먼 북소리가 들린다. 막무가내로 다시 여행을 떠나고 싶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문득 이렇게도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있는 과도적이고 일시적인 나 자신이, 그리고 나의 행위 자체가 말하자면 여행이라는 행위가 아닐까 하고, 그리고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동시에 어디에도 갈 수 없는 것이다.”

 

더 이상 부연설명을 하면 군더더기가 될 것 같습니다

<먼 북소리>가 들립니다. 마음에서 일상에서 거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