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길(2006).
미디어와 문화산업 장이론의 맹점. 언론과 사회, 14권 4호, p 70~100.
1. 문제제기
1980년 영국의 미디어 정치경제학과 문화연구를 대표하는 학자 니콜라스 간햄과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부르디외의 사회학적 틀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연구에 하나의 통합적 시각을 제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표명한 바 있다. 그리고 10년 뒤, 간햄은 부르디외 이론에서 미디어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문화영역의 상업화가 진전된 지금의 현실이 부르디외식 접근의 심각한 한계를 드러낸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1997년 부르디외가 출간한 <텔레비전에 대하여>는 미디어 연구자들에게 깊은 실망감을 가져다 준다. 프랑스 매개학(mediologie)의 창시자 레지스 드브레는 그것을 두고, 인용표시 없는 짜깁기와 새로울 것 없는 상식의 적절한 잡탕일 따름이며, 언론학과 학생이 낸 과제물이었다면 나쁜 성적을 받았을 것이라고 비아냥거릴 정도였다(Debray, 1997, p.17).
부르디외 사회학이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연구의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2000년대 들어 더욱 커진 듯 싶다. 이는 최근 헤스먼달프(Hesmondhal호, 2006)의 비판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장이론이 대량생산의 하위장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결여하고 있으며, 이는 문화 산업 분석에 치명적인 경함이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글은 정말로 장 이론이 미디어와 문화산업 분석의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 없는지를 검토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2. 대량생산의 하위장 : 문화 산업의 복잡한 짜임새.
문화생산 장은 현대사회의 전문화된 문화생산 활동이 이루어지는 사회공간이다. 부르디외는 이 장 안에서의 실천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인다고 말한다. 우선 문화생산은 생산자의 이해관계를 초월해서 이루어지는 순수한 활동이 전혀 아니다. 이해관계는 물질적, 경제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상징적인 차원에서도 존재한다. 즉 문화생산은 경제자본을 목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상징자본을 목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문화 생산 장은 대개 ‘대량생산의 하위장’과 ‘제한생산의 하위장’으로 이분화된다. 대량생산의 하위장에서 생산자들은 시장에서의 상업적 성공과 경제자본을 추구한다. 문화생산 활동에 대한 금전적 보상이 일차적인 목표가 되는 것이다. 반면 제한생산의 하위장에 있는 생산자들은 경제적 성공보다 상징적 권위와 명예를 더 소중히 여긴다. 이들은 인정, 명성, 정당성 등의 형식을 띠는 상징자본을 추구한다. 상이한 성격의 두 하위장의 존재는 문화생산의 공간이 대립적인 축에 의해 구조화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상징적 이익과 경제적 이익의 추구는 반드시 서로 배타적인 것만은 아니다. 경제적 이윤을 추구하는 문화생산 기업들도 상징적 이윤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장이론은 문화생산이 이렇게 구조화된 공간 안에서 관계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라고 본다. 상대적 자율성을 지니는 각 행위주체는 다른 행위자들과 (소유자본과 규모와 구조에 따라) 불평등한 세력관계 속에서 의식적, 무의식적 전략에 따라 행동한다. 그러한 전략은 행위주체의 아비투스, 그리고 장 안에서의 궤적과 관련되어 있다. 관계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입장공간 안에서 행위자의 선택이 장 내부의 다른 상대를 알게 모르게 의식하고서, 그와 자신을 끊임없이 차별화하는 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특정한 문화재화의 성격은 그러한 관계 내 전략의 산물이다. 이 과정에서 생산자 공간과 작품 공간 사이에는 일정한 구조적 상동성이 만들어진다. 상동성은 그 작품 공간과 소비자 공간 사이에도 나타난다.
문화산업을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시각에서 연구하는 헤스만달프는 부르디외가 제시하는 장이론에 비판적이다. 그는 먼저 부르디외가 문화를 폭넓은 뜻으로 쓰고 있으면서도, 정작 실제 문화생산 장 연구에서는 문학과 미술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에 나타난 문화소비 분석은 고급문화에서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아주 포괄적인 데 반해, 문화생산에 대한 연구는 매우 선별적이며, 주로 제한생산 부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지적한다. 장이론이 가장 체계적으로 제시된 <예술의 규칙>에서도 부르디외의 관심 영역은 좁은 의미에서 예술과 학문이라고 지적한다. 이에 더해 헤스만달프는 부르디외의 장이론이 서구에서 이미 1920년대부터 시작된 문화기업들의 성장과 팽창을 간과하는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고, 대량생산 부문의 다양한 양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으며, 문화생산의 자율성과 타율성을 극단적으로 대립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량생산과 제한생산 사이의 경계 위에서 엄청나게 많은 문화생산이 이루어지고 있고, 제한생산이 대량생산의 장 속으로 도입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데, 부르디외는 이를 간과하거나 무시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헤스먼달프는 현재 문화생산조직 안에서 노동분업이 무척 복합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장이론에는 그러한 현실을 섬세하게 분별해낼 개념적 도구가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부르디외는 생산과 소비 사이에서 일종의 중개역할을 하는 집단으로 문화매개자들을 설정하지만, 이들은 실질적으로 매우 좁은 범주인 비평가들을 가리킬 따름이라는 것이다.
3. 장이론의 뜨거운 감자들.
헤스먼달프의 장이론 비판은 전반적으로 타당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비판이 부르디외의 시각과 상충되는 것도 아니며, 장이론의 기본 주장과 모순되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헤스먼달프의 지적처럼 부르디외는 대량생산 부분에 대한 관심을, 전범이 될 만한 연구를 풀어낸 적이 없다. 그러나 그가 이 부분을 상세히 논한 적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그의 사회학 언어로 그것을 논할 수 없다는 결론을 곧장 이끌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해 부르디외와 동료연구자들이 내놓은 몇몇 의미 있는 연구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대량 생산의 분화, 대량배포의 권력
먼저 볼탕스키의 1975년 논문 ‘만화장의 구성’을 보자. 이 논문은 1950년대 말과 60년대 초 프랑스에서 만화 장이 형성되는 과정을 탐색한 논문이다. 이 논문을 검토할 때 유의해야 할 사항은 장이 결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너무 당연하면서도 잊기 쉬운 원칙이다. 장이 “정치세계와 경제세계로부터 독립된 자기만의 작동법칙을 가지는 별개의 사회세계”(Bourdieu, 1993, p162)라는 정의를 되새겨보자. 이 말은 장이 독립의 역사, 정확히 말해 일종의 자율화 과정을 거쳐 형성, 쟁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으로부터? 물론 정치세계와 정치세계로부터의 독립이며 자율화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떤 것으로부터의 해방이 더 문제시되는가는 대상주체의 성격, 그리고 그것이 위치한 역사적 국면(특히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그 해방은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으며, 장을 일정한 긴장 속에 놓게 된다. 이른바 상대적 자율성의 개념은 그러한 사정을 가리킨다. 따라서 부르디외가 <예술의 규칙>에서 연구한 프랑스 예술계는 19세기 중반 시장의 힘을 빌려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하고 하나의 독립된 장으로서 구축되었으나, 20세기 후반에는 국가의 힘에 기대 시장으로부터의 자율성 침해를 방어하고 있는 상황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볼탕스키에 따르면 “만화는 19세기 말에 등장한 이래 비교적 최근까지 대량배포의 장 안에서 생산된 재화들 대부분이 공통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만화의 고유한 특성은 그것이 정당성의 위계 안에서 차지하는 피지배적 위치, 그리고 경제 장에 대해 가지는 아주 약한 자율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 결과 무엇보다도 만화생산자들은 시장의 법칙에 복속되었다”(Boltanski, 1975, p.37). 이에 만화와 같은 미디어 문화상품 장의 자율화 과정에는 ‘뒤집어진 경제논리의 세계’인 ‘제한생산의 하위장’ 혹은 ‘상징적 축’의 형성이 핵심적인데, 거기에는 기존의 여타 문화생산 장들의 영향과 개입, 이를테면 문학작품, 미술, 인문학 등의 영향과 개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Boltanski, 1975).
볼탕스키의 문화 장 연구는 다른 대중문화 생산에도 적용될 수 있는 논리적 절차를 보여준다. 즉 기술적이며 경제적인 속성상 대량 배포되는 경향을 가지는 미디어와 대중문화 부문도 역사 속에 하나의 장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이며, 이는 달리 말하면 그 안에서 (상대적 의미의) 제한생산의 하위장이 분화되는 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예컨대 텔레비전은 그 자체로 전체 문화생산에서 대량생산의 하위장에 ‘속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그러한 성격만을 보여주게 ‘되어있는’ 하나의 고정된 대상이나 장르가 아니다. 비록 그 특성상 경제 장이나 정치 장으로부터 독립성 확보가 쉽지 않지만, 그것이 여전히 가능한 영역인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 자율성이 구조적으로 또 다른 장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하고 위태로울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 부르디외는 “장이 자율적이 될수록, 상징적 세력균형은 가장 자율적인 생산자들에게 더 유리하고, 제한생산의 하위장과 대량생산의 하위장 사이의 구분은 더욱 뚜렷해진다”고 지적한 바 있다(Bourdieu, 1983, p.320). 그렇다면 구조적으로 자율성이 미약한 대부분의 문화생산 장에서는 제한생산과 대량생산의 하위장이 명확하게 분리되기 보다는, 상징적 축과 경제적 축의 대립관계를 바탕으로 좀 더 모호한 연속선의 양상이 나타날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2006년 프랑스 영화 장을 다중상응분석(multiple correspondence analysis)을 통해 연구한 쥘리앵 뒤발의 논문 “리얼리즘의 기술: 2000년대 초 프랑스의 영화 장”을 통해 나타나는 결과이기도 하다(Duval, 2006).
2) 문화기업에 대한 이중적 접근
1999년 부르디외의 논문 ‘출판에서의 보수혁명“은 <예술의 규칙>에서 다룬 1970년대 프랑스 출판 장이 이후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했는지를 90년대 중반의 상황을 중심으로 분석한 것이다. 이 연구는 장이론의 관점에서 문화기업을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
부르디외는 이 논문에서 출판 장을 구성하기 위해, 장 안에서 효과를 행사할 수 있을 만큼 존재감이 있는 일정한 규모 이상의 문학전문출판사를 분석단위로 삼는다. 그가 분석에 이용한 변인들은 법적/경제적 지위, 재정적/상업적 종속관계, 시장에서의 비중, 상징자본, 외국문화의 중요성 등 다섯 개 차원이다. 이를 바탕으로 총자본량 그리고 자본구조(상징자본과 경제자본의 대립)가 두 중심축을 이루는 출판 장의 공간이 구성된다.
부르디외는 장 안의 행위자로서 출판사를 논할 때, 크게 두 가지 방식을 취한다. 하나는 출판사가 대체적으로 대표-소유주와 동일시될 만하다고 보는 것이다. 기업의 특성-규모, 전통, 통제방식 등-과 경영자의 특성-출신배경, 재산, 출신학교 등-이 겹쳐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출판인의 특성과 그가 가진 출판사의 특성 사이에 대강의 상응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강조된다(Bourdieu, 1999, p. 16). 부르디에에 따르면, “가장 개인적인 차원에서 인물은 본질적으로 장의 구조, 더 정확하게는 이 장 내부의 위치에 실질적이거나 잠재적으로 새겨진 요구들의 인격화(personnification)라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어떤 회사의 경영자들에게 주가 되는 자본유형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그 회사가 경제권력의 장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 그것이 다른 회사들 및 국가와 맺는 관계에 대한 정보를 끌어낼 수 있다”(Bourdieu, 1989, p. 449). 출판사의 스타일이 “출판인의 아비투스와 출판사의 위치 안에 새겨진 제약들의 결과물”이라는 주장은 그러한 논리를 드러내는 하나의 예다(Bourdieu, 1999, p.18). 이러한 논의에서는 출판사의 내부조직에 대한 고려가 생략된다. 부르디외가 출판기업에 접근하는 또 다른 방식은 그 내부가 하위장처럼 분화되며, 서로 다른 위치의 행위자들 사이에 세력 갈등이 벌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때, 내부의 대상은 기업 전체가 될 수도 있고, 특정한 조직단위가 될 수도 있다.
“한 출판사가 규모가 크고 구획되어 있을수록, 의사결정의 제도적 장치는 (최소한 겉보기에는) 확장되고 복잡한 경향이 있어서 하나의 하위장처럼 작동할 정도이다. 그 하위장의 한 가운데서 제각기 다른 (재정적, 상업적, 문학적) 행위자들이 다른 비중을 가지고 격돌한다. 그 비중은 문제가 되는 의사결정 단위가 전체 출판 장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달려있다”(Bourdieu, 1999, p.7.)
이처럼 장이론에서 기업조직의 작동논리를 분석할 수 잇는 거시적 틀은 분명 존재한다. 출판 장 논문에서 부르디외는 특히 출판기획위원회나 편집위원회 같은 기구를 중요한 행위자로 감안한다. 하지만 위원회는 출판원고에 대한 실질적인 선정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 원고선정은 주로 대표-소유주와 그 비서진에 의해 이루어진다. 다만 위원회는 그 구성원들이 가진 상징자본과 사회관계자본의 은행 역할을 한다. 달리 말해, 출판사는 위원회의 권위와 인맥을 통해 작가나 교수, 언론인 등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출판사=출판인=위치=출판물(출판스타일)의 환원적인 연쇄 고리가 합리화된다. “장이 행사하는 구조적 제약과의 관련 속에서 제도적 의사결정 장치의 자율성은 극단적으로 축소된 듯 보인다. 이는 집장채택 즉 출판전략이 장 내에서 점유하는 위치로부터 거의 연역된다는 느낌을 줄 정도이다”(Bourdieu, 1999, p. 15). 물론 부르디외는 구조적 제약의 효과가 행위자들의 성향에 의해 매개된다고 본다. 하지만 이러한 매개는 연쇄 고리 자체를 복잡하게 만들기는 해도, 그것을 바꾼다거나 아예 끊어버리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는 것 같다.
출판사가 다른 미디어 기업에 비해 규모가 비교적 작고 구조가 단순하기 때문에, 부르디외는 그것의 성격을 소유주의 사회학적 특성으로도 환원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대기업 장을 분석한 1989년의 저작 <국가귀적>에서도 그의 이러한 원칙은 이미 적용된 바 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의 주된 관심은 기업내부의 조직구조가 아니라, (그 단위야 무엇이든) 행위자 공간의 관계적 규정성,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전략의 차이와 생산물의 차별화이다. 그래서인지, 헤스만달프가 지적한 것처럼, 장이론에는 기업 내 조직이나 기능적인 업무분담, 새로운 직종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세세한 개념들은 계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접근에서 쓰이는 개념들을 빌려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또 그런 조직구조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논리적 틀이 없는 것도 아니다. 장이론은 행위자들, 그리고 그들의 조직 내 위치를 소유자본의 양과 성격에 따라 특징지으며, 이를 통해 경쟁과 갈등, 전략을 파악하는 것이다.
장이론에서는 오히려 문화기업 내부의 기능분화나 공식적 지위를 가진 행위자들보다 문화매개자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경우가 많다. 해스먼달트의 비판대로 그는 생산과 소비를 매개하는 문화매개자의 범위를 비평가 집단으로만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듯 보인다. 하지만 장이론에서 이 개념은 비평가 집단을 추축으로 삼지만, 부르디외가 이중적 인물(double personnage)이라고 부른 문화기업가-출판인, 갤러리 기획자 등-와 저널리즘 미디어 등 문화재화의 의미와 가치를 생산하는 개인과 기구를 망라한다(Bourdieu, 1983, p. 318~319, 325). 부르디외가 새로운 문화매개자로 꼽는 집단 또한 문화 생산과 관련된 기업이나 관료제-라디오, 텔레비전, 여론조사회사, 기업부설 연구소, 신문잡지, 사회사업과 문화활동 촉진 기구-안에서 부드러운 조직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다(Bourdieu, 1979, p. 422~423). 결국 문화매개자는 장이론이 강조하는 이른바 ‘신념의 생산’과정에 폭넓게 개입하는 행위주체들이며, 문화재화가 시장에서 공중을 만나기 위해 필수적인 제도이다. 공급이 수요에 우선하며 높은 불확실성을 무릎써야만 하는 상징재 시장에서 생산자는 지속적인 과잉생산과 배포의 통제로 위험을 관리하게 된다. 문화매개자는 과잉생산 상황에서 적절하게 수요를 발생시키고 또 조절하는 경제학적 중개요소라 할 수 있다(Sapiro, 2003, p. 451).
4. 방법으로서 장이론
헤스먼달프가 제기한 논점들은 문화산업 연구에서 장이론적 접근을 취하려는 연구자들에게 소중한 성찰의 좌표를 제공한다. 그런데 그 성찰이 생산적일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장이론의 인식론적 지위와 전략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장이론이 “하나의 프로그램이자, 방법에의 참여”(Pawweron, 2003, p.41)라는 장 클로드 파스롱의 지적은 의미심장하다. 이와 함께 부르디외의 <예술의 규칙> 2부의 1장에서 방법의 문제를 길게 다루고 있다는 있다는 사실 또한 시사적이다. 부르디외는 거기에서 사회과학의 새로운 정신이 지켜야 하는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이론은 다른 이론과의 순수한 이론적 대결보다는, 언제나 새로운 경험적 대상들과의 대결에서 자양분을 얻어야 한다. 개념은 우선 인식론적으로 통제된 과학적 실천을 발생시키는 도식들의 총체를, 속기술의 방식으로 가리키는 기능을 가져야만 한다.”(Bourdieu, 1992, p. 251).
그런 차원에서 장이론은 연구대상을 구성하는 방법이자, 구체적인 연구절차로 이끌어주는 지침이며, 연구결과를 해석하고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는 데 쓰이는 체계화된 개념들의 연장통이다. 장이론은 실질적인 활용과 작동 속에서만 그 가치를 드러내며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것은 발견적 힘을 통해 현실의 운동을 포착해내면서, 스스로 끊임없이 확장되고 수정되는 지평에 놓인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통합되고 축적되는 경험적 연구들의 프로그램”을 지향한다(Bourdieu, 1992, p. 259).
장이론은 연구대상의 구성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먼저 장 개념은 “전체와 그 구성요소들 간 관계의 분리 불가능한 역동성의 존재를 상정”한다(Passeron, 2003, p. 41). 이는 관계중심주의라는 방법론적 선택으로 이어진다. 부르디외에 의하면, “관계적으로 규정되는 행위주체나 집단이 지닌 속성은 그들이 맺는 관계 속에서만, 또 그 관계에 의해서만 의미와 가치를 얻는다. 어떤 실천, 대상, 혹은 담론은, 결코 그 자체로 그것만으로 탁월하거나 속되거나, 고상하거나 평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대상들, 다른 실천들, 혹은 다른 담론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럴 따름이다(Bourdieu, 1989, p.255). 장이론은 어떤 점에서, 또 어떤 방식으로 하나의 장이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행위주체들의 전략에 관련되어 있는지, 장 안의 요소들은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영향을 주고받는지, 우리가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관찰하고 또 기술하도록 요구한다.
한편 장이론이 제시하는 제한생산/대량생산이나 상징적 축/경제적 축의 모델 역시 조금 더 실용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부르디외는 기술, 설명, 예측을 위해 의식적으로 구성된, 선별적, 추상적, 단순화된 속성들 사이의 관계체계로 모델을 정의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모델이 현상들의 외적인 공통점만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해석하는 실재의 숨겨진 원리들을 포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론적 모델이란 “구성된 대상들을 규정한느 관계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형식적인 초안”이다(Bourdieu et al., 1968, p. 79). 이렇게 볼 때 문화생산 장의 모델은 상징적 이해관계와 경제적 이해관계 사이의 대립이 문화생산을 구조화하고, 생산자와 텍스트와 수용자 사이에는 위치의 조응에 따르는 일종의 선택적 친화성이 생겨나며, 문화생산 장은 상징적 축을 강화함으로써 더 많은 자율성을 확보하고 보편을 성취할 수 있다는 원리들을 지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모델은 다양한 현상을 조직적으로 파악하고, 구체적인 연구프로그램을 설계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부르디외가 장의 경계나 하위장의 존재 등은 언제나 경험적 탐구를 위한 부수적인 문제일 따름이지, 이론적 이슈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이유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잇을 것이다.
문화생산 장의 실제 분석은 다음 절차로 이루어진다. 먼저 다중상응분석을 통해 해당 장의 주요 행위자(작가, 출판사, 감독)의 객관적 분포공간과 그 공간의 구조화원리(총자본의 양, 자본구조)를 끌어낸다. 다음으로 분포공간 안에서 행위자들의 위치를 그들의 전략, 입장, 생산물과 관련지어 해석한다. 이때 통계결과 이외의 다양한 부가자료들(2차자료, 인터뷰, 신문기사 등)이 함께 쓰인다. 끝으로 장에서의 위치에 대한 통시적인 분석을 시도한다. 즉 왜 특정한 행위자가 왜 그런 위치에 있게 되었는지를 출신지역과 교육배경, 부모의 문화자본 등이 만들어낸 아비투스와 관련지어 논의한다. 이 과정에서 장이론은 상징자본, 전략, 아비투스 등의 고유한 개념들뿐만 아니라, 다른 접근에서의 개념들 또한 적절히 이용하면서 분석을 전개할 수 있다. 이는 이론과 경험, 추상과 구체의 차원을 끊임없이 오가며 자기비판과 교정의 작업을 수행하는 노력이기도 하다.
문화생산 장에 대한 부르디외 분석의 기본틀은 두 가지 문제의식 위에 서있다. 하나는 전통적으로 경제와는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표상되어 온 문화부문을 자본, 생산, 시장, 이해관계 등 경제학적 개념의 유추와 모델을 통해 객관화하고 분석함으로써, ‘개인 창작자’, ‘재능’, ‘순수’, ‘무사무욕’과 같은 이데올로기와 단절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산업화된 문화부문에 작용하는 다양한 상징적 논리
- ‘신념의 생산’, ‘상징자본’, ‘상징이윤’, ‘문화매개자’ 등-를 강조함으로써 경제학적 접근이 간과하는 문화재화의 특수성을 고려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의 사회학 전체를 가로지르는 이러한 사고의 ‘이중운동’ - 즉 상징적 차원 분석의 형식적 경제화와 경제현실의 기초에 대한 상징적 설명-이야말로 장이론을 문화생산에 대한 다른 접근들과 차별화시켜 주는 뚜렷한 감정이라 할 수 잇을 것이다(Lebaron, 2003, p. 563). 장이론은 또 문화생산을 사회적 세력관계 속에서 파악하면서, 생산자들의 위치와 담론, 생산물과 수용자와의 관계, 생산자들의 전략, 장내의 갈등, 장들 사이의 관계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할 수 잇는 연구지침이다.
5. 맺음말 그리고 짧은 의견
모든 이론이 그렇듯 장이론 역시 나름의 장점과 약점을 지니는 분석적 틀이다. 논리적 차원에서 장이론의 가장 큰 장점은 통합적 시각의 제공 가능성에 있다. 상징적 지배라는 문제의식 위에서 생산자와 문화재화와 수용자 공간을 한꺼번에 아우르는 연구가설과 분석 프로그램을 생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개념도구들을 가지고 이 세 공간을 탐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들 공간 사이에 구조적 상동성이 전제된다는 것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그런데 실제로는 부르디외에 의해서조차 그러한 작업이 이루어진 적은 없다. 그것은 잠재적인 매력으로만 남았을 뿐, 모범이 될 만한 분석 속에서 현실화되지는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장이론은 여전히 그것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경험적, 역사적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의 미디어 장은 부르디외의 장이론을 계승, 발전, 적용시키는데 있어 너무도 적합한 공간이 아닌가 싶다. 지금부터 해야할 일은 좀 더 방법론적 접근 방식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연구를 읽어내려가는 거다. 그 읽기 속에서 공백을 메꾸어나가고, 한국적 방식으로 직접 차용할 수 없는 개념, 이론들을 다른 학자들의 논의 속에서 채워나가야 하겠다. ~~~ 약간은 재밌는 작업.~~~~ 요즘 하는 다른 일들에 비해.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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