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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즐거움/논문아 놀자

피에브 부르디외 장이론에 대하여

이상길 (2000). 문화생산과 지배 : 피에르 부르디외 장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언론과 사회, 9권 1호, p 7~46.

 

1. 부르디외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부르디외의 이론은 “커뮤니케이션 과정의 다양한 수준들을 서로간에 연결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구조와 사회과정의 중심적인 차원들과도 연결시킬 수 있는 통합적 틀”속에서 ‘상징권력’의 행사를 통해 관철되는 지배양식을 해부하고 있다(Golding & Murdock, 1978). 이 글을 이러한 맥락에서 부르디외 사회학의 커뮤니케이셕학적 쓸모를 검토해보려는 목적을 지닌다. 부르디외는 인용되기보다는 이용되어야 마땅한 저자이다. 그런데 그가 제공하는 도구들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의 작업이 지닌 문제의식, 장단점, 가능성과 한계를 명확히 이해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부르디외가 “베버를 넘어서기 위해 베버에 맞서서 베버를 이용”하듯 부르디외를 이용할 수 있으려면 그에 대한 평가가 필수적인 것이다. 특히 이 글을 무수한 부르디외의 사유 중 장이론(theorie des champs)를 검토대상으로 삼는다(Bourdieu, 1987, p.32). 장이론은 부르디외가 수행하는 모든 상징생산부문의 분석에 체계적이고 반복적으로 적용시키면서 자신이 한 많은 경험적 연구들의 근간으로 삼고 있는데 반해, 이에 대한 심층적 검토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장이론의 개요

1958년 이후 40여년의 기간 동안 부르디외는 30여권의 책과 340편 이상의 논문을 펴냈다. 이 방대학 작업 가운데, 알제리에 대한 초기 인류학적 연구들을 제외한 나머지 연구들은 대부분 프랑스 사회의 다양한 장들에 고유한 논리를 실증적으로 탐구하는 데 바쳐져 있다. 장(champ)은 아비투스(habitus), 자본과 더불어, 그의 관계중심적 과학철학, 성향적(dispositionnelle) 행위철학을 특징짓는 근본적인 개념이다(Bourdieu, 1994, p. 9). 더욱이 이 장들은 나름대로 특수성과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성 또한 띠기 때문에 그는 “장의 일반법칙”(Bourdieu, 1980c, p. 113)을 정식화한 일반이론(Bourdieu, 1992b, p. 257.)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1) 장의 일반적 속성들

부르디외에 따르면 현대 선진사회는 다수의 분화된 장드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장은 그 자체의 특수한 논린와 역사에 뿌리박은 가변적인 속성들과 공통된 불변의 속성들을 가진다. 그의 분석에 나타난 공통된 속성들을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공간이라는 대우주 속의 소우주들로서의 장. 사회공간(계급관계의 장)은 문학적 장, 정치적 장, 경제적 장, 권력의 장등 위계적으로 조직된 일련의 장들에 의해 구조화된다. 고유한 내적 논리를 가지는 이 장들은 서로에 대해 상대적 자율성을 지니며 구조적 동형성을 띤다.

둘째, 위치공간으로서의 장. 장은 객관적 위치들 사이의 구조화된 공간이다. 위치는 장 안에 불균등하게 분포되어 있는 다양한 자본 - 특히 경제자본과 문화사본 -의 양과 구조에 의해 결정되며, 따라서 자본의 불균등한 분포는 장의 구조를 결정한다. 이 구조는 장 내 개인, 기관들 사이의 역사적 세력관계에 의해 규정된다.

셋째, 투쟁공간으로서의 장. 각각의 장은 특수한 내기물과 게임의 규칙을 가지는데, 이 공간은 다양한 위치를 점유하는 여러 행위자들 사이의 투쟁의 공간이다. 투쟁의 목표는 장에 고유한 자본의 전유와 정당한 독점, 혹은 자본의 재정의이다. 행위자와 기관은 내기물이 되는 특수한 자본을 전유하기 위해, 장을 구성하는 규칙에 따라서, 또 때로는 그 규칙성에 대하여 상이한 힘을 가지고 투쟁한다. 서로 대립하고 투쟁한다 할지라도 장 안이 행위자들은 장의 존속에 공통의 이해를 가지며 일종의 객관적 공모관계를 맺고 있다.

넷째, 아비투스, 전략, 일루지오. 게임과 내기물의 신성한 가치에 대한 집단적 신념으로서 일루지오(illusio)는 게임의 조건이자 산물이다(Bourdieu, 1983a). 장 안의 행위자들은 (특수한 이해를 발생시키는) 위치, (습득되고 체화된 무이식적 성향체계로서) 아비투스, 그리고 (장의 역사 속에서 행위자가 연속적으로 점유한 일련의 위치인) 궤적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행위자들이 서로 투쟁하면서 구사하는 전략은 이 세가지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장 안에서 기존 세력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지배자들의 보전전략과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피지배자들, 특히 장에 새로 진입한 신참자들의 전복 전략 사이에 기본적인 대립이 있다. 이러한 대립은 정통과 이단, 구파와 신파, 보수와 혁신,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갈등 속에서 나타난다.

다섯째, 위치공간, 가능성의 공간, 입장공간, 장이 객관적인 위치공간이라면 상이한 위치들은 그에 상응하는 입장을 가지면서, 위치공간에 대응하는 ‘입장공간(espace de prises de position)이 발생한다. 위치와 입장 간의 조응은 기계적으로 결정되지 않으며, 행위자들의 아비투스와 (정당한 문제틀이자 공통의 참조체계로서) 가능성의 공간(espace de possibles)에 의해 매개된다.

 

2) 문화생산의 장과 아비투스

장이론은 원래 문화사회학(특히 문학사회학)의 기획 속에서 성립된 것이다. 지적 장, 문학적 장, 종교적 장과 같은 문화 생산의 장에 대한 분석이 장이론의 실질적인 모델이 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Bourdieu, 1996; 1971a; 1971b; 1971d; 1975a). 그것이 장이론의 근본적 특징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이론은 지극히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사회학의 문제를 지극히 고전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여기서 고전적인 문제란 바로 토대/상부구조, 사회구조/상징체계 사이의 관계를, 고전적인 방식이란 매개들의 설정을 말한다. 장은 “특수한 매개(mediation specifique)이며, ... 그것을 통해 외적 결정인자들이 문화생산에 작용한다”(Bourdieu, 1984; p. 5)

그러나 그는 문화산물의 성격과 발전이 경제적 생산관계로 직접 환원되지는 않는다고 지적하고, 계급이 작품생산의 최종적인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가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철저히 유물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요구(Raphael, 1980, 제 2장)에 직면해서 부르디외는 무엇보다도 문화산물의 생산이라는 계기에 주목한다. 문제는 외적(특히 경제적) 결정인자들이 구체적인 문화산물의 생산과정에서 무엇에 의해 매개되는지 하는 점인데, 부르디외는 베버에 기대 ‘전문적 생산자들의 집단’이라는 답을 내놓는다(이상길, 1999; Bourdieu, 1971c). 이 집단의 고유한 논리를 부르디외는 경제적 용어들 - 수요, 공급, 이해관계 등 - 과 구조주의적 개념 - 위치공간, 동형성-을 동원해 정교화시킨다. 이렇게 해서 첫 번째 매개구조로서의 장이 설정된다: 경제적 생산관계(경제적 이해) - 문화생산의 위치공간(특수한 상징적 이해) - 문화산물

장 안에서 생산된 문화산물은 경제적 이해나 계급관계를 거울처럼 반영하지 않는다. "장이 프리즘처럼 굴절효과를 가하기" 때문이다(Bourdieu, 1993, p.182). 장은 외부의 심급에서 행사되는 제약과 영향력이 굴절, 재구조화, 재번역되는 장소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장은 구체적으로 생산을 담당하는 행위자들의 공간이자 사회구성체 속의 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생산자들이 장에 진입하기 이전에 이미 특정한 계급조건 속에서 형성된 사람들이며 그들이 지금 어떠한 장에 속해 있다고 해서 전체 사회 안에서 그들의 계급위치가 사라져보리는 것도 아니다. 이들 행위자들이 장에서의 게임에 똑같은 내기패와 성향체계를 가지고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생산자들의 사회적 출신과 생산활동 사이의 관계를 정교화시켜야 한다. 이렇게 해서 “장의 논리에로 결코 완전히 환원될 수는 없는 아비투스”(Bourdieu, 1980a, p.6)가 두 번째 매개구조로서 설정되는 것이다 : 경제적 생산관계(계급구조) - 문화생산자들의 아비투스 - 문화산물.

물론 이렇게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장과 아비투스라는 이중의 매개구조와 경제적 생산관계, 그리고 문화산물 사이를 잇는 고리의 성격이 계속 불분명한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이 ‘일방적이고 직접적인 결정관계’라면 부르디외가 고안한 매개구조는 기껏해야 경제환원론의 완화된 형태에 불과할 따름이다. 하지만 부르디외는 현실이 더욱 복잡하다는 사실 또한 잘 안다. 장과 아비투스라는 매개구조의 기능작용을 매개해주는 전략, 가능성의 장, 궤적과 같은 개념이나 장들 사이의 상대적 자율성, 구조적 동형성의 개념들을 그가 계속해서 끌어들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결정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분절적이고 국지적이며 중층적인 형식 속에서 존재한다. 이렇게 해서 부르디외는 경제 환원론으로부터 충분한 거리를 두면서도 결정의 관념은 그대로 살릴 수 있는 입지를 확보하게 된다.

 

3) 장의 논리

장의 매개적 성격을 가능하게 해주는 특징은 그것의 상대적 자율성이다. 상대적 자율성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시 공허한 수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자율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부르디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어원에 따르면 자율적이라는 말은 자체적인 법칙, 자신의 고유한 노모스(nomos)를 가진다는 것, 자기의 기능원리와 규칙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고유한 평가의 범주들이 작동하는 세계인데 이 범주들은 이웃한 소우주에서는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특수한 법칙이며 평가의 원리이자 궁극적으로 배제의 원리인 법칙이다. (Bourdieu, 2000a, p.52).

그런데 어떤 장의 자율성은 그 안의 행위자들에게 특수한 이해이자 심리적인 흥미로서 구성된 내기물의 특수성을 토대로 하는 것이다. 문제는 각 장의 자율성이 결코 절대적이지 않으며, 장들에 고유한 자본들의 독자성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의 태환(conversion)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이한 자본들 사이의 상대적 가치, 즉 태환율은 ‘권력의 장(champ du pouvoir)'에서 일어나는 투쟁이 핵심적인 대상이 된다(Bourdieu, 1989).

이렇게 볼 때 장의 자율성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내부의 역학과 투쟁은 다른 장과의 관계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채 일어나지 않으며, 또 기술발전이나 인구증감과 같은 외부의 요인들로부터 결코 완전히 독립되어 있지는 않다. 바로 자율성이라는 개념 앞에 늘 따라붙는 상대적이라는 형용사의 의미일 것이다. 부르디외가 말하는 장의 상대적 자율성은 그것이 외적인 결정력을 거부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상징자본의 특수한 형태에 의해 지배되는 정도에 의해 규정된다. 즉 장 외적인 것과 장 내적인 것 사이의 세력관계에 의해 표현되는 것인데 이 관계는 연속적인 세대들의 행위에 의해 시간 속에서 장에 축적된 상징자본의 양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장들 사이에 어떤 위계가 성립하는가? 그것은 각 사회의 구체적 정황과 역사적 국면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부르드외에 의하면 “장들간 관계의 초역사적인 법칙은 없으며” 그 관계는 “심지어 진화의 일반적 경향이라는 차원에서조차도 결코 완전히 정의되지 않는다”(Bourdieu, 1992a, p. 85). 하지만 이러한 원칙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부르디외는 6,70년대의 경험적 연구 속에서는 경제적 장의 궁극적인 지배력을(Bourdieu & Passeron, 1964; Bourdieu & Passeron, 1970; Bourdieu, 1975, 그리고 80년대 후반부터는 (행정적 혹은 관료적 장들의 총체로서) 국가의 지배력을 이론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 같다(Bourdiue, 1989; pp.535~559; Bourdieu, 2000b).

한편 장이 역동성, 장을 움직이는 기본적인 동인은 “게임으로부터 제외되어 공허의 나락으로 빠져들지 않으려면 장 안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유지하거나 개선하기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는 달리 말해 장 안에서만 발생하는 특수한 자본을 보존하거나 증가시키기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업슨 행위자들의 작용과 반작용 속에”(Bourdieu, 1980a, p.7)있다.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 또 경우에 따라서는 문제가 되는 자본을 재정의하기 위해 장 안의 행위자들은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면서 서로 경쟁한다. 이 때 구사되는 전략의 성격은 행위자들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와 그들의 궤적 그리고 아비투스에 의해 달라진다.

장에서 많은 양의 상징자본을 축적하고 이미 지배적인 위치에 자리잡은 행위자들은 장의 기존 상태를 보존하려는 전략을 취한다. 반면 새로 장에 진입한 신참자들은 전복 또는 이단의 전략을 구사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장이 상대적으로만 자율적이기 때문에 장 안에서 특수한 상징자본의 축적에 작용하는 위계화 원리 역시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장 특유의 이해에 기초한 자율적 원리만이 아니라 장외부의 요인들에 기초한 타율적 원리도 있는 것이다(Bourdieu, 1971d). 문학적 장의 경우, 문학상의 수상과 같은 동료들의 인정은 자율적 원리이며, 판매부수와 같은 상업적 성공은 (경제적 장의 기준에 기댄) 타율적 원리라 할 수 있겠다. 장 내에서의 위치에 따라 행위자들은 이 가운데 한 원리에 더 많은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고 따라서 그 원리들의 위계화는 지속적인 투쟁의 대상이 된다.

문화생산의 장이 자율적일수록 타율적 원리는 정지되고 상징적 세력관계는 자율적인 생산자들에게 유리해진다. 또 생산자가 다른 생산자들만을 시장으로 삼는 ‘제한 생산의 장’과 일반공중을 시장으로 삼는 ‘대량생산의 장’ 사이의 단절은 더욱 뚜렷해지며 대량생산의 장은 상징적으로 배척되고 평가절하된다. 문화생산의 장의 상대적 자율성은 그 형식적 속성과 가치를 다만 장의 구조와 역사에 빚지고 있다. 장이 자율화될수록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장의 특수한 역사에 점점 더 의존적이 되며 외부의 역사에는 점점 더 독립적이 된다. 따라서 일정한 시기의 경제적, 정치적 사회세계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문화적 장의 상태를 추론하거나 예측하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Bourdieu, 1993, p.188).

장들 사이의 분리와 거리가 상대적 자율성의 논리 속에서 드러난다면 연결과 접합은 구조적 동형성의 논리를 통해 드러난다. 즉 부르디외에 따르면 각 장마다 환원불가능한 특수한 형식을 띠면서 동시에 지배자와 피지배자, 보존과 전복을 위한 투쟁, 재생산의 기제 등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각 장은 고유한 속성들에게 불구하고 상이한 계급들을 대립시키는 것과 동일한 분할선에 의해 특징지어지는데 이와 같은 차이 속의 유사성(Bourdieu, 1992a, p.82)이 바로 동형성이다. 부르디외는 사회적 장과 다양한 장들 사이에는 구조적이고 기능적인 동형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어떤 효과를 생산하는가? 예를 들어 문화생산의 장에서 경제적으로 피지배적이고 상징적으로는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생산자들은 전체 사회공간 안에서 마찬가지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유대감을 느끼며 그들의 취향에 거의 자동적으로 조응하는 작품을 생산한다. 따라서 그들은 특히 위기 시에는 피지배계급의 잠재력을 동원하고, 권력의 장 내 기존질서를 전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회세계에 대한 비판의 정의를 제시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을 이용할 수 있다. 동형성은 위치공간들 사이에서만이 아닌 위치공간과 입장공간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그렇다면 장르, 학파, 작가들의 위계를 전복시키는 상징적 세력관계의 심층적인 변화, 즉 상징혁명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부르디외는 이 문제를 대략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한다. 첫 번째는 행위가 개인의 수준으로, 상징혁명에서 혁신가와 독점자본가의 역할이 중시된다. 먼저 혁신가의 경우 어떤 행위자가 매우 모험적인 위치를 지향하는 성향과 그것을 계속 지속시킬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이는 그가 상당한 경제자본과 사회관계자본을 소유하고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경제자본은 물질적 필요로부터 행위자의 일정한 자유를 보장하고, 대담성과 자신감을 주는 담보물이 되며, 사회관계자본은 장 내부의 새로운 상징이윤의 기회구조를 예감하게 해주기 때문이다(Bourdieu, 1971e). 다음으로 독점자본가의 경우, 장이 자율화될수록 장 특유의 이해에 기초한 자율적 원리가 상징자본의 축적에 핵심적인 준거로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장의 진입장벽은 높아지고 신참자들이 기성의 확고한 정당성의 원리를 뒤흔들 수 있는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결국 이미 독점자본가의 지위에 올라 장의 구조를 장악하고 있는 행위자만이 더 많은 혁실을 계속 수행할 수 있다(Bourdieu, 1975b).

둘째, 구조적 수준에서 상징혁명은 장 내부투쟁의 격화와 그를 지지하는 외적 변화에 의해 좌우된다. 장의 객관적 구조가 게임에 참여하는 행위자의 기대 실현에 불리한 경우 행위자들은 점점 급진적인 전략을 택학 되고 장의 재생산은 위기에 처한다. 달리 말하면, 장 내에서의 투쟁은 아비투스와 구조 또는 주관적 기대와 객관적 기회의 조응에 균열이 생길 때 더욱 치열해지고 전위적인 입장의 생산 또한 활발해지는 것이다(Bourdieu, 1988). 상징혁명은 이렇게 첨예해진 정통과 이단의 대립이 같은 방향의 외적 변화에 의존할 때 가능하다. 이 변화들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교육받은 인구의 성장이다. 이는 생산자의 수적 증가와 잠재적 독자시장의 팽창을 가져오기 때문이다(Bourdieu, 1992b, p.183). 이처럼 행위자 개인과 구조적 요인들이 역사적 정황 속에서 특수한 방식으로 결합할 때, 위치공간-입장공간-가능성의 공간의 변화가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3. 비평

 

장이론에 대한 비판은 크게 다섯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1) 장의 경계, 장들의 관계

장이라는 개념의 인식론적 지위와 용법이 언제나 일관된 것은 아니다. 다양한 경험적 연구 속에서 장이라는 개념은 사뭇 이질적인 대상들에 별다른 주의 없이 적용되곤 한다. 부르디외는 장을 실재(realites) 또는 사유양식(mode de pensee)으로 다루는 두 가지 방식 사이에서 계속 동요하고 있다(Bourdieu, 1994a, p. 326).

장 개념의 효용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는 그 적용의 한계를 명확히 해야 할 것 같다. 장이론이 총체성과 보편성을 지향하기보다는 특수성과 역사성을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더 엄밀하고 생산적인 분석틀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현대 사회의 특정한 ‘분화된 행위영역들’로만 그 적용이 제한되는 편이 낫다. 유념할 점은 이러한 범위 내에서라면 장 개념의 적용은 명목론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객관적으로 독립된 실재로서의 개개의 장이 존재하고, 이들의 총합이 곧 전체 사회라는 식의 관념은 곤란하다. 우리는 그저 이 개념을 매 연구활동 속에서 적절한 분석대상의 재단을 위해 이용할 수 있다. 다양한 관심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종이 위에서 구성된 실재들(정치적 장, 저널리즘의 장, 권력의 장)들은 현실 속에서 그 경계가 뚜렷한 것도, 상호배재적인 것도 아니며, 종이 위에서 서로 계속 겹쳐질 수 있을지언정, 하나의 총체를 형성하기 위해 합쳐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장이론을 통해 사회가 독자적인 실체라는 19세기 사회학의 낡은 개념을 버리고 “다중적 사회관계라는 대안적 관념”(Tilly, 1984; p.46~54)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모든 집합체와 사회적 맥락을 장으로 환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장의 외부를 보게 되고, 그로써 다시 장이론이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지 않는 것을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장은 모든 개인, 제도, 상황, 상호작용, 실천을 포괄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로 직업적, 공적 활동 부분을 포착하며,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상징자본(권위)과 관계된 영역에 더 잘 부합한다. 더욱이 원칙적으로 장의 행위자 범주에 포함되지만, 상징자본을 주된 내기물로 삼지 않는 단순한 생산직, 관리직 노동자층 역시 연구에서 실질적으로 제외되기 쉽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장이론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권위 있는 직업적 활동에 종사하는 남성행위자들만을 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장이론은 또한 장 한가운데서 투쟁하는 행위자들의 무대 밖 혹은 장 바깥의 삶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즉 그들의 다양한 공적, 사적 행위들이 아닌 직업적 활동만이 분석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Lahire, 1999, p. 34~35).

장이론을 틀로 삼아 실증적 연구를 하고자 할 때, 제일 먼저 부딪히게 되는 난점은 장의 경계를 설정하는 문제다. 부르데외에 따르면 “장의 경계는 실증적인 조사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다. 장이 언제나 암묵적인 혹은 제도화된 진입장벽을 포함할지라도, ... 장의 경계는 드물게만 법적 형식을 띤다”(Borudieu, 1992a, p. 76).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기준에 의해 정해질 수 있는가? 부르디외의 대답은 “장의 경계는 장의 효과가 멈추는 지점에 자리한다”(Borudieu, 1992a, p.76)거나 어떤 장 내부, 특정한 행위자의 존재는 “그가 장의 상태를 변형시킨다 - 혹은 그를 빼내면 많은 변화가 생긴다-는 사실”(Bourdieu, 2000a, p.61)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호한 답은 브르디외가 장을 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암시를 준다는 점에서는 나름 유용하다. 어떤 장을 분석하기 위해 그는 일단 공적 혹은 직업적 활동부문에 대한 기존의 분류체계를 그대로 취하는 데서 출발한다. 다음으로 그는 장에 속해야 하는 행위자와 빠져야 하는 행위자를 가려낸다. 예를 들어 정치적 장을 연구하고자 할 때는 언론인과 여론조사 전문가들을 이 장의 행위자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들이 정치적 장에서 상당한 효과를 생산하기 때문이다(Bourdieu, 2000a, p.61). 이는 정치가와 언론인의 영역을 분리시키는 일반적 분류체계와는 어느 정도 어긋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대상의 자의성과 모호성을 피하기 어렵다. 언론인들이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원래 언론인들이 정치적 장의 구성원이었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면 저널리즘의 장과 정치적 장의 세력 관계가 변화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둘 가운데 어떤 시각을 가지는가에 따라 장의 범위와 경계는 물론이려니와 정치현실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틀과 가치판단 역시 크게 달라져버린다.

장의 경계를 잡고 나서야 우리는 어떤 장과 다른 장을 구별할 수 있고 다시 장들간의 관계에 관해서도 말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장의 경계 확정이 까다롭고 막연한 문제라면, 장들의 관계 설정 역시 까다롭고 막연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문제를 일으키는 대표적 사례가 바로 (광고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언론과 경제이다.

아울러 장의 주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부르디외가 주로 분석하는 지적 장, 문학적 장에서 지식인이나 작가는 비교적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활동하고 경쟁하며, 그들의 생산물에는 개인의 흔적이 남는다. 하지만 문화부문의 산업화는 문화적 장의 주체를 상당한 정도 개인에서 기업으로 옮겨 놓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개인행위자들의 실천을 분석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적 도구들을 그대로 기업에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인가? 브르디외는 그렇다고 믿는 것 같다. 하지만 기업들의 전략과 개인행위자의 전략은 동등한 차원에서 다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생산물의 성격(입장) 역시 마찬가지다. 개인의 작품과 집단적으로 생산된 작품을 동일한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정이 그렇다면 부르디외의 장이론을 문화부문의 분석에 응용하는데에는 적잖은 주의가 요구된다. 산업화 정도가 높거나 다수의 노동이 투입되는 문화산물들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2) 생산자의 장

장이론은 문화산물의 생산의 계기에 주목한다. 이때 생산자는 작품의 물질적 생산자(작가, 감독) 뿐만 아니라 작품의 가치에 대한 신념의 생산자(출판사, 비평가, 아카데미)까지 망라한다. 이는 장이론적 접근의 명백한 장점이자 그것과 경제주의적 접근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이다. 부르디외는 예술작품을 일종의 물신(fetiche)으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예술작품은 그것을 예술작품으로서 인정하게 만드는 집단적 신념에 의해서만 가치를 부여받은 상징적 대상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이론은 이른바 신념의 생산(Borudieu, 1977) 속에서 작품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문화적 매개자들 전체를 분석대상의 일부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르디외의 경험적 연구 속에서 문화적 장은 “생산자의 장”으로 축소되는 경향을 띤다. 이는 바꿔 말하면 문화산물의 생산조건과 소비자라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체계적으로 외부화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부르디외 분석에서는 기술이나 법, 제도 등과 같은 문화산물의 전반적인 생산조건에 대한 고려가 매우 드물게 나타난다. 20세기 중반 이후 대다수 국가에서는 문화적 장의 행위자들이 자신이 소유한 자본의 양과 구조, 아비투스, 궤적 등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많은 상징생산의 장들의 경우 관련법규, 제작지원제도라든지 기술발전 등이 행위자들의 실천을 조절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어떤 법령의 신설이나 폐지, 정책이나 제도의 새행과 변경,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확산 등은 때로는 문제가 되는 장의 구조 전체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상당한 정도로 산업화되어 있으며, 국가의 정책적 개입과 기술의존성 또한 심한 현대사회의 문화적 장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것들을 단순한 외적 요인들로서 간주하면서 이들의 영향력을 장의 자율성/타율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일까? 그것은 부적절한 분석과 잘못된 정치로 귀결되지는 않을까?

한편 상징재화의 소비자는 장이론에서는 주변적으로만 언급된다. 부르디외는 장을 생산의 장과 직접 동일시하기도 하고(예술적 장이나 과학적 장), 경우에 따라 생산자와 소비자가 모두 포함되는 공간으로 묘사하기도 한다(정치적 장이나 종교적 장). 소비자는 생산의 장에 대해 적극적인 역할이나 반작용을 하지 못하고, 위치의 구조적 동형성에 따른 거의 자동적인 반응만을 보이는 집단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3) 소비, 전유, 수용

소비자에 대한 장이론적 접근은 문화적 장의 분석에서 가장 정교한 형태를 띠고 나타난다. 먼저 부르디외는 문화생산자의 공간과 소비자의 공간 사이에 구조적 동형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특정한 작품 혹은 생산자 유형과 공중 유형 사이에 상응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동형성에는 늘 구조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그것이 의식적인 상호작용의 소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조적 동형성의 테제가 문화연구를 통해 드러난 전유와 수용의 복잡성을 완전히 무시한 채 제기되었다며 본다면 그것은 명백한 오해다. 그는 사회구성원들의 소비가 전략적으로 특정한 가치를 지니는 대상 쪽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 가치는 사회세계의 계급적 분리를 반영하는 분류체계 속에서 규정되는 것으로 본다. 이를 통해 상징적 계급투쟁이 일어나는 것이다(Bourdieu, 1973; 1978).

문화연구에서 이야기하는 수용은 부르디외 식으로 말하면 상징적 전유와 해독을 포괄하는 개념이 될텐데, 이를 분석하는 데 있어 그는 두 가지 사실에서부터 논의의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첫째, 어떠한 문화산물에나 장의 역사와 생산자에 의해 부과된 문화적 약호가 내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약호의 해독이 수용을 특징짓는다. 둘째, “메시지의 성격이야 어떻든 간에, 수용은 그것을 수용하는 사람들의 지각, 사유, 행위의 범주에 의존한다”(Bourdieu, 1968, p.594). 이렇게 본다면 특정한 개인에게 있어서 문화산물의 수용이란 “작품이 요구하는 약호와 개인적 능력 사이 편차의 함수이다. 이 때, 개인적 능력은 대체로 적합한 사회적 약호가 숙지된 정도에 의해 정의된다”(Bourdieu, 1971e, p.1370).

결국 장이론은 수용의 다원성을 무시하지 않으며, 수용이 작품에 내재된 의미구조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니도 않는다. 다만 수용능력과 수단의 불균등한 분포 및 사회적 기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장이론은 문화연구과 그 초점을 달리한다. 부르디외는 문화산물의 상징적 전유와 해독이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나며, 그 방식들의 계급적 유형화가 가능하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수용을 결정짓는 요인이 개인의 문화자본과 성향체계 즉 아비투스라면 그것을 구조화하는 것은 바로 계급위치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전유와 수용에 대한 장이론적 접근은 상당히 세련되기는 하지만,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이 접근이 여러 가지 문화 산물 가운데서도 특히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능력에 관한 논의에 기초해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부르디외가 보기에 예술작품은 제대로 읽히기 위해서 특정한 문화적 약호의 동원을 객관적으로 요구한다. 이는 작품의 특수성을 인지하게끔 해주는 상징적 전유수단을 갖고 있지 못한 피지배계급의 즉자적 미학(esthethique en soi)은 거부보다는 결핍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Bourdieu, 1971e, p. 1371). 이러한 해석은 지배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Grignon & Passeron, 1989, p. 116~119).

둘째, 장이론적 접근에서는 문화적 약호의 복합성에 대한 고려가 빠져있다. 다양한 문화적 장에서 일어나는 소비를 그 (약호와 수용의) 독특성 속에서 포착하려 하지 않고, 전체 사회적 장의 구성원들로서 외부화된 소비자들의 계급적 속성을 기계적으로 대입시켜 재단해버리면, 그리하여 취향체계의 일관성을 섣불리 가정해버린다면, 이는 상이한 문화산물들의 수용이 지니는 북합성과 사회적 의미를 정교하게 파악하는데 장애가 될 것이다. 아울러 표준화되고 산업화된 문화산물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오늘날, 그것의 해독에 요구되는 능력과 수용야식에 그렇게 분명한 계급적 격차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아울러 기술적 복제가 일반화되고 원본 없는 시뮬라크르로서만 존재하는 문화산물들의 소비가 무화적 실천의 주류를 이루게 된 오늘날, 전유와 활용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4) 위치, 담론, 권력

장이론이 구조주의나 속류 마르크스주의와 단절하고 생산자의 자리를 복원시켰다면, 이러한 특징은 담론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일관성 있게 드러난다. 그것은 기호학, 구조주의 입장과 달리 ‘담론의 장’ 바깥의 작가들에게서 개개 담론들의 특성과 관계에 대한 설명원리를 발견한다. 부르디외는 “작품에 대한 작품의 작용”은 작가들의 중개를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전략의 형식과 내용은 특수한 게임의 구조 속에서 작가들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와 관련된 이해관계에 빚지고 있다“고 주장한다.(Bourdieu, 1992b, pp. 279~280).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상호관련된 가정이 담겨있는 듯 싶다.

첫 번째 가정 : 부르디외는 생산의 장 내 특정한 위치에서 그 위치에 따른 이해에 얽혀있는 생산자가 다른 생산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취하게 되는 입장에 의해 작품의 근본적인 속성이 결정된다고 본다. <위치=이해=생산자>와 <입장=작품> 사이에 일종의 직접적인 연관성이 설정되는 것이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위치에 의해 결정되는 관점, 이해관계, 시각의 원칙들”인 셈이다(Bourdieu, 1989, p.8). 그러므로 “과학적 분석은 두 관계의 집합, 즉 변별적 입장으로서 취해진 작품이나 담론의 공간과 그 생산자들에 점유된 위치 공간을 서로 연결시켜야만 한다”(Borudieu, 1988b).

두 번째 가정 : 이러한 작업은 위치공간과 입장공간 사이의 놀라운 구조적 조응을 보여줄 것이다. 그는 입장공간과 생산의 장 속에서 그 저자들에 의해 점유된 위치공간 사이에 거의 완벽한 동형성이 있다는 가정을 프랑스의 68년 5월 사건 동안 교수들이 취한 정치적 입장과 학문적 장 내에서 그들의 위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관찰이라든지, 19세기 프랑스 문학적 장의 구조에 대한 분석 등을 통해 확인한다.

담론에 대한 장이론적 접근이 딛고 있는 이 두 가지 가정은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유물론적 상식 덕분에 당연하고 친숙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그다지 견고한 지반은 못되는 것 같다.

첫 번째 가정에 대한 비판 : 위치와 담론 사이에 그렇게 분명한 인과관계가 성립하는가? 과연 생산자는 장 내에서 자신의 특수한 이해에 따라서만 말하고 글쓰고 정치적인 판단을 내리는가? 이 점에서 장이론은 계급결정론으로 전락해버릴지도 모르는 위험을 늘 안고 있다. 물론기계론적 사고방식으로 환원되는 것을 우려하고 거부하는 부르디외는 위치공간과 입장공간의 조응은 외적인 변화(신참자들의 진입으로 인한 양적, 질적 경쟁)와 특히 가능성의 장에 의해 매개되며, 또 행위자들의 아비투스와 궤적에 의해서도 매개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론적 여과장치에도 불구하고 실제 분석에 있어서는 결정론으로 곧잘 흘러가 버린다. 한편으로는 외적인 변화와 가능성의 장이라는 개념이 구체성을 얻지 못한 채 수사학적인 수준에서만 기능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 아비투스와 궤적의 개념은 사회적 출신의 결정력을 완충시켜주기보다 오히려 강하게 환기시켜주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가정에 대한 비판 : 담론공간과 위치공간 사이의 구조적 동형성이라는 두 번째 가정은 첫 번째 가정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두 번째 가정대로 특정한 유형의 담론에 특정한 유형의 생산자들이 조응하려면, 담론은 생산자 위치의 직접적인 표현이어야만 한다. 이것은 자연히 위치가 담론을 결정한다는 첫 번째 가정을 끌어들이게 되는데, 이 가정은 사실 담론공간과 위치공간 사이의 동형성, 특 통계적 상응관계라는 증거와 상식적 인과성의 논리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모든 형태의 담론은 정치적 입장(보수적, 혁신적 등)이라든지 예술적 사조(자연주의, 상징주의)와 같은 빈약하지만 뚜렷한 특성들로 축소되고 만다. 이는 지나친 단순화와 환원이 아닐 수 없다.

두 가지 가정으로부터 솟아나는 의문점들은 근본적으로 부르디외가 담론의 특수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문제와 연결된다. 우선 그는 담론의 힘이 담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담론 바깥에 있다고 본다. 즉 담론이 표상하는 제도의 권력이야말로 담론이 행사하는 힘의 진정한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언어의 권위는 바깥에서 온다. ... 이 권위를 언어는 고작해야 재현하고, 표현하고, 상징화한다”(Borudieu, 1982, p.105). 따라서 “말의 권력은 대변인이 위임받은 권력(pouvior delegue)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러한 논의는 담론적인 것과 비담론적인 것이 명확히 구분된다는 전제 위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보면, 마치 담론 외부의 객관적 결정요인인 듯 제시되는 위치, 이해관계, 실천 조차 사실은 담론적 층위의 개입을 통해 구성된다. 부르디외가 이른바 담론에 의해 표상된다고 간주하는 어떤 제도나 기관, 대변인의 권위가 담론에 독립적이며 선험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결국 담론의 힘은 그 외적 조건 속에서 완전히 해소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장이론이 관념론이 아닌 바에야 담론의 완전한 자율성을 역설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의 구성적 힘과 상대적 자율성에 관해서는 좀 더 섬세한 인식이 요구되는 것이다.

 

5) 자율성의 의미

장이론은 “자율적 장들의 존재에로 이르는 사회세계의 분화과정”을 사회학적 원리로서 인정한다(Bourdieu, 1997a, p. 119). 그렇다면 장의 자율화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에 대한 부르디외의 답변은 모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지배의 경로들이 그렇듯이, 자율성의 경로들 역시 알 수 없는 것은 아닐지라도, 복잡한 것이다”(Bourdieu, 1992b, p.81).

가령 프랑스에서의 문학적 장의 기원에 관한 그의 연구를 보면, 자율화의 동력과 과정은 불분명하다. 자율화는 교육받은 인구의 증가에 따른 특정한 공중의 구성이라는 장 외부의 요인에 의한 것도 같고, 보들레르나 플로베르 같은 장 내부의 입법자 덕분인 것도 같다. 더욱이 부르디외는 19세기 후반이야말로 문학적 장이 “그 이후에 결코 넘어서지 못한 자율성에 이르렀던 순간”(Borudieu, 1992b, p.304, p357)이라고 기술하지만, 왜 그 이후로는 자율화가 더 진척되지 못하는지, 프랑스의 특수성인지 아니면 장의 보편적 특성인지에 관해 아무 설명도 하지 않는다. 또 “장의 역사는 실제로 역전될 수 있다”(p.337)고 주장하면서, 20세기 중반 이후 기업의 후원과 언론매체의 영향력 아래 예술적 장의 자율성이 위협받고 잇는 상황에 우려를 표한다(pp. 461~472). 하지만 장의 자율성이 언론매체와 기업이라는 기제에 의해 그토록 쉽게 위협받을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장의 자율성이 계속해서 쟁취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비축적성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이 역사의 생산물들은 축적성의 형태를 띤다”(p.337)는 그의 주장과 배치된다. 아울러 특수한 상징자본이 장 내에 많이 축적될수록 장의 자율성 역시 커진다는 명제 역시 지지될 근거가 없다.

자율성의 역사적, 이론적 의미는 한층 더 미묘한 문제를 제기한다(Lahire, 1999; Fabiani, 1999). 부르디외에게 있어 문화적 장, 과학적 장의 자율화는 긍정적인 것으로 인지되지만, 정치적 장, 종교적 장이나 경제적 장의 자율화는 부정적인 것으로 인지된다. 이러한 가치 판단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면 또 어떤 근거를 지니는가? 예술적 장이나 과학적 장의 진입장벽이 높아지고, (다른 생산자들만을 생산물의 소비자로 삼는) 제한생산의 장으로 변해 가는 현상은 예술적, 과학적 진보의 표시인데 반해(Bourdieu, 1991b), 정치적 장이 전문적인 직업정치가들 사이의 투쟁에 의해서만 지배되는 현상은어째서 문제시되는가? 마찬가지로 경제적 장은 왜 완전히 자율화되기보다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편이 더 바람직한가? (Bourdiey, 2000b, p. 271~280). 이는 각 장에서 실현되는 이성들의 특수성에 대한 본질주의적 구분없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혹시 부르디외가 그토록 자신의 과학 바깥으로 내몰고자 했던 윤리와 당위가 슬쩍 끼어 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는 아마도 각 장의 특수한 내기물에 대한 해명으로 이 질문을 피해갈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는 정치와 종교가 사람들의 동원력으로 힘을 주고, 사회세계에 대한 시각의 원리를 생산하고 부과하는 상징투쟁에 참여한다는 특수성 때문에, 그들의 고객들로부터 결코 완전히 자율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완전한 자율화가 불가능하다는 말과 자율화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말은 엄연히 다르다. 정치와 종교가 제시하는 좋고 나쁜 것의 원리와 과학이 제시하는 옮고 그른 것의 원리, 예술이 제시하는 아름답고 추한 것의 원리는 제각기 독자성을 지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적어도 왜 좋고 나쁜 것은 일반인들이 판단할 수 있으며, 또 민주주의적으로 그래야 하고, 옳고 그른 것, 아름답고 추한 것은 그럴 수 없는지, 나아가 그래선 안 되는지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비판은 부르디외의 인식론과 사회과학관 전반에까지 확장될 수 있다. 그의 과학주의적 입장에서 전체 사회공간은 일상적 담론, 대상과 위치의 사회적 위계 등을 통해 사회과학적 장의 자율성을 저해하는 외적 요인으로만 표상된다(Borudieu, 1991a, p. 377). 그는 상식적 세계관과 단절하며 대상을 구성해야 한느 사회과학의 원칙을 강조하지만, 사회과학에 있어서 일상적 지식의 단절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떻게 가능한지, 또 사회과학적 지식의 내재적 취약성과 불완전성은 어떤 것인지 해명하지 않으며, 사회과학적 지식의 사회적 수요와 활용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모호한 자세를 취한다(Bourdiey, 1997b, p. 65~72).

 

4. 맺음말과 단상

이 기나긴 장이론에 대한 설명과 그보다 더 기나긴 비판은 부르디외 장이론의 무용성을 증명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단점과 한계를 인식하고, 장이론의 전제와 체계에 대한 검토가 전제되어야, 한국의 현실을 대상으로 한 구체적인 연구에 장이론이 생산적인 분석틀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부르디외가 장에 대한 자신의 구체적 연구 속에서 이용하고 있는 방법들은 각종 사회통계와 설문조사의 (2차) 분석, 상응분석(correspondence analysis), 인터뷰, 참여관찰, 담론분석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하지만 일관된 정신이 있다. 바로 개방성과 위반으로 특징지어지는 ‘방법론적 실용주의’이다.

 

부르디외는 과학적 엄격성의 조건이 사회통계나 담론분석, 참여관찰 같은 특정한 방법의 관례적인 적용이 아니라, “기법과 절차에 대한 성찰적 비판”(Bourdieu, 1989, p.10)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이런 저런 연구방법의 당파적 거부에 대한 절대적 거부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입장이 언제나 성공적인 결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대안적 원칙으로서 충분히 존중될 필요는 있다.

 

이 논문을 읽고,  

무언가 엉켜있던 살타래가 풀린 기분이었다. 

부르디외..

내가 당신을 부릅니다.

 

당신과 친구가 되고 말겠습니다.